타원형 작도법으로 설계한 왕가의 무덤, 3만7000여점 동원된 신라 고분도 있다
연 3만6000여 명 동원된 신라 고분…‘타원형’ 작도법으로 설계됐다
1호부터 155호까지…. 일제가 1915년부터 이른바 고적조사사업을 벌이면서 경주 시내 고분에 붙인 일련번호이다.
이중 125호분과 106호분은 예부터 봉황대(125호분)와 전 미추왕릉(106호분)으로 알려져 왔다.
단독분으로서는 가장 큰 125호분은 고려~조선을 거치면서 고분이라기보다는 경주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 알려져왔다. 106호분 역시 어느 시점부터 제13대 미추왕(262∼284)의 무덤으로 지목되어 왔다.(그러나 106호분은 4세기 이후에 조성된 돌무지덧널무덤일 가능성이 크다) 나머지 고분은 그저 번호로만 지칭되었다.
■무덤인가 전망대인가
그러다 1921년 주막집 확장공사 과정에서 우연한 기회에 금관이 출토된 ‘128호분’에 ‘금관총’이라는 이름이 처음 붙었다.
이후 금동 장식신발(식리·飾履)이 확인된 ‘126호=식리총’(1924), 금방울(금령·金鈴)이 출토된 ‘127호=금령총’(1924)이 새 이름을 얻었다. 스웨덴(서전·瑞典)의 황태자(아돌프 구스타프 6세·재위 1950~73)가 봉황(鳳凰) 장식이 달린 금관을 수습한 ‘129호=서봉총’(1926)도 이채로웠다.
해방후인 1946년 이뤄진 140호분 발굴 결과 ‘광개토대왕’ 명문이 담긴 청동제 그릇(壺杅·호우)이 출토된 1고분과 은방울(은령·銀鈴)이 나온 제2고분이 붙어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140호분이 황남대총 남북분처럼 일종의 표주박 형태였음이 새롭게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140호분은 호우총(제1고분)과 은령총(제2고분)으로 구분됐다. 지금 이 순간까지 대부분의 포털사이트와, 관련 연구서에서 140호분 인근에 있는 139호분을 은령총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139호분과 은령총은 전혀 별개의 고분이다.(심현철 특별연구원 설명)
또 1971년 발굴에서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등이 출토된 155호분은 ‘천마총’, 1973~75년 금관 및 금동관 등 5만6000여점의 유물이 쏟아진 ‘98호분’은 ‘황남대총(남북분)’으로 바뀌었다.
이 가운데 ‘왕가의 무덤’으로 꼽히는 대릉원 지구에는 60여기의 고분(형태가 남아있는 고분만)이 집중되어 있다. 담으로 둘러쌓인 대릉원 안쪽에 23기, 그리고 이른바 ‘대릉원 지구’로 묶인 외곽지역에 40여기 등이다.
그 고분의 90% 이상이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무덤 주인공과 부장품을 넣는 나무 덧널(목곽)을 놓고, 그 주변에 돌을 쌓은 뒤(적석), 다시 그 위를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든 구조로 조성됐다.
이런 돌무지덧널무덤의 규모는 소형(밑지름 10m 이내)에서 초대형(80m 이상)까지 다양하다.
예컨대 경주에서 소문난 포토존이 된 황남대총(지름 80~120m, 높이 22~23m)도 초대형(쌍분)이다. 주인공이 홀로 묻힌 단독분인 봉황대(지름 86.6m, 높이 21.4m)와 130호분(서봉황대·지름 79.9m, 높이 21.3m)의 규모도 엄청나다.
■타원형의 작도원리
그렇다면 신라인들은 이 어마어마한 고분을 어떻게 조성했을까.
우선 경주에 조성된 돌무지덧널무덤의 80% 이상은 타원형으로 조성되었음이 확인됐다.(심현철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특별연구원) 이 타원형 고분의 축조에 정교한 수학적 원리가 적용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성했을까. 심현철 연구원의 설명으로 알아보자. 타원형은 2개의 점(초점)을 이용해서 그린다. 신라인들은 무덤을 조성할 바닥에 정한 두 개의 초점에 줄을 고정했다.
그런 다음 그 줄을 팽팽하게 유지하면서 막대기를 줄에 걸쳐 움직이면서 그렸다. 그렇게해서 정확한 타원형 고분이 완성됐다. 고분의 크기는 초점 2개의 거리에 달렸다.
소형분은 짧게, 중대형분은 길게 그렸다. 예컨대 소형분은 묘광(무덤의 관·곽을 넣으려고 판 구덩이)의 양 끝점에, 중·대형분은 돌무지(적석)의 양 끝점에, 각각 두 개의 초점을 설치했다. 신라인들은 이렇게 1500년 전 타원의 형태와 작도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무덤 설계에 적용했다.
동아시아에서 이와 같은 타원형 구조의 고분을 축조한 사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동아시아에서 수학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중국에서조차 타원과 같은 기하학은 중세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5t트럭 2만2500대분
그렇다면 돌무지덧널무덤을 쌓는데 얼마만큼의 돌과 흙이 사용됐을까.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는 2020년 경주 쪽샘 44호분을 쌓는 데 필요한 돌무지의 양을 계산한 바 있다. 쪽샘 44호분의 봉분 규모는 중형급(지름 30m)이었다.
그러나 돌무지의 규모(16~19m)가 금관총(20~22m)·서봉총(16~20m) 등 왕릉급 고분과 맞먹었기에 한번 추산해본 것이다.(발굴 당시 돌무지는 3/4 정도 남아있었다) 돌의 표본(1㎥=수량 298개, 무게 1814.1㎏)으로 계산해보니 전체 쌓인 돌의 수는 16만4198개(부피 551.34㎥) 정도였다.
그것을 무게로 잴 경우 992.41t(5t 트럭 198대)에 이르렀다. 돌 한 개당 무게는 7~8㎏에 달했다. 그러나 이미 깎여나간 봉분(흙)은 측정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대형 고분은 어떨까. 1973~75년 사이에 발굴된 황남대총(남·북분)을 살펴보자.
계산해보니 봉분(흙)의 경우 10만8000t(남분 6만3822t+북분 4만4271t) 가량 쌓여 있었다. 돌무지의 규모는 4377t(남분 2340t+북분 2037t)에 달했다. 만약 5t트럭 기준으로 흙은 2만1600대, 돌은 875대가 실어날라야 할 천문학적인 분량이다.
■공사인원 3만6000여명
그렇다면 인력은 얼마나 투입되었을까. 황남대총 남북분 가운데 먼저 조성된 남분의 경우를 살펴보자.
황남대총 발굴단(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의 계산 결과 남분의 경우 6만6162t(흙 6만3822t+돌무지 2340t)을 실어나르는데 필요한 인원은 2만7141명으로 추산됐다.
여기에 오늘날의 토목공사 시공에 연결지을 경우 고르기, 다지기, 쌓기 등에 필요한 인원은 운반인원의 약 3분의 1정도인 9144명 정도인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황남대총 남분을 쌓는데 필요한 연인원은 약 3만6285명 정도였을 것이라는게 발굴단의 추산이었다. 그렇다면 작업일수는 어떻게 되었을까.
1인당 작업 면적(보통 16㎡)을 남분의 평면적(5625㎡)으로 계산하면 전체 면적에 352명 정도가 들어가 일할 수 있었다. 이를 근거로 대략 하루 300명 정도가 작업했다면 어떨까. 연인원 3만6000여명이 동원된 것을 감안한다면 전체 작업일수는 약 121일 정도(3만6285÷300)가 된다.
물론 이 계산은 어디까지나 추산일 뿐이다. 이렇게 많은 양의 돌과 흙으로 쌓았으니 어떻게 되었을까. 도굴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파기만 하면 흙과 돌이 무너져내리는데 어떻게 도굴할 수 있단 말인가.
■유력후보는 마립간 6명
그렇다면 이런 어마어마한 고분 안에 묻힌 주인공들은 누구인가.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 마립간 시대의 산물로 알려져 있다.
마립간은 내물(356~402)·실성(402~417)·눌지(417~458)·자비(458~479)·소지(479~500)·지증(500~514) 등 6명을 가리킨다. 지증왕 연간(503)에 중국식 칭호인 왕(王)으로 바뀌었으니 마립간 시대는 356~503년 사이를 의미한다.
그러니 황남대총 남북분(98호분)과 봉황대(125호분), 130호분 같은 초대형 고분의 주인공은 그 6명 중 세 분일 가능성이 짙다. 봉황대와 130호분은 미발굴 고분이라 주인공을 더욱 가늠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정식 발굴이 끝난 고분에서는 뭔가 주인공의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우선 금관 및 금동관과 출토 도기 등을 토대로 돌무지덧널무덤의 연대를 추정한다면 ‘4세기말~6세기초’로 특정할 수 있다. 더 좁혀보자면 황남대총 남분(5세기 2/4분기)-황남대총 북분(5세기 3/4분기)-금관총·서봉총(5세기 4/4분기)-천마총·금령총(6세기 1/4분기) 등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금동관 남성의 정체
우선 1973~75년 사이 정식 발굴된 황남대총 남북분의 주인공은 누굴까.
발굴결과 금관이 출토된 북분에는 여성의 지표유물인 가락바퀴(방추차·실을 뽑는 도구)와 굵은 고리가 달린 귀고리 및 장식 드리개가 확인됐다. 은제 허리띠 꾸미개에서는 ‘부인대(夫人帶)’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황남대총 북분의 주인공은 ‘금관 쓴 여성’일 가능성이 짙어졌다.
남분에서는 금관 대신 금동관이 나왔다. 목관 안에서 출토된 인골의 아래턱뼈를 분석해보니 ‘60대 전후의 남성’으로 추정됐다. 남분의 주인공을 두고는 ‘눌지왕(417~458)설이 유력했다가 최근에는 ‘내물왕(356~402)’설이 새롭게 등장했다.
만약 부부가 묻혔다면 남북분의 주인공은 ‘눌지왕(남분)-아로부인(북분)’이나 ‘내물왕(남분)-보반부인(북분)’일 가능성이 있다. 다만 왕이 분명한 남분의 주인공이 왜 금동관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남분의 ‘금동관 남성’은 북분의 ‘금관 여성’에 비해 위계가 낮은 임금(혹은 왕족)이었단 말인가. 남성 임금보다 신분이 높은 여성이라면 대체 누구였을까. 좀체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이사지왕의 누구?
1921년 발굴된 금관총(지름 45m)의 주인공은 알 수 있을까. 금관과 함께 고리자루큰칼 등이 확인되었으니 ‘주인공=남성 왕’으로 추정됐다. 2013년 7월 주인공의 허리에 차고 있는 고리자루큰칼을 보존처리 하다가 ‘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는 명문을 확인했다.
이 명문을 보고 ‘소지왕’(재위 479~500)을 떠올리는 연구자(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있었다. ‘이사지왕’의 이(尒)’자는 ‘그(其)’, 혹은 ‘이(此)’의 사전적 의미일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사지왕’은 ‘그 분이나 혹은 ’이 분’인 ‘사지왕’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지왕’은 ‘소지왕’과 동일인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역사기록이나, 그 어떤 금석문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이사지왕이 마립간이 아닌 왕족일 가능성도 있다. 신라에서는 ‘갈문왕’이나 ‘차칠왕등(此七王等)’처럼 왕이 아닌 왕족에게도 왕의 칭호를 붙였기 때문이다.
■서둘러 끼워넣은 5살 왕자?
3년 뒤(1924년) 발굴된 금령총(지름 28.2~29.8m)의 주인공은 누굴까.
이 고분에서도 금관을 비롯, 귀고리·허리띠·목걸이·팔찌 등 순금제 장신구가 보였다.
말탄 인물상(기마인물형 도기)(국보)도 2점 나왔다. 또 금관총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금방울(금령)이 출토됐다. 그래서 이 고분을 ‘금령총’이라 했다. 주인공의 머리쪽에는 ‘가는고리 귀고리’가, 허리춤에는 ‘장식 둥근고리 큰칼’이 보였다. 남성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금관·금허리띠 등 모든 유물의 사이즈가 작았다. ‘머리(금관의 장식 끝부분)-허리-발(발찌 추정 구슬)’을 잇는 장신구의 간격은 90㎝를 넘지 않았다. 주인공의 키가 90㎝ 안팎이었다는 의미다.
연구자들은 그동안 축적된 인골(혹은 미라)의 발굴 결과 금령총 주인공의 나이는 5~6세 정도로 추정했다. 또 이 금령총에는 순장자가 보이지 않았다. 신라에서 순장이 국법으로 금지된 것은 502년(지증왕3)이었다. 따라서 금령총 주인공은 6세기초 재위한 지증왕(500~514)과 관련된 어린 왕자나 왕족일 가능성이 있다.
최근 흥미로운 발굴성과가 나왔다. 금령총은 가장 큰 단독고분인 봉황대와 붙어있다.
그런데 그 금령총이 봉황대와, 금령총보다 앞선 시기에 조성된 두 고분(127-1, 127-2호) 사이에 끼워 넣은 흔적이 새롭게 확인된 것이다. 왜 5살 어린 왕자의 무덤을 봉황대와 다른 고분들 끼워넣었을까. 마립간(왕)의 무덤이 분명한 봉황대 주인과 금령총의 요절한 어린 왕자, 그리고 127-1호와 127-2호의 주인공은 어떤 관계였을까. 새로운 수수께끼가 생겼다.
■스웨덴 황태자와 조우한 신라 여성
1926년 발굴된 서봉총은 누구의 무덤인가. 당시 발굴자인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막 금관이 노출되고 있을 무렵 잔머리를 굴렸다. 마침 일본을 방문 중이었던 구스타프 스웨덴 황태자(재위 1950~1973))에게 금관 수습의 대미를 장식하도록 밥상을 차려준 것이다.
고고학자 출신으로 그리스와 로마의 발굴현장을 누볐던 황태자는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10월10일 10시 경주 현장에 도착한 구스타프 황태자는 “경이롭다!”를 연발하며 흙속에서 살짝 노출된 금관과 금제 허리띠를 손수 발굴했다. 그런데 서봉총 고분에서는 금관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연수원년(延壽元年)’, ‘태왕(太王)’, ‘신묘(辛卯)’ 등의 글자가 새겨진 명문 은제그릇이 출토됐다.
고구려 장수왕(412~491)의 연호가 ‘연수’라는 것, 또한 고구려왕을 지칭한 ‘태왕’ 명문이 나온 것, 또한 신묘년이라는 간지…. 종합하면 은합의 제작연대는 연수원년이자 신묘년인 451년(신라 눌지왕 35)일 수밖에 없다.
또 서봉총에서는 굵은고리 귀고리와 허리띠 장식, 그리고 의류와 같은 섬유제품이 다수 출토됐다. 때문에 서봉총의 주인공은 5세기말이나 6세기초에 살았던 여성일 것이라고 짐작된다. 금관이 나왔으므로 아무래도 왕의 부인일 가능성이 높다.
■‘천마도’ 말다래 탄 신라 왕은?
1973년 발굴 당시 숱한 화제를 뿌린 천마총은 어떤가. 일제가 1915년 일련번호(1~155호)를 붙일 때 동→서로 차례를 정했다.
따라서 가장 서쪽에 있던 천마총은 맨 마지막 번호인 155호를 받았다. 천마총, 즉 155호분 조사는 황남대총(98호분) 발굴의 전초전으로 진행됐다.
당시 정부는 경주개발계획에 따라 황남대총 발굴 후 복원 공개를 계획했다. 그러나 당시 고고학계는 규모가 어마어마한 황남대총 발굴에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다.
따라서 일단 황남대총 인근에 있는 중형급 고분(지름 47m·155호분)을 발굴해본 후 그 축적된 경험을 토대로 황남대총 발굴에 돌입하자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런데 막상 발굴이 시작되자 어마어마한 유물이 출토됐다. 7월25일부터 무덤 주인공이 착용한 금관과 금허리띠와 금귀고리, 금팔찌, 금반지 등 무려 1만1526점의 유물이 쏟아져나왔다.
특히 이 고분에서는 천마가 그려진 말 다래가 6장(3마리분)이나 확인됐다. 그래서 155호분은 천마총이 되었다. 유물의 양상으로 볼 때 천마총의 주인공은 6세기 초 재위한 지증왕(500~514)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광개토대왕 유품을 가져온 신라왕자?
이밖에 ‘광개토대왕’ 명문 청동그릇이 출토된 호우총(140호분)은 어떨까. 유력한 주인공 후보로 내물왕(356~402)의 아들이자 눌지왕(417~458)의 동생인 복호(생몰년 미상)가 꼽힌다.
<삼국사기>는 “412년(실성왕11)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갔던 복호가 418년(눌지왕2) 나마(17관등 중 11등) 박제상(363~419)과 함께 귀국했다”(<삼국사기>)고 했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 명문이 찍힌 청동용기를 가져온 인물도, 이 무덤(호우총)의 주인공도 복호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맹점이 있다. 호우총의 연대가 출토 유물로 미뤄볼 때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 명문이 찍힌 청동용기의 제작시기(415년)와는 100년 정도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복호설’을 따른다면 어떨까. 조상인 복호의 유품을 가보로 간직하고 있던 직계 자손 무덤일 수도 있다. 이처럼 1921년 이후 100여년간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에 조성된 수수께끼 같은 고분(돌무지덧널무덤)을 조사해왔다.
그러나 백제 무령왕릉처럼 무덤 주인공을 알리는 명문이 나오지 않는 이상 주인공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모두 소설의 영역이다.
어쩌면 파면 팔수록 알 수 없는 수수께끼만 하나 둘 씩 던져주기에 더욱 매력적인 주제가 아닐까.(이 기사를 위해 심현철 국립경주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과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심현철, ‘적석목곽묘의 분형과 봉분설계원리’, <한국고고학보> 109집, 2018
심현철, ‘신라 적석목곽묘 연구’, 부산대 박사학위 논문, 2020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경주 쪽샘 44호 적석목곽묘’(기자간담회 자료집), 2020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황남대총 남(북)분 발굴조사의 기록>, 2021·2024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황남대총 남분 발굴조사보고서>(본문 및 도판·사진), 1993·94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황남대총 북분 발굴조사보고서>, 1985
국립중앙박물관, <황금의 나라,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용산 개관 5주년 기념특별전 도록),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