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특화카드로 시작된 은행권의 외환 서비스 경쟁이 환전을 넘어 예금·투자·송금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다. 최근 미국 기준금리 인하로 환율 변동성이 커지면서, 여행 이후에도 외화를 보유하고 활용하려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현재 해외여행 결제 위주로 지원하는 ‘무료 환전’ 서비스가 앞으로는 해외주식 투자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새 먹거리와 충성 고객 확보를 위한 은행권의 외환 서비스 경쟁은 앞으로도 격화될 전망이다.
“환율도 내렸는데 달러나 사볼까?”
30일 금융권에 따르면 ‘환테크족(환율+재테크족)’을 유치하기 위한 은행들의 외화예금 이벤트가 최근 잇따르고 있다.
신한은행은 이달 말까지 신한SOL뱅크에서 미국 달러로 외화정기예금에 가입하는 고객에게 우대금리 0.15%포인트와 90%의 환율우대 혜택을 제공하는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KB국민은행 역시 이달 말까지 ‘바로보는 외화통장’으로 엔화 입출금 시 조건없이 90%의 환율 우대를 제공한다. 광주은행은 11월8일까지 미국 달러와 일본 엔화로 ‘환테크서비스&외화예금’에 신규 가입하는 선착순 100명에게 2달러를 주는 이벤트를 진행한다.
최근 들어 외화예금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이야기다. 미국 기준금리 인하와 함께 환율 변동성이 커지자, 외화 환전을 통해 차익을 실현하려는 수요도 커진 것이다. 지난달 27일 원·달러 환율의 주간 거래 종가는 달러당 1318.6원으로 6개월 만에 최저치를 찍었고, 엔화는 ‘슈퍼엔저’와 작별한 이후 강세를 이어가고 있다.
실제 국내 거주자 외화예금 잔액은 원·달러 환율 하락과 함께 증가 추세를 이어가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8월 거주자 외화예금 잔액은 1004억1000만달러로 7월 말보다 59억7000만달러 늘면서 석 달 연속 증가했다. 전체 외화예금 중 85%는 기업이, 15%는 개인이 보유하는데 개인예금의 경우 지난 5월부터 넉 달 연속 증가세다. 다만 엔화예금은 2개월째 감소했는데, 엔화 강세로 환차익을 실현한 ‘엔테크족’이 그만큼 많았던 것으로 풀이된다.
유행 따라 만든 여행카드, 환테크가 되다
최근 금융 소비자들 사이에서 외환 거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데에는 환율 변동성 외에 다른 요인도 있다. ‘무료 환전’을 내세우며 격화된 해외여행 특화카드 경쟁이 여행 이후에도 외화를 보유하고 활용하려는 수요를 낳고 있는 것이다.
직장인 김모씨는 지난 4월 일본 여행을 앞두고 급하게 무료 환전 여행카드를 만들었다가 뜻밖의 환차익을 봤다. 그는 “숙소 결제 취소로 남은 20만엔을 트래블카드에 연동된 외화예금 계좌에 뒀었는데, 최근 엔화 환율이 많이 올라 10만원 정도 차익을 보고 환전했다”면서 “이후 달러예금를 활용한 환테크에 흥미가 생겨 은행별로 상품을 비교해보고 있다”고 말했다.
싸고 간편한 환전에 대한 경험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애플리케이션으로 외화예금·선불금을 충전해, 해외에서 체크카드 등으로 결제하는 ‘외화 환전 서비스’의 일평균 이용대금은 지난해 상반기 74억원, 하반기 150억원에서 올해 상반기 197억원으로 증가했다.
환전 서비스의 흥행이 최근 은행권 외화예금·선불충전금의 증가에도 일부 영향을 줬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이전까지 외화예금은 주로 수출입 기업들이 보유했는데, 최근 토스뱅크·신한은행 등 외화계좌에 연결하는 방식의 여행카드가 인기를 끌면서 외화예금에 대한 소비자 접근성이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환전 수수료가 없는 외화예금이나 선불금은 이자가 거의 붙지 않기 때문에 예치 규모가 늘면 은행의 외화 조달 비용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면서 “(은행 입장에서) 무료 환전이 꼭 손해보는 장사는 아닌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은행이 최근 낸 보고서 역시 “금리가 0%에 가까운 요구불예금 비중이 전체 외화예금의 3분의 2 가량을 차지한다”며 “달러화 금리가 높을수록 은행이 외화를 차입하는 것과 비교해 조달금리를 평균 0.1%포인트에서 4.1%포인트까지 낮게할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무료 환전, ‘여행 이후’에도 계속될 순 없을까?
그렇다면 여행 외의 영역까지 무료 환전 서비스를 확장할 순 없는 걸까. 일단 인터넷은행들이 먼저 무료 외환 서비스의 범위를 넓히고 나섰다. 지난 1월 금융권 최초로 무료 환전 외화통장을 출시했던 토스뱅크는 지난 7월 외화통장 가입자 간 수수료 없는 외화 송금 기능을 선보였다. 지난 5월 카카오뱅크는 달러 무료 환전과 간편 예치·송금을 지원하는 외환서비스 ‘달러박스’를 출시하며, 달러도 원화처럼 출금·쇼핑·해외 주식 등에 친숙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서비스 외연을 넓히겠다고 밝혔다.
여행 외의 일상에서 가장 주목받는 외화의 쓸모는 해외주식 투자다. 이에 인터넷은행들은 해외주식 투자에도 무료 환전 통장이나 지갑이 활용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 중이다. 외화통장과 주식계좌 연동을 위한 증권사와의 제휴가 추진되고 있다. 제휴가 성사된다면 앞으로 환전 수수료 없이 미국 등 해외주식에 투자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셈이다.
현재도 시중은행의 외화예금 중 증권사 제휴를 통해 해외투자에 활용할 수 있는 상품이 있지만, 환전 수수료가 무료인 곳은 없다. 가령 신한은행의 경우 해외여행 특화상품인 신한SOL트래블의 환전 우대율은 100%이지만, 신한투자증권 등에서 해외주식 투자가 가능한 외화예금 상품인 신한 체인지업의 경우 환전 우대율(비대면)이 50%에 그친다. 이같은 상황에서 인터넷은행이 먼저 환전 수수료 없는 주식투자 계좌를 내놓는다면 시중은행들도 따라갈 가능성이 높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증권사 입장에서도 무료 환전 제휴를 통해 은행이 확보한 대규모 고객을 유치할 수 있는 데다 해외투자 수요 증가로 수수료 수익 증대도 기대할 수 있다”며 “더 싸고 간편한 외환 서비스 경쟁은 투자·송금 등 다양한 영역에서 격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