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부터 퇴직연금 가입자가 기존 운용 상품을 해지하지 않고 금융회사를 옮길 수 있게 됨에 따라 금융시장이 들썩이고 있다. 400조원에 달하는 퇴직연금 시장에서 은행들은 ‘안전 지향성향’을 고려해 자신감을 내보이고 있고, 증권사들은 대규모 자금 이동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원리금 보장형에 투자 대부분이 집중돼 있는 현재 시장에선 단기간에 유의미한 변화를 기대하긴 어렵다는 관측이 나온다.
‘퇴직연금 현물이전’ 제도는 기존에 가입한 상품을 팔거나 중도해지할 필요 없이 다른 금융회사(은행·증권·보험 등 금융회사)로 퇴직연금을 옮길 수 있도록 한 서비스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는 A은행에서 퇴직연금을 가입했다가 B증권사로 옮기려면 지금까지 투자한 상품을 해지해야 옮길 수 있었다. 이때문에 금융회사를 바꾸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 나오자 정부가 기존 운용 상품을 해지하지 않고 그대로 갈아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문제는 ‘갈아탈 고객’이 얼마나 되는지다. 30일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을 보면 올해 3분기 말 기준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 중 83.2%(332조8076억원)가 예금 등 원리금 보장형 상품으로 운용되고 있다. 적립금의 16.8%(67조2656억원)만 원리금 손실 위험이 있는 실적 배당형 상품으로 운용됐다. 통상 실적 배당형의 수익률이 원금 보장형의 2~3배라는 점을 고려할 때, 자금 대부분이 수익보단 안전을 좇아 투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퇴직연금 시장에서 ‘강자’인 은행권에서는 ‘쿠폰 이벤트’ 등을 내세우면서도 자신감을 내보이고 있다. 원금 보장형을 지향하는 경향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 중 52.6%는 은행이 운용하고, 은행의 원금 보장형 상품 비중은 87.7%에 달한다.
회사가 관리하는 확정급여형(DB) 퇴직연금으로 한정하면, 원금 보장형 운용 비중은 훌쩍 높아진다. 은행에서는 전체 DB형의 97.2%, 보험에서 91.4%, 증권에서 90.5%가 원금 보장형으로 운영되는데, 이 경우 근로자인 개인의 선택에 따른 자유로운 ‘갈아타기’ 자체가 어렵다. DB형, 확정기여형(DC), 개인형 퇴직연금(IRP) 각 계좌 간 칸막이를 넘어서는 현물이전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적립금 규모가 크고 안전지향적인 4050 이상 세대는 은행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다른 은행 관계자도 “실적 배당형 가입 비중이 그나마 높은 IRP도 대부분 세액 공제 목적이지 투자 목적은 드물다”고 말했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현물이전 대상이 되는 실적 배당형의 비중 자체가 적기 때문에 이를 통해 전체 적립금 규모인 400조원의 ‘머니무브’가 발생한다는 것은 과장된 기대”라고 설명했다.
반면, 증권업계에선 수익률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면서 자금 이동을 기대하고 있다. 상장지수펀드(ETF) 등을 통한 장기 투자가 보편화되면서 연금 운용 패턴도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증권사들은 퇴직연금을 이전할 경우 상품권을 주는 등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퇴직연금에서 ETF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욱 커지면, ETF 직접 매매가 가능한 증권으로 자금이 몰리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다만 장기적으로 퇴직연금 시장의 ‘체질 변화’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남 연구위원은 “은행을 포함한 금융회사들이 다양한 상품 구성 등을 경쟁한다면 향후 수익률 제고 효과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