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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3 17:02 입력 2018.08.03 17:50 수정 글·사진 정지윤 기자

비전향장기수들은 2000년 6·15공동선언에 따라 대부분 북한으로 건너갔다. 1차 송환 당시 미처 신청을 못했거나 전향을 했다는 이유로 제외된 33명은 남았다.  17년의 세월이 흘렀고 송환을 요구한 이들 중 14명이 세상을 떠났다. 이제 19명만 남았다. /정지윤 기자

비전향장기수들은 2000년 6·15공동선언에 따라 대부분 북한으로 건너갔다. 1차 송환 당시 미처 신청을 못했거나 전향을 했다는 이유로 제외된 33명은 남았다. 17년의 세월이 흘렀고 송환을 요구한 이들 중 14명이 세상을 떠났다. 이제 19명만 남았다. /정지윤 기자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지난 4월 27일 오전, 서울 봉천동 낙성대 만남의집에서는 백발의 어르신들이 TV화면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11년 만에 성사된 두 정상의 만남을 누구보다 반가워하며 기다려온 사람들이다. 한국 사회에선 잊혀져야 했던 이들이다. 그럼에도 고향땅을 밟기위해, 가족을 만나기 위해, 신념을 지키기위해 끈질기게 살아 남아야만 했던 어르신들이다.

남북 분단의 상처와 아픔을 품고 살아가는 비전향장기수들. 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고 군사분계선을 넘자 그들의 입에선 묵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분단으로 인한 인도주의적 문제를 해결하기로 약속하면서 비전향장기수들은 마침내 고향으로,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 정상회담을 지켜보던 서옥렬씨(90)는 “57년 전 봤던 아내의 얼굴이 지금도 눈앞에 어른거린다”며 “이제 조국과 아내에게 돌아갈 희망을 품게됐다”고 했다.

비전향장기수는 일반적으로 1989년 사회안전법 폐지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전향서를 쓰지 않고 출옥한 좌익수(국가보안법·반공법·국방경비법 등 위반)를 말한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양심수후원회의 통계에 따르면 94명의 비전향장기수가 감옥에서 보낸 햇수를 합하면 2854년에 이른다. 1인당 평균 31년의 징역을 살았다. 비전향장기수들은 2000년 6·15공동선언에 따라 대부분 북한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1차 송환 당시 미처 신청을 못했거나 전향을 했다는 이유로 제외된 33명은 남아야 했다. 남은 이들은 2차 송환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 당국자들도 2001년 당시 ‘귀향 의지가 있는 한 2차, 3차 (송환)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17년의 세월이 흘렀다. 송환을 요구한 이들 중 14명이 세상을 떠났다. 이제 19명만 남았다.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은 “송환 희망자들은 80~90세의 노약자들이자 오랜 감옥생활로 인한 각종 후유증을 앓고 있다”며 “비전향장기수 2차 송환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류기진, 김동섭, 문일승, 김교영, 이두화, 서옥렬, 허찬형, 양원진, 최일헌, 박정덕, 박수분, 오기태, 박종린, 김영식, 강담, 박희성, 양희철, 김동수, 이광근.

2차 송환을 애타게 바라는 비전향장기수들이다.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빨갱이’ 중에서도 ‘골수 빨갱이’로 낙인찍혔다. 그런 탓에 오랫동안 사회와 격리됐다. 적어도 20년 이상을 감옥에서 보내야했다. 이들의 복역기간을 합치면 384년에 이른다. 평균 나이는 87세. 그 중 4명은 대장암·폐질환 등으로 투병 중이다. 이들은 한국전쟁 전후의 빨치산 및 인민군 포로, 전쟁이후 북에서 내려온 남파공작원, 자생적 반체제 운동가 출신 등으로 분류된다.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19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을 만났다. 감옥에서 나온 이들은 대부분 떠돌이 생활을 했다. 일자리 구하기도 힘들어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지금도 대부분이 생계급여와 노령연금에 의존해 살고 있다. 사실상 보안관찰법 때문에 창살 없는 감옥생활이기도 했다.

남파공작원 출신 비전향장기수 서옥렬, 양원진, 최일헌, 오기태, 박종린 씨.(왼쪽부터) /정지윤 기자

남파공작원 출신 비전향장기수 서옥렬, 양원진, 최일헌, 오기태, 박종린 씨.(왼쪽부터) /정지윤 기자

남파공작원 출신 비전향장기수 김영식, 강담, 박희성, 김동수, 이광근 씨. (왼쪽부터)/정지윤 기자

남파공작원 출신 비전향장기수 김영식, 강담, 박희성, 김동수, 이광근 씨. (왼쪽부터)/정지윤 기자

서옥렬, 양원진, 최일헌, 오기태, 박종린, 김영식, 강담, 박희성, 김동수, 이광근씨는 남파공작원이었다. 체포된 후 짧게는 21년, 길게는 35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이들은 하나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를 했었지만 30년, 40년씩 감옥에 갇힐 것이라곤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혈기왕성한 30대의 젊은이들이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되어서야 출소할 수 있었다. 당시 두 아들(5살, 3살)을 두고 남파된 서옥렬씨는 1973~74년에 저질러진 살인적인 전향 공작 때 고질병을 얻어 지금 월세 방에서 누워만 지낸다. 서씨는 “인간의 사상을 폭력과 고문을 통해 바꿔보려는 발상은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라며 “모진 고문에 못이겨 서약서는 썼지만 나의 사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전쟁포로 출신 류기진, 김동섭, 문일승, 김교영, 허찬형 씨. (왼쪽부터) /정지윤 기자

전쟁포로 출신 류기진, 김동섭, 문일승, 김교영, 허찬형 씨. (왼쪽부터) /정지윤 기자

류기진, 김동섭, 문일승, 김교영, 허찬형씨는 인민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전쟁포로 출신이다. 전쟁포로의 국제법상 권리조차 박탈당한 채 수십년을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북한으로 송환 희망자 중에서 최고 연장자인 류기진씨는 인민군 소위 출신이다. 낙동강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 11년을 감옥에서 보낸 그는 37년 동안 택시운전을 하며 생활했다. 류씨는 “67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 제대하지 않은 인민군 소위다. 북으로 가서 전역신고를 마쳐야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같다”고 말했다. 함경남도 영흥이 고향인 김교영씨도 전쟁포로였다. 8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결혼해 3남매를 두고 있다. 김씨는 “고향을 떠난 진 68년이지만 지금도 고항마을을 눈감고도 찾아갈 수 있다”며 “고향땅을 밟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김씨의 부인 이해옥씨(77)는 “저 양반, 고향땅 밟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 저 양반이 가겠다면 기꺼이 보내주지. 평생소원인데 그거 하나 못 들어주겠냐”며 오히려 담담하다.

전향서를 쓰지 않고 37년 복역한 양희철씨. /정지윤기자

전향서를 쓰지 않고 37년 복역한 양희철씨. /정지윤기자

양희철씨는 1963년 고려대 재학시절 지하당사건으로 체포됐다. 모진 고문에도 불구, 그는 전향서를 쓰지 않았다. 28살에 감옥에 들어가 출소했을 때 그의 나이 64살. 뒤늦게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그는 “북은 내가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사상적 고향과 같은 곳이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그곳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빨치산 활동을 했던 이두화, 박정덕, 박수분 씨. /정지윤 기자

빨치산 활동을 했던 이두화, 박정덕, 박수분 씨. /정지윤 기자

이두화, 박정덕, 박수분씨는 한국전쟁을 전후해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체포됐다. 경남 하동이 고향인 박수분씨는 여성 빨치산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잊혀진 여전사>의 주인공이다. 박순자라는 가명으로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 1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민주화 운동에도 적극 참여한 그는 “하루를 살더라도 내가 평생 갈구한 사회주의 사회에서 제대로 살고 싶다”고 밝혔다.

비전향장기수들은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잊혀진 사람들이었다. 분단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살아온 사람들이지만 기억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지키며 굳건하게 버텨왔다. 그림자처럼 살아온 이들의 한결 같은 바람은 가족과 고향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최근 남북관계 진전에 따라 비전향장기수들의 2차 송환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현대사의 그늘에서 숨죽여 살아온 비전향장기수들의 소망은 언제쯤 이뤄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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