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김재규의 10·26 사건 (中)

2015.05.17 21:41 입력 2015.05.17 21:42 수정
한승헌 | 변호사·전 감사원장

김재규 “민주화 지연 땐 80년 4~5월 국가 혼란 사태 온다” 진술

■ 미국의 ‘10·26’ 개입 여부에 대한 관심

한국에서 무슨 정변이라도 발생하면, 흔히 미국의 입장과 개입 여부에 관심이 쏠린다. ‘4·19’와 ‘5·16’ 때도 그러했고, 5·18광주항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10·26 사태는 박정희의 유신통치로 미국과의 관계가 어긋나고 있던 시점에서 돌출했기 때문에 그 점이 한층 더 예민한 관심사가 되었다. 실제로 출처 불명의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의 수사결과 발표에 ‘외세의 조종이 개입된 사실이 전혀 없었다’ ‘내외 불순 집단의 조작된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문안이 들어 있는 점이 역설적으로 어떤 의문의 존재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쉽게 말해 ‘김재규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하더라’는 식의 추론을 막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10·26의 ‘미국 배후설’을 암시하는 단서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사건 바로 전날인 10월25일, 몇 달 전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존 베시 육군참모차장이 아시아협회의 행사에서 강연을 했는데 그때 미묘한 발언이 나왔다. “미국의 대한관계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가령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 현재의 대한 협력관계를 냉전의 유산으로만 파악해서는 안되고, 모두에게 장래의 커다란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날 참석자 중에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라는 말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도 있었다(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 돌베개, 1989). 또 ‘파이스턴 이코노믹리뷰’의 워싱턴지국장 바버 기자는 “미국 당국자는 박(정희)의 암살에 놀라움도 당혹감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며 미리 사태의 발생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하였다고 썼다.

국내에서 나돌던 미국 중앙정보국(CIA) 개입설은 김재규 자신이 부인했을뿐더러 달리 확인할 길도 없었다(일본의 교도통신이 김재규가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보도를 한 일은 있었다). 다만 김재규는 조사 과정에서 ‘혹시 미국 측에서 무슨 연락이 없느냐’고 수사관에게 거듭 물은 적이 있다고 한다(김재홍, <누가 박정희를 용서하였는가>, 책보세, 2012).

일러스트 | 박건웅

일러스트 | 박건웅

■ 11차례 휴정, 김재규의 비공개 진술

12월8일 열린 2회 공판에서는 법정 녹음 허용 문제를 둘러싸고 변호인 측과 재판부 사이에 마찰이 빚어져 개정 5분 만에 첫 번째 휴정에 들어갔다. 이렇게 휴정과 속개(續開)를 무려 열한 번이나 되풀이하며, 오후 7시45분경 폐정할 때까지 재판부와 변호인단 사이에 공방이 치열하게 이어졌다. 재판부가 밀리는 형국이 되면, 밖에서 법정 뒷문을 통해 법무사에게 쪽지가 전달되기도 했다. 군법회의법에 대한 위헌(비상계엄하의 현역 군인에 대한 단심 재판제) 제청 신청에 검찰관이 반대의견으로 가세하자 쌍방은 더욱 격하게 맞서게 되었다. 그 와중에 검찰관의 탈선 발언까지 튀어나와 법정 분위기가 한층 더 악화됐다.

“범행의 원흉을 ‘장군’이라고 호칭하여 영웅시한다는 것은 계엄당국의 아량을 오판한 것이다. 재판절차를 악용하여 소송을 지연시키는 것은 본건 범행을 미화하여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키려는 음모라고 생각한다. 국가 변란의 기도를 분식 호도함은 국민의 준엄한 비판을 받을 것이라는 점을 경고해둔다.” 이런 위협적인 검찰관의 말에 변호인들은 격분했다.

오후 공판은 재판부의 분리 신문 결정에 따라 김재규 피고인 한 사람만 입정시켜 놓고 신문을 했다. 그에 앞서 검찰관은 ‘오전 재판 때의 과격한 표현에 대해 정정한다’며 사과했다. 이날 공판은 지루한 난조(亂調)로 사실심리도 못한 채 오후 6시가 되었다. 하지만 변호인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그날로 사실심리를 마치겠다며 김재규에 대한 분리 신문을 강행했다.

김재규의 비공개 진술은 별로 큰 제지를 받지 않고 밤늦은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인 자기가 왜 대통령을 살해하지 않으면 안되었는지에 대해 또렷하게 진술했다. 김재규가 미국이 유신체제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니 좀 완화해보면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더니, 대통령은 내정간섭을 받을 필요가 있느냐면서 “미국 놈들 데려가려면 다 데려가라고 그래!”라며 강경히 나왔다. 대통령 직선제도 건의했으나 일언지하에 거부당했고, 긴급조치 해제도 진언했으나 “긴급조치가 있어도 이 모양인데 그걸 해제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핀잔만 돌아왔다. 그해 9월, 시민·학생의 대규모 시위로 계엄이 선포된 부산에 가서 박 정권에 대한 저항과 불신의 심각성을 확인하고 돌아와 대통령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했으나 이 또한 실패했다. “결국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한쪽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배신과 패륜으로 모는 재판에서 그가 내세운 ‘민주 대의론’은 당시 언론매체에서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그는 (궁정동 거사 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불어버린’ 김계원을 살려둔 것을 후회한다고도 했다. 박흥주, 박선호를 비롯한 중정 요원들이 보여준 김재규에 대한 절대적 복종은 법정 밖의 일반 국민들에게도 적지 않은 놀라움과 충격을 주었다.

■ 초고속 재판의 마무리, 구형과 최후진술

이 사건은 궁정동의 총성 후 계엄사 합수부가 수사에 나선 지 39일 만에 1심 첫 공판이 열렸고, 전후 9회에 걸쳐 재판이 진행되었다. 12월18일엔 결심(심리 종결) 구형 공판이 열렸다. 오후 1시30분, 검찰관은 장문(長文)으로 준비한 논고를 시작했다. 그는 “어제까지 체제의 주도적 입장에 있던 자가 하루아침에 돌변하여 체제 타도를 외치면서 덜컥 대통령을 시해한 (중략) 본건 범행 동기는 정권욕이나 개인감정의 처리라는 탐욕성과 충동성이라는 천박한 편린만을 엿보이게 할 뿐이다”라며 친형제보다 더 신뢰하고 온갖 은혜를 베풀어준 대통령을 쏜 행위는 인륜을 저버린 배신의 가증성과 수단의 잔인성 때문에 국민의 분노 대상이 되고 있다고 김재규를 비난했다. 그 밖의 피고인들에 대해서도 장황하게 논고를 한 검찰관은 피고인들에 대한 구형에 들어갔다. 피고인 8명 중 유석술(징역 5년)을 제외한 김재규 등 7명에 대하여 사형이 구형되었다. ‘사형!’이라는 저승사자의 음성이 일곱 번이나 울려나왔다. 방청석에서 흐느낌과 한숨 소리가 터져나왔다.

변호인단의 변론에 이어 피고인들의 최후진술 차례가 왔다. 김재규의 최후진술은 그의 가족 4명만 남기고, 보도진과 방청객을 모두 퇴정시킨 가운데 30분이 넘게 계속되었다. 그는 자신의 혁명대의론을 거듭 강조하고 부연했다. “유신 이후 7년이 경과하면서 영구집권을 다져왔기 때문에, 박 대통령이 살아 있는 한 20년 내지 25년까지는 민주 회복이 될 수 없었다. 국민들의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 내가 혁명을 한 것이다.” “이 혁명으로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은 20~25년은 앞당겨졌다는 자부를 갖고 나는 간다.” 이런 말을 남겼다.

■ 첫 공판 16일 만의 1심 판결, 항소심도 3일 만에

구형이 있은 지 불과 이틀 뒤인 12월20일, 그러니까 재판이 시작된 지 불과 16일 만에 역사상 유례없는 초고속 재판의 1심 판결이 선고되었다. 그날 오전 11시, 재판장 김영선 중장은 먼저 판결 이유를 요약해서 말한 뒤 판결 주문을 낭독했다. “피고인 김재규, 동 김계원, 동 박선호, 동 박흥주, 동 이기주, 동 유성옥, 동 김태원을 각 사형에, 동 유석술을 징역 3년에 처한다.” 사람들이 예상한 대로였다. 극형을 선고받은 사람답지 않게 피고인들의 표정은 담담했다고 전해진다. 사형선고를 받은 피고인 중 현역 군인인 박흥주는 군법회의법에 따라 1심 판결만으로 형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다른 피고인들처럼 항소를 하지 못하고, 재심을 청구했다(그러나 1980년 3월6일, 그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 사건의 항소심을 맡은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재판장 윤흥정 중장) 첫 재판은 1980년 1월22일 열렸다. 그날은 항소이유서 제출 시한인 1월21일 바로 다음날이었다. 1심에서 사선 변호인의 변호를 거부했던 김재규도 가족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사선 변호인의 선임에 동의했다. 검찰관은 김계원에 대한 공소사실과 적용법조를 ‘내란목적 살인’에서 ‘단순 살인’으로 변경 신청을 했다. 검찰관과 변호인단 사이에 피고인들의 행위가 단순히 자연인에 대한 살인인지, 내란목적의 살인인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또한 박 대통령의 ‘연회’와 관련된 박선호의 진술이 관심을 끌었다. 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종전의 ‘민주회복 대의론’을 다시 역설하고 나서, “내 부하와 그의 불쌍한 가족들을 각별히 처리해주기 바란다. 법리의 차원을 떠나서 역사적 관점에서 심판해 달라”고 호소했다(김대곤, <10·26과 김재규>, 이삭, 1985).

고등군법회의는 1심보다 더한 초고속으로, 연달아 사흘 동안 재판을 강행하고 숨가쁘게 결심을 했다. 그리고 불과 나흘 만인 28일에 선고까지 끝냈다. 결과는 1심 선고형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김계원만은 계엄사령관의 사후 판결 확인 조치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 민주화의 역주행과 김재규 구명운동

김재규는 2심 최후진술에서 “민주화를 지연시키다간 1980년 4~5월경 국가적 혼란사태가 야기된다”는 경고성 발언을 했다. 그는 1심에서도 조속한 민주회복을 하는 것이 국민의 요구이며, 이것을 하지 않으면 민심이 폭발할 수밖에 없는 한계점에 도달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바깥세상은 어떻게 달라지고 있었던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집단은 국민의 여망과는 정반대의 역주행을 계속해 위기감을 조성했다. 더구나 민주화 일정이 불투명한 가운데 보안사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총격전 끝에 체포한 하극상 사건, 즉 ‘12·12 사태’가 일어나고, 계엄통치가 장기화되자 학생 시위와 노동자 농성 파업이 격화되었으며, 이를 구실로 삼은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아울러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해 재야 민주세력의 무더기 검거에 돌입했다. 그리고 끝내 광주 일원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 대학살의 참극이 발생했다. 이런 정세 속에서 미국에서는 ‘김재규 의사 구명운동본부’가 출현했는가 하면, 국내에서도 함석헌, 윤보선 등 지도급 인사들이 역시 김재규를 살리고자 하는 운동에 나섰다.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기독교(개신교)계 및 불교계에서도 최규하 대통령과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김재규의 구명을 요구했고, 각계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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