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모순 어디서 왔나’ 80년대 학생운동권 백가쟁명
1980년대는 ‘사회과학의 시대’였다. 딱딱한 사회과학이 일반 시민들에게도 큰 관심을 모은 것은 한국 지성사에서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1980년대는 산업화시대에서 민주화시대로 이행하던 시기였다. 어떤 민주주의와 사회체제를 열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개혁과 혁명을 포함한 사회과학의 변혁 담론을 활성화시켰다. 둘째, 1980년대는 학생운동의 시대이기도 했다. 학생운동세력과 이와 연관된 진보적 연구자 그룹들은 그동안 학계에서 금기시돼왔던 마르크스주의 연구를 새롭게 개화시킴으로써 군부독재 아래서 억눌려온 시민사회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이런 사회과학 시대를 이끈 것이 ‘사회구성체 논쟁’이다. 이 논쟁은 1985년 ‘창작과비평’ 지면을 통한 박현채(전 조선대 교수, 경제학)와 이대근(성균관대 명예교수, 경제학) 간의 논쟁으로 본격화한 후 진보적 사회과학계 전반으로 파급됐다. 박현채는 당시 우리 사회를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파악한 반면, 이대근은 ‘주변부 자본주의’ 사회로 이해했다.
■ 사구체 논쟁의 전개과정
박현채와 함께 <사회구성체 논쟁 1·2·3·4>를 편집한 조희연(서울시 교육감, 성공회대 교수)은 사회구성체 논쟁 시기를 논쟁의 준비기(1980년대 전반기), 소시민적 이론 대(對)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대립을 기본 축으로 하는 1단계 논쟁기(1980년대 중반), NL(민족해방파) 대 CA(제헌의회파)의 대립을 기본 축으로 하는 2단계 논쟁의 제1소시기(1986~87년), NL 대 PD(민중민주파)의 대립을 기본 축으로 하는 2단계 논쟁의 제2소시기(1988~89년), 구(舊)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를 계기로 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견지 대 수정 변화를 기본 축으로 하는 3단계 논쟁기(1989년 이후)로 구분한 바 있다. 10년이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백가쟁명의 사회변혁 이론과 노선들이 치열하게 경쟁했던 게 사회구성체 논쟁이었다.
사회구성체 논쟁을 전체적으로 돌아볼 때, 한국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려 했던 ‘식민지 반(半)봉건사회론(혹은 반(半)자본주의론)’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논쟁의 양대 기본 축을 이룬 견해였다.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은 한국사회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자본주의의 전근대성과 왜곡성, 제국주의의 정치·군사적 지배, 남한 국가권력의 본질적 예속성을 강조하고, 그 실천전략으로 변혁운동 역량에 대한 전한반도적 시각, 반제자주화와 민족해방운동을 포괄한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변혁전략을 제시했다. 반면에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한국사회의 구조를 신식민지 특수성을 가진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이해하고, 그 정치적 상부구조로서 신식민지 파시즘의 성격을 부각시켰다.
진보학계에 상대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 이론은 한국사회의 발전 경향을 ‘독점강화·종속심화’로 파악하고,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한, 노동운동을 중시한 반제·반독점의 사회변혁을 제시했다.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주목할 연구 가운데 하나는 서관모(충북대 교수, 사회학)가 주도한 계급 연구였다. 서관모는 한국사회 계급구성의 추이를 통계적으로 관찰해 볼 때 프티부르주아지의 감소 경향, 노동자계급의 급속한 증대 경향이 명확히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한국사회 계급구조는 자본가계급 대 노동자계급의 양극화를 축으로 해 프티부르주아지, 중간 계층들, 반(半)프롤레타리아트층으로 이뤄지는 자본주의 계급구조의 보편적인 양상을 보여준다는 것이 서관모의 결론이었다.
■ 논쟁의 빛과 그림자
사회구성체 논쟁이 갖는 의의를 김진균(전 서울대 교수, 사회학)과 조희연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이 논쟁은 한국 근현대를 연구하는 데 그 이전 시기에 잠재적으로 대립했던 입장을 명확히 해 각각의 논리체계로 정립시켰다. 둘째, 이 논쟁은 민족·민중적 사회과학의 이론적 및 방법론적 기초, 즉 윤소영(한신대 교수, 경제학)과 이병천(강원대 교수, 경제학)이 말한 ‘단절된 정치경제학적 전통 복원의 올바른 방법론적 원칙’을 제시했다. 셋째, 이 논쟁은 민족·민중적 학문으로서의 학술 연구가 실천운동과 변혁운동에 중대한 함의를 안겨준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이런 사회구성체 논쟁은 1990년대에 들어와 갑자기 쇠퇴했다. 여기에는 안과 밖의 요인이 동시에 작용했다. 먼저, 1980년대 후반 동구 사회주의의 위기와 붕괴라는 대외적 변화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이 해체됨에 따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됐다. 이와 연관해 구소련의 신사고론과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논의가 소개되고, 사회민주주의·유로코뮤니즘·신사회운동론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한편, 대내적으로는 논쟁이 격화되면서 구체적 현실에 대한 추상적 논의와 정통성 시비가 성행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결국 논쟁의 때이른 쇠퇴를 가져오게 했다. 사회구성체 논쟁은 1987년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동시에 이런 사회운동들은 논쟁을 더욱 확산시켰지만,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의 감상적 민족지상주의나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협애한 계급주의는 관념적인 편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번역한 김수행(전 서울대 교수, 경제학)은 사회구성체 논쟁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첫째, 이 논쟁을 통해 제시된 다양한 견해들은, 그것이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이든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든 중진자본주의론이든, 현실의 역동성을 왜곡·부정하고 역사과정에 대한 목적론적이고 고정된 관점을 강조했다. 둘째, 이 논쟁은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종착점, 예를 들어 식민지적 정체 상태·선진자본주의·사회주의에 대한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을 결여하고 있었다. 셋째, 이 논쟁은 미래의 사회변동을 경제주의적으로 예단하는 경향이 강하고, 따라서 현실의 변화에 내재된 계급갈등의 복합성을 간과했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은, 조희연과 김동춘(성공회대 교수, 사회학)이 지적하듯, 진보적 사회과학의 ‘학문적 시민권’을 획득하게 한 일종의 학술운동이었다. 이 논쟁은 우리 사회에서 냉전분단체제 아래서 불허됐던 ‘마르크스주의의 르네상스’를 가져오게 했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들은 NL, PD, 변증법, 사구체(사회구성체의 약어) 등의 개념들을 공부하고 토론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던 기억이 선명할 것이다.
하지만 이 르네상스는 오래 가지 못했다. 앞서 말한 대외적 환경의 변화와 논쟁에 내재된 추상적 급진성이 그 원인을 제공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열린 민주화시대는 한국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사회구성체 논쟁의 줄기를 이룬 여러 이론들은 민주화시대의 사회변동에 대응해 새로운 변화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론, 포스트 포드주의론, 진보적 시민운동론 등은 그 대표적인 시도들이었다.
사회구성체 논쟁을 주도했던 이병천은 1990년대에 들어와 기존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고, 한국식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를 주창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을 초월론적·본질주의적·합리주의적·목적론적·결정론적 역사철학으로 이해하고, 유물변증법에 기반을 둔 토대-상부구조론·자본주의론·공산주의론·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전면적으로 비판했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기반을 둔 변혁운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따라서 노동운동의 중심성을 탈피해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유연하게 연대하는 급진 민주주의를 새로운 정치적 기획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게 이병천이 제시한 새로운 대안이었다. 이러한 대안은 영국에서 활동해온 라클라우와 무페의 이론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이병천의 주장은 진보적 사회과학계 안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문제 제기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인 노동가치론·잉여가치론의 폐기와 혁명적 전망의 포기를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그 자신이 사회구성체 논쟁의 한 주역이었기 때문에 논쟁에 참여한 이들을 적잖이 당황시켰다.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은 우리 현실을 돌아볼 때 결과적으로 노동운동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한다는 점에서 서구의 진보 이론을 무매개적으로 수용하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6월항쟁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민·환경·여성·평화운동 등을 지켜볼 때 변화된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모색이라는 고민을 담고 있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