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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현대적 외과를 가능케 한 마취술

2014.12.19 20:29 입력 2014.12.19 21:10 수정
서울대 의대 교수·의사학

마취없는 수술,그 상상 이상의 고통을끝내준 사람들

“흉측한 쇠뭉치가 내 가슴뼈를 잘라내는 순간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단다. 비명은 몸이 파헤쳐지는 내내 멈추지 않았어.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거야, 신기하게도. 끔찍하게 아팠어. 수술도구가 치워졌을 때에도 통증은 전혀 줄어들 것 같지 않았다구. 그리곤 곧 내 가련한 몸뚱이로 공기가 달려들었는데 날카로운 단도가 갈가리 찢어대는 것 같았어. 이제는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맙소사! 더 무서운 일이 시작된 거야. 이전 건 아무것도 아니었어. 나는 수술 칼이 가슴 속을 샅샅이 긁어내는 것을 느끼고 또 느꼈단다.”

작가 패니 버니(Fanny Burney, 1752~1840)는 마취를 하지 않은 채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1811년 9월30일 외과의사들은 버니의 오른쪽 가슴에 생긴 유방종양을 치료하기 위해 4시간에 걸쳐 유방제거수술을 시행했다. 위의 인용문은 버니가 수술한 지 아홉 달 뒤 동생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마취제가 개발되기 전에 안전한 수술은 기대할 수 없었다. 패니 버니는 요행히 살아남았지만 팔다리절단술, 제왕절개술, 개복수술 등을 받고 사망하는 경우는 매우 흔했다. 수술 환자들은 우선 통증으로 인한 쇼크 때문에, 그리고 출혈과 감염 탓에 목숨을 잃었다. 따라서 그냥 놓아두면 당장 사망하는 경우 이외에 수술은 고려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다. 외과(外科)는 말 그대로 몸의 바깥 부위를 주로 다루는 분야로 오늘날의 피부과에 가까웠다. 그랬던 외과가 현대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마취술의 공이 크다.

1846, 존 워렌·윌리엄 모튼, 에테르 이용 목 종양 제거

1846년 10월16일, 최초의 공개적인 마취 수술 장면을 묘사한 그림. 외과의사 워런이 환자의 왼쪽 목에 있는 종기를 떼어내고 있고, 치과의사 모튼은 자신이 개발한 에테르 흡입기를 들고 있다. 부부 화가인 워런(Warren)과 루치아 프로스페리(Lucia Prosperi)의 2001년 작품으로 당시 수술장 정면에 걸려 있다. 수술장이 있던 건물은 1965년에 국가역사유적으로 지정되면서 ‘에테르 돔’이라고 불린다.

1846년 10월16일, 최초의 공개적인 마취 수술 장면을 묘사한 그림. 외과의사 워런이 환자의 왼쪽 목에 있는 종기를 떼어내고 있고, 치과의사 모튼은 자신이 개발한 에테르 흡입기를 들고 있다. 부부 화가인 워런(Warren)과 루치아 프로스페리(Lucia Prosperi)의 2001년 작품으로 당시 수술장 정면에 걸려 있다. 수술장이 있던 건물은 1965년에 국가역사유적으로 지정되면서 ‘에테르 돔’이라고 불린다.

1846년 10월16일, 미국 보스턴의 매사추세츠 종합병원(MGH)에서 일반인도 참관하는 공개 수술이 행해졌다. 이 수술이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사상 처음 ‘공개적으로’ 에테르를 사용하여 마취를 하고 했기 때문이다. 수술을 집도한 사람은 하버드 의과대학의 해부학 및 외과학 교수이자 MGH 외과 과장인 68세의 존 워런(John Collins Warren, 1778~1856), 마취를 성공시킨 사람은 보스턴의 개원 치과의사인 27살의 윌리엄 모튼(William Morton, 1819~1868), 환자는 애벗(Gilbert Abbott)이라는 젊은이였다.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모튼이 환자를 마취시켰고 이어서 워런이 솜씨 좋게 환자 왼쪽 목의 혹을 제거함으로써 수술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 소식은 보스턴 신문들에 즉시 보도되었고, MGH 외과의사인 바이즐로는 10월16일의 첫 수술과 그 뒤의 수술례들을 정리해서 11월18일자 ‘보스턴 내과외과 잡지’에 보고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에테르가 마취제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이로써 좁게는 외과, 넓게는 의학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마취술을 개발하는 데 관여한 사람들의 생애는 영예롭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특허권을 둘러싼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모튼은 1848년 10월28일 특허권을 신청했으며, 미국 정부는 몇 가지 단서를 달아 특허권을 인정했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공개 수술에서 마취를 성공시킨 것은 모튼이었지만, 그에게 에테르의 마취효과를 알려주고 사용을 권했던 것은 모튼의 은사인, 하버드 의과대학 출신 의사이자 화학자인 잭슨(Charles Jackson, 1805~1880)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개 시연도 잭슨이 주선해준 덕택이었다. 그런데도 공과 이득을 독차지하려 한 모튼은 주위의 간곡한 충고가 있고서야 잭슨을 공동 특허권자로 등록했다. 그러나 노여움에 가득 찬 잭슨은 뒤늦은 조치에 만족하지 않고 모튼의 처사에 비난을 퍼부었다. 분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보스턴의 의료진보다 4년 앞서 에테르 마취 후 수술에 성공했던 조지아주의 크로퍼드 롱(Crawford Long, 1815~1878)도 싸움에 끼어들었다. 롱보다는 주변 사람들이 더 적극적이었다. 롱은 주위의 부추김을 받아 1849년에야 자신의 업적을 ‘남부 내과외과 저널’에 발표했다.

마취제의 발견자 크로퍼드 롱 |<br />미국 국회의사당에 세워져 있는 롱의 대리석상. 린드(Massey Rhind)의 작품으로 1926년에 건립되었다. 명판에 롱을 “1842년 3월30일 미국 조지아주 잭슨군 제퍼슨에서 수술 시 마취제인 황산 테르의 사용법을 발견한 인물”이라고 묘사했으며 맨 아래에는 “내 직업은 신이 나에게 주신 성스러운 사명”이라는 롱의 좌우명이 적혀 있다. 롱이 에테르 마취제의 최초 발견자임을 국가가 인정한 것이다.

마취제의 발견자 크로퍼드 롱 |
미국 국회의사당에 세워져 있는 롱의 대리석상. 린드(Massey Rhind)의 작품으로 1926년에 건립되었다. 명판에 롱을 “1842년 3월30일 미국 조지아주 잭슨군 제퍼슨에서 수술 시 마취제인 황산 테르의 사용법을 발견한 인물”이라고 묘사했으며 맨 아래에는 “내 직업은 신이 나에게 주신 성스러운 사명”이라는 롱의 좌우명이 적혀 있다. 롱이 에테르 마취제의 최초 발견자임을 국가가 인정한 것이다.

마침내 모튼의 청원으로 미국 의회가 이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의회는 선취권자에게 10만달러라는 엄청난 기금을 주기로 하고 1849년, 1851년, 1854년 세 차례에 걸쳐 에테르 마취제 개발의 선취권에 대해 심의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오랜 분쟁 탓이었는지, 모튼은 1868년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서 정신발작을 일으켜 세상을 떠났고, 잭슨도 1873년에 정신병원에 입원해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추잡한 싸움에 크게 휘말리지 않았던 롱은 타격도 크지 않았지만, 영예도 별로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1912년에는 출신교인 펜실베이니아 의과대학에 기념 동상이 만들어졌고, 1926년에는 국회의사당에 ‘마취제의 발견자’라는 명판이 붙은 대리석상이 세워졌다. 한편 1965년 연방정부는 공개 시연이 있었던 수술장 건물을 국가역사유적으로 지정했고, 보스턴 시는 10월16일을 ‘에테르의 날’로 선포했다.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들보다 앞서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에 성공한 경우가 있다.일본마취과학회 홈페이지의 ‘마취의 역사’ 항목은 이렇게 시작된다. “마취의 기원은 외과의사 하나오카 세이슈가 세계 최초로 1804년 10월13일 전신마취 하에 유방암을 성공적으로 제거한 것이다. 이것은 하버드 대학에서 치과의사 모튼이 에테르를 사용했던 널리 알려진 실험에 40여년 앞선 일이다.”

1804, 하나오카 세이슈, 통선산 이용 유방종양 제거

1825년경에 간행된 하나오카의 저서 <진기한 질환들과 그 외과치료법 도해(奇疾外療圖卷)>(미국국립의학도서관 소장) 중 하나오카의 수술 장면(왼쪽 위), 그에게서 처음으로 전신마취 하에 유방종양(乳岩) 제거 수술을 받은 60세 된 환자 아이야 간(오른쪽 위), 유방종양을 들어내는 모습(왼쪽 아래), 떼어낸 유방종양의 종단면(오른쪽 아래). 원래 책의 10쪽, 57쪽, 62쪽, 64쪽에 있는 그림을 함께 보인 것이다.

1825년경에 간행된 하나오카의 저서 <진기한 질환들과 그 외과치료법 도해(奇疾外療圖卷)>(미국국립의학도서관 소장) 중 하나오카의 수술 장면(왼쪽 위), 그에게서 처음으로 전신마취 하에 유방종양(乳岩) 제거 수술을 받은 60세 된 환자 아이야 간(오른쪽 위), 유방종양을 들어내는 모습(왼쪽 아래), 떼어낸 유방종양의 종단면(오른쪽 아래). 원래 책의 10쪽, 57쪽, 62쪽, 64쪽에 있는 그림을 함께 보인 것이다.

와카야마의 의사 가문 출신인 하나오카(華岡靑洲, 1760~1835)는 전통의술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일본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쇄국정책을 폈지만 나가사키의 데지마에서 네덜란드인들과의 교역과 교류는 제한적이나마 허용했다. 이런 좁은 통로를 통해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에 의한 강제 개국 이전에 이미 서양의학이 일본으로 유입되었는데 이것을 난방의학(蘭方醫學)이라고 한다. 하나오카는 주로 난방의학에서 외과술을 배운 것으로 여겨진다. 마취술은 아직 서양에서도 개발되기 전이라 하나오카 스스로 개척해야만 했다. 하나오카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남긴 기록 등을 종합해 보면 그는 20년의 노력 끝에 통선산(通仙散, 또는 마비탕[麻沸湯])이라는 마취제를 개발했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이 과정에서 스스로 실험대상이 되었던 부인은 마취제 부작용으로 눈이 멀었고, 이것을 모티프로 한 소설 <하나오카의 처(華岡靑洲の妻)>(1966년)와 같은 제목의 영화(1967년)가 인기를 끌어 하나오카가 일본인들에게 유명해졌다.

통선산은 흰독말풀과 바꽃속이 주 재료인 복합제제로 하나오카 자신의 처방은 전해지지 않고 주변인들의 기록만 남았다고 한다. 히로사키 대학 마취과의 마츠키 교수가 그 기록에 따라 조제를 해서 마취에 성공했다는 것을 보면 과학적 근거도 있는 셈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하나오카는 1804년 11월14일(양력) 아이야 간(藍屋勘)이라는 60세 된 여성을 통선산으로 마취하고 유암(乳岩) 적출 수술에 성공했다. 유암을 현대 일본학자들은 손쉽게 유방암(癌)으로 해석하지만, 양성인지 악성인지 명확하지 않으므로 ‘유방종양’으로 표현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환자는 수술 넉달 뒤에 사망했는데 사인은 미상이다. 그 뒤로 하나오카는 155례의 유암 수술과 그밖에 여러 질환 치료에 자신의 마취제를 사용했다. 하나오카의 사후 마취술은 수제자 혼마(本間玄調, 1804~1872)에게 계승되지만 활발하게 시행되지는 않았다. 혼마는 1857년 4월 탈저(脫疽) 환자를 통선산으로 마취하고 하지절단술에 성공했다고 전해진다.

일본 최초의 해부학 번역서 <해체신서(解體新書)>(1774년)를 펴낸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1733~1817)의 손자인 스기타 세이케이(杉田成卿, 1817~1859)는 <제생비고(濟生備考)>(1850년)에 에테르 마취술을 소개했다. 그리고 그는 5년의 독학 끝에 에테르로 마취하고 화상 환자를 수술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스기타는 하나오카의 마취술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난방의학의 전통도 섭렵한 스기타가 그것을 몰랐을까? 지금까지의 연구들을 보면 하나오카의 마취술은 확산되지 못했고 혼마 이후에는 단절된 것 같다.

에테르와 통선산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에테르는 비록 특허권 분쟁을 겪기는 했지만 세상에 열려 있었다. 반면에 통선산의 비방(秘方)은 몇 사람 속에 갇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방성과 공공성을 지향하는 현대사회에 어울리는 마취제는 단연 에테르일 것이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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