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연의 메타뷰(VIEW) (13)

최병성 목사 “지구 돌보는 일, 하나님이 주신 소명”

2022.06.05 10:12 입력 박주연 기자

‘꼬마다윗’ 환경운동가 최병성 목사

최병성 목사가 지난 5월 31일 경향신문 스튜디오에서 경북 울진 산불현장에서 주워온 숯덩이가 된 소나무 밑동을 들고 있다. 그는 “잇따르는 우리나라 대형 산불 발생의 원인은 기후위기 때문이 아니”라며 “불에 잘 안 타는 오래된 활엽수들을 모두 베어내고 화재 시 불폭탄이 되는 소나무만 지난 20여년간 조림해온 산림청의 잘못된 정책 탓”이라고 말했다. 우철훈 선임기자

그에게는 ‘불독’, ‘1인 군대’, ‘꼬마다윗’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한번 물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절대 놓지 않는다고 해서 ‘불독’이고, 혼자 싸우지만 군대보다 화력이 더 세다고 해서 ‘1인 군대’다. ‘꼬마다윗’은 정부나 기업, 대형 로펌을 상대로 싸우는 그가 거인 골리앗을 이기는 소년 다윗과 같다 해서 붙여졌다. 성직자이지만 환경운동가로 더 잘 알려진 최병성 목사(59) 이야기다.

그는 지난 23년간 사비를 털어 우리 산과 바다, 강의 푸르름을 지키기 위해 힘써 왔다. 환경부가 보호 습지로 지정한 데 이어 세계 람사르 습지에 등록된 강원도 영월 서강 인근에 쓰레기매립장이 건설되는 것을 막아냈고, 쓰레기시멘트의 문제점을 고발했다. 4대강 사업에 대한 지속적 문제 제기와 함께 새만금 녹조 실태를 공개했으며 일본산 쓰레기와 산림청의 벌목 문제점을 집중 고발함으로써 제도 개선을 이끌어냈다.

그는 분신처럼 드론 2개와 15-600㎜ 망원렌즈 카메라, 24-600㎜ 하이엔드 카메라, 24-120㎜ 표준렌즈 카메라를 낡은 흰색 아반떼 자동차에 넣고 다닌다. 환경 훼손 증거를 기동성 있게 포착할 중요한 장비다. 발로 뛴 환경 관련 탐사보도물을 그는 십수년간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 제공해왔다(현재는 [최병성 리포트]).

목사는 어쩌다 환경운동가가 됐을까. 지난 5월 31일 최병성 목사를 만났다. 그는 “허구한 날 고발당하는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20년 넘도록 포기 없이 환경지킴이를 자처하는 이유는 아파하는 지구를 돌보는 일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동해 쌍용 양회(현 쌍용C&E) 공장 안에 가득 쌓여 있는 폐타이어. 최병성 제공

-1986년 장로회신학대학교에 입학하고 대학원 과정까지 마쳤지요. 목사 안수도 받았고요. 성직자의 길을 선택한 배경은 뭔가요.

“원래 한의사가 되려고 했어요. 경희대 한의학과에 지원했다가 낙방하고 후기 대학에 합격했지만 등록을 안 한 채 입대했어요. 그런데 어릴 적 성당에서 만나 몹시 가깝게 지냈던 친구가 신장병으로 갑자기 사망했어요. 친구는 서울대 법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만큼 수재였어요.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인생은 한치 앞을 모르고,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신학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원래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습니까.

“저는 가톨릭 모태신앙으로, 온 식구가 성당에 다녔어요. 제가 초등학생일 때 복사(服事)도 했고요.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신부님 문제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개신교로 옮겼어요. 제 인생에서 굉장히 큰 변화였죠. 만약 계속 성당에 다녔다면 저는 지금 신부가 돼 있을 거예요. 활동에도 제약이 따랐겠죠. 그런데 성당에 다녔던 기억이 제 삶을 움직여요. 세상과 떨어져 산속에서 조용히 묵상하며 살아가는 수도자의 삶을 동경하거든요.”

시멘트 공장의 시멘트 분진으로 눈이 온 것처럼 변한 마을 담벼락. 최병성 제공

영월 서강변 쓰레기매립장 막으려
매일 어르신들 만나 설득
사진전까지 열어 언론 보도 이끌어

-그러면 왜 신학대에 가고, 목사 안수를 받았나요.

“애초에 교회 안에 갇힌 목사가 될 생각은 없었어요. 개신교 신학대학과 대학원에 다니면서도 가톨릭 영성책을 보며 혼자 공부했어요. 사람들을 깊이 깨우는, 그래서 삶을 바꾸는 수도원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죠. 개신교 안에도 수도원이 하나 있어요. 경기도 포천의 은성수도원인데 방학 때면 그곳에서 지냈어요. 당시 제가 한 공부가 20년 넘도록 포기하지 않고 환경운동을 하게 하는 힘이에요. 나름 수도자의 길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의미에서요.

“지구가 아프고, 기후위기가 지금 해결해야 할 중요한 화두니까요. 하나님이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주셨다고 생각해요.”

그는 1993년 12월 대학원 마지막 학기말 시험이 끝나는 날에도 짐을 싸서 은성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온돌도 안 깔린 차가운 1평짜리 꼭대기방에서 생식을 하며 7개월간 지냈다. 1994년 6월 더 조용한 곳을 찾아 강원도 영월로 들어갔다. 아름다운 서강변에 움막집을 짓고 공부하고 텃밭을 가꾸며 살았다. 주말에는 선배가 운영하는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했다. 친구의 죽음 이후 그의 삶을 또 한 번 바꿔놓은 사건은 5년 후 발생했다. 1999년 8월 영월군수가 서강변에 생활폐기물매립장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영월군은 왜 그곳에 생활폐기물매립장을 건설하려고 했을까요.

“원래는 다른 곳에 지으려다 의회와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됐고, 이후 다른 곳에 지으려다 또 실패했어요. 그러자 공무원들이 환경영향평가를 자의적으로 만들어 서강변을 낙점한 거죠. 수치가 엉터리였어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제가 강을 누렸잖아요. 강의 아름다움을 알게 됐고, 물고기들의 이름과 그들이 어디에 알을 낳는지도 알게 됐어요. 대한민국 최고의 강이라고 생각했죠. 그런 곳에 쓰레기매립장이 들어서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어요.”


상공에서 본 새만금 방조제 안과 밖. 군산과 부안을 가로막은 방조제로 인해 새만금호에 녹조현상이 뚜렸하다. 최병성 제공

-어떻게 했습니까.

“저는 외지인이라는 한계가 있어 우선 주민들 설득에 나섰어요. 영월군 서면(현 한반도면) 옹정리, 광전리의 40가구 어르신들과 매일 만나 회의했어요. 다들 처음에는 관과 싸워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체념하는 분위기였지만, 점차 달라졌어요. 한편으로 저는 아름다운 서강과 서강의 꽃, 물고기, 철새들을 사진 찍어 서강이 왜 지켜져야 하는지 알리려 노력했어요. 영월군 환경영향평가서의 문제들도 정리해 보도자료를 만들어 서울의 주요 언론사 사회부에 보냈어요.”

-언론사들이 반응을 보였나요.

“아뇨. 그래서 ‘서강 사진전’을 영월문화예술회관에서 열었어요. 쓰레기매립장 이야기는 쏙 빼고 전시회 신청을 했어요(웃음). 진실을 알고는 영월군청이 발칵 뒤집혔죠. 지역 방송에서 보도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사진전 폐막 이틀 전쯤 한겨레신문 정상영 기자가 전화를 해왔어요. 보통은 한두 번 보내다 마는데 제가 계속 자료를 보내니까, 이 사람은 포기하지 않겠구나 싶어 전화를 했다고 해요. 다음날 직접 내려왔어요.”

-전국단위 주요 일간지에 첫 보도가 나왔군요.

“한겨레신문 컬러면에 광고도 없이 1개면을 털어 ‘영월 동강댐 막았더니 이번엔 서강에 쓰레기장’이라는 제목의 서강 특집이 세 꼭지로 실렸어요. 이후 다른 언론사들의 보도가 잇따랐어요. 저는 그것을 컬러로 인쇄해 영월군에 뿌려지는 경향, 조선 등 모든 일간지에 삽지로 넣었어요. 서울에서 10만인 서명운동도 벌였고요. 주민들은 매립지 예정지에 컨테이너박스를 놓고 조를 짜서 지키는 한편, 영월군청에 항의하러 가는 버스를 막아서는 경찰에 맞서 그 추운 겨울에 도로에 주저앉아 농성했어요.”


1999년 12월 19일 처음 발견 이후 국가 명승 제75호로 지정된 강원도 영월 서강의 한반도지형. 주위 습지는 2012년 1월 환경부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한 데 이어 2015년 5월 세계 람사르 습지로 등록됐다. 최병성 제공


큰형이 사다 준 소련제 필름카메라로
꽃과 곤충 찍으며 사진 실력 키워

-결국 군수가 백기 항복했습니까.

“2001년 1월 군수가 주민들 앞에서 포기각서를 썼어요. 1년 넘게 싸워 이긴 거예요.”

그 과정에서 그는 삼면이 바다이고 동고서저, 서해·남해가 갯벌인 점까지 한반도를 꼭 빼닮은 지형을 발견해 직접 ‘한반도 지형’이라 명명했다. 서강을 다양한 각도에서 카메라에 담기 위해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주민 이종만씨와 함께 이 숲, 저 숲을 헤치며 다니다 우연히 발견했다. 이후 영월군 서면은 영월군 한반도면으로 개명됐고, 서강 한반도지형은 2011년 6월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75호로 지정됐다. 또 여러 천연기념물과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이 서식하는 한반도 지형을 둘러싼 주위 습지는 2012년 1월 환경부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했다. 2015년 5월에는 세계 람사르 습지로도 등록됐다. 그러나 서강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2020년 쌍용양회(현 쌍용C&E)가 서강변에 축구 경기장 25개 면적의 산업폐기물매립장을 추진했다.

-서강을 지켜낸 지 꼭 20년 만의 일인데 어떻게 대처했나요.

“2020년 54일간의 장마로 매립장 예정지에 고여 있던 빗물이 단 며칠 만에 모두 빠져나간 전후를 드론 사진으로 촬영해 보도함으로써 매립장 적지가 아님을 밝혔어요. 빗물이 순식간에 빠져나간 이유는 이 일대가 석회암 지대여서 절리(틈)와 싱크홀(지반 침하)이 발달했기 때문이거든요. 또 다수의 동굴 존재 가능성도 커 무너져 내릴 수 있어요. 이런 곳에 산업폐기물을 매립하면 그 유독물질은 서강과 한강을 오염시켜 수도권 시민들의 생명을 위협해요. 지난해 환경부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들이 질의했고, 결국 쌍용C&E는 환경영향평가서 본안 제출을 무기한 연기했어요.”


전남 무안의 간척지 17만평을 뒤덮은 태양광. 최병성 제공

-사진이 전문가 수준이더군요. 언제 배운 겁니까.

“제가 4남2녀 중 막내인데, 큰형님이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시면서 소련제 50㎜ 제니트 필름카메라를 고등학생인 제게 사다주셨어요. 그걸로 좋아하는 꽃과 곤충을 찍었죠. 제 가족이 살던 곳이 인천 부평의 산자락 밑이었거든요. 아카시아가 가득 찬 곳을 아버지가 개간해 무허가 집을 지으셨어요. 아버지 명의의 땅은 한뼘도 없었지만, 돌이켜 보면 저는 부자였어요. 넓디넓은 산이 놀이터였으니까요. 개나리, 진달래, 목련과 밤나무, 배나무 등이 지천으로 깔렸어요.”

유년기부터 스무 살이 될 때까지 흙과 꽃, 나무, 새, 곤충과 함께한 산자락 밑에서의 삶은 그를 자연에 눈뜨게 했다. 죽음에 대해서도 성찰할 기회를 줬다. 그는 집에서 기르던 셰퍼드를 데리고 종종 능선을 타고 산 정상에 올랐다가 반대편으로 내려섰는데, 그곳은 거대한 공동묘지였다. 한 작은 무덤의 비석에는 ‘못다 핀 꽃 보연의 묘’라고 쓰여 있었다. 죽음은 나이와 빈부, 배움의 정도와 상관없는 일임을 깨달았다. 그는 멀찍이 앉아 공동묘지에 새로 들어서는 상여와 상주들, 곡소리를 듣곤 했다.

-증거물 포착을 위해 잠입취재를 하거나 인근 고층건물의 옥상에 올라가 망원렌즈 카메라로 촬영하는 일도 많다고 들었어요. 2006년에는 집을 짓는 시멘트가 폐타이어, 폐고무, 슬러지 등의 온갖 산업쓰레기로 만들어진다는 사실과 그로 인한 문제점 등을 잠입취재를 통해 지속적으로 보도했고요.

“영월에만 한일현대시멘트, 쌍용C&E, 아세아시멘트가 있어요. 거기서 자동차로 1시간쯤 떨어진 충북 단양에는 성신양회, 한일시멘트, 한일현대시멘트 공장이 있고요. 삼척에는 동양시멘트(현 삼표시멘트), 강릉에는 한라시멘트 공장이 있어요. 일일이 다 잠입해 쓰레기폐기물 현장 사진을 찍는 한편 시멘트 성분을 분석해 발암물질이 가득함을 밝혀냈어요.”


환동운동가 최병성 목사. 우철훈 선임기자


증거 포착 위해 시멘트공장 뒷산 잠입
사진 찍고 나오다 경비원에게 딱 걸려
공장 직원 수십명이 막아 사진 지운 적도

-잠입 취재하다 적발된 위기 상황은 없었습니까.

“당연히 있었죠(웃음). 동양시멘트는 제보를 받았어요. 시멘트에 국산 산업쓰레기뿐 아니라 일본산 산업쓰레기와 일본산 석탄재도 들어가는데, 공장 뒷산을 넘어 들어가면 일본에서 들여온 석탄재가 야적돼 있다는 거예요. 촬영해 공개했어요. 2007년 문화일보 기자가 현장을 직접 보고 싶다며 찾아왔길래 같이 갔어요. 사진 찍고 나오다 경비원에게 딱 걸렸죠. 공장장을 비롯해 수십명의 공장 직원이 막아서고 경찰차 3대가 출동했어요. 그날 찍은 사진은 다 삭제해야 했어요.”

-수난은 겪었지만 당시 문화일보에 ‘아파트용 쓰레기 시멘트 수은 등 중금속 7종 검출’ 보도가 나오면서 사회적으로 공분이 일었지요.

“그랬어요. 저는 환경부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쓰레기시멘트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국회는 환경부의 쓰레기시멘트에 대한 감사원 감사 결의를 했어요. 이후 시멘트 제품의 발암물질 6가크룸 기준이 마련됐죠. 시멘트 제조 시 사용하는 쓰레기 기준 및 시멘트공장 배출가스 기준도 강화됐고요.”

-그 여파로 2008년 일본산 석탄재 수입이 중단된 적이 있는데, 곧 재개됐어요.

“철슬래그는 수입 중단시켰지만 석탄재는 수출이 금지되면 화력발전소 가동을 멈춰야 하는 일본과 국내 기업의 요구로 재개된 거예요. 쓰레기 수출입 신고제라는 제도 개선만 한 채로요. 폐타이어는 지금도 전 세계에서 수입해 사용하고 있고요. 하지만 저는 포기할 수 없었어요. 일본 정부의 반도체 부품 수출 규제로 한일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2019년, 저는 전국의 화력발전소들을 돌아다니며 발전소마다 야적장에 가득한 석탄재를 촬영했어요. 다시 일본 석탄재 수입문제를 제기했죠. 결국 환경부는 2023년부터 일본 석탄재 수입을 금지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러나 한편으로 최 목사는 정부와 기업이 제기한 수많은 형사·민사소송에 직면해야 했다. 일부는 변호인 없이 나 홀로 싸웠다. 태평양, 김앤장 등 국내 대형 로펌이 출동한 소송도 적잖았다. 최 목사 개인을 상대로 한 소송은 모두 그가 이겼다. 경찰·검찰 조사를 받고 재판을 시작해 대법원까지 모두 무죄를 받기까지 5년이 걸린 소송도 있었다.

한동안 도시 난개발 문제에 천착한 그는 진영을 가리지 않고 비판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을 오랫동안 저격해온 한편 문재인 정부의 환경정책도 호되게 비판해 왔다. 가령 ‘2050 탄소중립 산림 부문 추진 전략’으로 멀쩡한 숲을 대거 벌목한 후 어린나무 30억그루를 새로 심겠다고 추진한 데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아울러 우리나라 산불 발생 원인이 활엽수를 모두 베어내고 불에 잘 타는 소나무를 조림해온 산림청의 잘못된 정책 때문임도 밝혀냈다.

2021년 5월 강원도 홍천의 싹쓸이 벌목으로 산림이 황폐화된 모습. 최병성 제공

태양광·풍력발전기 설치한다며
농어촌 환경과 마을 문화에 피해 줘
“신재생에너지 정책, 방법이 틀렸다”

-오랫동안 ‘4대강 저격수’로 불렸는데, 윤석열 정부가 문 정부가 추진했던 4대강 재자연화 정책에 선을 긋는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대통령 임기가 5년인 만큼 윤석열 정부가 안 하더라도 다음 정부에서 4대강 보를 열면 강 생태계는 빠르게 회복해요. 이명박 전 대통령의 4대강 사업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추진한 간척지와 농지, 산 정상에 태양광과 풍력발전기를 세우는 일이 더 심각한 환경 파괴예요. 그래서 윤 정부에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어떤 건가요.

“문재인 정부에서 잘못한 환경 정책들을 바꿔주길 바라요. 태양광과 풍력발전기를 설치한다며 울창하던 산을 심하게 훼손했고, 농지를 잠식하는 태양광으로 인해 오랜 세월 이어져온 농촌 마을의 문화와 공동체가 파괴되고 있어요. 또 인천 앞바다부터 신안과 여수를 돌아 부산 앞바다까지 해상풍력발전을 짓겠다며 어민들의 생존도 위협하고 있고요. 태양빛과 바람을 이용한 신재생에너지가 지구를 살리는 미래 대안임은 분명해요. 하지만 방법이 틀렸어요. 태양광의 경우 도심의 산업단지 공장 및 대형 물류창고 지붕, 방음벽이 설치된 고속도로변을 이용하면 충분하거든요.”

최 목사는 단체에 소속돼 있지 않아 활동비를 주는 곳이 없다. 전업 목사가 아니니 사례비도 없다. 어떻게 생계를 유지해왔냐는 질문에 최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대학 시절부터 사진으로 용돈을 벌어 썼어요. 제가 촬영한 꽃, 곤충, 풍경 사진이 잡지에 연재됐고, 달력에도 실렸어요. 웨딩사진 아르바이트도 했고요. 결혼 후 한동안은 아내 도움도 받았어요. 1996년에 결혼했는데 당시 저는 영월에 있었지만 아내는 서울에서 피아노학원을 운영했거든요. 지금은 제가 간간이 강연하고 글 쓰면서 받는 돈으로 생활비를 감당하며 환경운동을 하고 있어요. 베스트셀러는 없지만 책도 계속 펴내고 있고요. 무엇보다 부부가 적게 먹고 적게 쓰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하하하….”

그는 <강은 살아있다>, <대한민국 쓰레기시멘트의 비밀>, <일급 경고>, <청소년을 위한 숲과 생명 이야기> 등 그동안 20편이 넘는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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