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충성과 반역 그리고 배반, 1970년대의 중정부장들

2013.10.04 19:55 입력 2013.10.04 22:26 수정
황병주 |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김형욱의 배반은 김재규의 반역으로 연결

1979년 10월26일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울린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유신체제는 종말을 맞이하였다. 벌써 34년이나 되었지만 10·26 사건은 여전히 숱한 의혹과 미스터리에 싸여 있다. 이 사건에 비견될 만한 예는 현대사는 물론 한국 역사 5000년을 통틀어도 찾기 힘들다. 단언컨대 10·26은 단군 이래 최대의 미스터리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굳이 세계사로 눈을 돌려 유사한 사건을 꼽자면 브루투스의 시저 암살 정도가 비교될 만하다.

이 사건이 놀라운 것은 최측근의 최고 권력 살해라는 엽기성뿐만이 아니다. 사실 측근에 의해 유명을 달리한 권력자는 한둘이 아니다. 조선왕조의 골육상쟁만 보아도 권력을 둘러싼 암투는 근친 살해도 불사하는 잔인함과 엽기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다른 사건들은 대부분 인과관계가 비교적 분명한 반면 10·26은 통상적인 인과율로 설명되지 않는 측면이 너무 많다.

대부분의 반역이 다양한 층위의 적대를 기본으로 하여 발생하는 데 비해 10·26의 두 주인공인 김재규와 박정희 사이의 적대적 관계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고향 후배이자 육사 동기로 보안사령관,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 등을 역임한 이력에서 드러나듯이 박정희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박정희는 김재규를 고향집 막내둥이처럼 아꼈다고 하고 김재규는 법정 최후진술에서 박정희와는 친형제와 다름없는 사이였다고 진술할 정도였다.

김재규가 10·26 직후 중앙정보부 식당에서 이뤄진 현장검증에서 박정희 시해를 재현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재규가 10·26 직후 중앙정보부 식당에서 이뤄진 현장검증에서 박정희 시해를 재현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두 사람의 관계는 중앙정보부장 임명으로 그 정점을 찍었다. 중앙정보부가 어떤 조직이던가. 1961년 5·16 직후에 쿠데타 핵심 김종필이 제일 먼저 만든 것이 중앙정보부였다. 이후 이 기관이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굳이 부연설명할 필요가 없다.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길목마다 ‘중정’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이 별로 없다. 중정은 각종 공안 사건과 정치공작의 주역만이 아니었다. 대북 타격을 위한 실미도 부대와 ‘양지’ 축구단을 창설해 운영한 것도 중정이었고 서울 철거민들의 집단 이주를 은밀히 지원했는가 하면 대통령의 밤생활까지 책임졌다. 대통령부터 축구선수와 철거민까지 거의 모든 주민들이 중정의 활동 대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정의 이 모든 활동이 권력의 유지 및 재생산과 밀접히 관련되는 것임은 자명했고, 그것은 곧 중정이 대통령의 의지가 직접적으로 관철되는 핵심 중 핵심이었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중정부장이란 대통령의 심복 중 심복이어야 했다. 중정부장은 오직 한 사람, 즉 대통령의 입만을 바라보는 자여야 했다. 아니 입으로 발화되지 않은 의중까지 꿰뚫고 있어야 하는 자리였다. 중정은 모든 반역을 색출해 제거함으로써 대통령에 대한 충성 하나로 유지되어야 하는 조직이었다. 양자는 반역과 충성을 매개로 연결된 하나의 운명 공동체였다.

10·26은 한마디로 이 반역과 충성의 역전이었고 김재규는 충성과 반역의 롤러코스터를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역전이 가능해진 것일까. 김재규는 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것일까.

그것은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바쳤던 충성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사실 김재규는 마지막까지 박정희에 대한 인간적 예우를 지키고자 했다. 법정에서도 깍듯하게 각하라는 호칭을 사용했는가 하면 채홍사 역할을 한 박선호의 여자 문제 관련 진술을 제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최후진술에서 친형제와 다름없는 박정희와의 개인적 정분을 야수와 같은 마음으로 끊었다고 했다.

김재규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혁명을 한 것이다. 그는 “10·26 민주 국민혁명”이란 용어를 사용했는데, 유신체제를 “꽉 짜인 억압과 폭력의 조직”으로 규정짓고 부마항쟁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희생을 줄이기 위해 “자유 민주주의 혁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체제 수호의 첨병이었던 그였기에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쉽지 않지만, 어쨌든 김재규가 자유 민주주의란 대의명분으로 박정희를 살해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요컨대 그는 박정희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유 대한’을 더 사랑했다는 것으로, 충성의 대상이 분열한 셈이었다.

그러면 절대적 충성의 대상이었던 박정희가 어느 날 갑자기 반역의 대상이 된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충성과 반역은 사실상 동전의 양면이다. 극단적으로 대비되지만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처럼 서로 기묘하게 얽혀 있다.

애초 김재규의 충성 대상은 단단하게 결합된 하나의 실체였다. 그에게 박정희와 ‘자유 대한’은 구별될 수 없는 것이었고 ‘각하’가 곧 국가였다. 각하의 안전이 국가의 안전이었고 각하의 의지가 국가와 민족의 의지였다. 이렇게 자신의 충성 대상을 하나의 단일한 실체로 확인할 수 있었던 김재규는 기꺼이 행복하게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했다.

문제는 그 단일한 충성 대상이 분열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분열의 계기는 대략 서너 가지로 추정된다. 가장 흔히 회자되는 것이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갈등설이다. 이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김재규의 극적인 변화를 설명하기에는 무리이다. 그것은 양념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1979년의 심상치 않은 정세 변화이다. 김영삼 의원직 제명, YH 노조 신민당사 농성과 강제진압 그리고 부마항쟁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면서 정국은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갔다. 특히 부마항쟁은 김재규가 시위군중 틈에서 직접 현장을 확인하고 대중의 체제 이반이 심상치 않은 정도임을 체감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더욱이 부마항쟁은 그 대응 방법을 둘러싸고 차지철과 김재규 간의 갈등을 더욱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

세 번째는 미국이었다. 미국을 빼놓고 한국 현대사를 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미국은 현대 한국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김재규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중정부장은 업무상 미 CIA 한국지부장과 밀접하게 관련될 수밖에 없는 자리였고, TV 드라마에도 많이 나왔지만 10·26 직전에도 김재규는 CIA 지부장 로버트 브루스터와 술자리를 같이했다고 한다.

그런데 카터 정권의 인권외교와 주한미군 철수 정책에 대한 박정희 체제의 반발로 코리아 게이트 사건이 불거지는 등 당시 한·미관계는 최악이었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이를 매우 강조하면서 유신체제 지속과 한·미관계 복원은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충성 대상이 분열하면서 김재규는 극단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을 것이다. 권력 유지의 핵심인 대중적 지지, 미국의 지지가 모두 흔들리고 있음을 파악한 마당에 권력 내부의 응집력은 차지철과의 갈등으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각하와 국가의 동일시가 불가능해진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자명할 것이다. 이 무렵 중요한 사건 하나가 터졌다. 김형욱의 실종이었다.

김형욱이 1977년 미 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에서 박정희와 유신을 비판하는 증언을 하고 있다(왼쪽 사진). 1979년 파리에서 김형욱이 행방불명된 소식을 다룬 경향신문 보도(오른쪽). |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형욱이 1977년 미 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에서 박정희와 유신을 비판하는 증언을 하고 있다(왼쪽 사진). 1979년 파리에서 김형욱이 행방불명된 소식을 다룬 경향신문 보도(오른쪽). |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형욱은 김재규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중정부장 중 한 명이다. 1963년 7월부터 1969년 10월까지 만 6년 넘게 중정부장 자리를 지켰던 김형욱은 안기부와 국정원을 합쳐도 최장수 정보기구 수장이었다. ‘멧돼지’ ‘돈까스’로 불리며 남산을 공포의 상징으로 만들어 정권 유지의 1등공신이 된 그였지만 말로는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김형욱 또한 애초에는 김재규처럼 국가와 정권 그리고 박정희를 거의 동일선상에서 파악했다. 게다가 이 동일시는 자신의 운명으로도 연결되는 것이었다. 김형욱도 자신의 행위를 혁명으로 파악했는데, 박정희의 권력이 유지되어야 이른바 혁명과업이 완수될 수 있고 자신의 운명도 여기에 종속된다는 사고였다. 이를 위해 1963년과 1967년의 대통령 선거와 총선거 과정에서는 중정의 힘을 총동원해 개입하는 등 권력 유지의 최일선을 담당했다. 박정희에 대한 그의 충성은 자타가 공인했고, 심지어 권력 내부 인사라 해도 가차없이 제거하는 맹목과 잔인함의 근원이기도 했다.

그가 결정적으로 박정희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게 된 계기는 1969년 중정부장 해임이었다. 3선개헌을 밀어붙여 관철시킨 공으로 유임을 예상했지만 보기좋게 해임된 마당에 유신체제 성립 이후에는 유정회 의원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 중정부장 재임 시 자신의 행적을 잘 아는 그였기에 도처에 적들이 우글거리는 정글 속에 알몸으로 내던져진 꼴이었다.

김재규가 미국을 구원의 천사로 여긴 것처럼 김형욱 또한 미국이 삶의 젖줄이었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중정부장 재임 시 에드워드로 알려진 미국 CIA 지부장과 긴밀히 협력하는 장면이 곳곳에 나오는데, 퇴임 중정부장이 갈 곳도 역시 미국이었다.

결국 김형욱은 미국 망명과 함께 배반의 길로 들어섰다. 김형욱도 김재규처럼 자유 민주주의를 근거로 유신체제를 비판하고 박정희의 치부를 고발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두 중정부장의 충성과 반역 그리고 배반이 자유 민주주의를 중요한 근거로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두 사람의 극단적 행적을 보건대 그들의 이념적, 정치적 진정성이 흔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자유 민주주의는 이념이자 어떤 실체의 상징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들이 그 실체를 미국으로 보았음은 분명해 보이는데 국가적, 개인적 생존의 문제가 그 실체에 달렸다고 본 셈이었다. 박정희를 비롯한 권력 핵심부의 거듭된 설득에도 불구하고 날선 비판과 폭로를 감행하던 김형욱은 1979년 10월1일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되었다. 김형욱의 실종이 차지철의 작품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그가 김재규의 명령으로 권총 살해되었다고 결론지었다.

선배 중정부장이자 자신보다 앞서 박정희 비판에 나선 김형욱을 제거한 김재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자신의 손으로 박정희조차 살해하게 될 것을 예감했을까. 김재규도 김형욱의 행적을 배반으로 보고 제거에 동의한 것으로 보이는데, 박정희에게 바친 마지막 충성이란 설명도 있다. 그렇다면 10·26은 그 마지막 충성에 대한 최후의 배반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김형욱의 배반은 김재규의 반역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충성과 반역이 동전의 양면이라면 반역과 배반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는 것이다. 누군가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했는데, 박정희의 중정부장들 역시 두 번의 충성과 반역 또는 배반을 비극적으로 반복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주민집단을 향해 최고의 충성을 요구하던 유신체제 내부에서 벌어진 충성과 반역의 드라마가 대중의 반역과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10·26이 부마항쟁과 광주항쟁 사이에 나타난 것은 우연만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광주는 1970년대의 저주이자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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