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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개저씨인가, 젠틀맨인가

2016.06.16 22:27 입력 2016.06.17 09:57 수정

여기저기 나서다 중요한 때 침묵한다면 아재

쩍벌·막말 서슴없는 당신 개저씨

위계질서 얽매이지 않고 합리적이라면 젠틀맨

잘못 지적받았을 때 고집 부리고 우기는 당신 아재

자기 생각 쿨하게 수정하는 당신 젠틀맨

대한민국 남성, 그 중에서도 중장년층 남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갈수록 싸늘하다. 그들의 삶은 부정당하기 일쑤다. 자상하고 너그러운 ‘아저씨’ 이미지는 간 데 없고 혐오스러운 ‘개저씨’로 비하되고 있다. “오징어는 여자가 찢어야 맛있다” “아기 많이 낳은 순서대로 비례대표 공천을 줘야 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이 대책 없는 사람들을 ‘개저씨’라 부른다. ‘개저씨’는 자신의 지위를 무기로 여성과 약자에게 권력을 휘두른다. 그래서 개저씨라는 말에는 젊은 여성들과 약자들의 분노가 담겨 있다.

당신 개저씨인가, 젠틀맨인가

한국 중년 남성을 개저씨로 만드는 요인은 많다. 가부장제 사회의 뿌리 깊은 남성우월주의, 무례와 성추행에 관용적인 사회 분위기, 인성교육의 부재….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가부장제의 위기적 상황 속에서 또 다른, 거의 파쇼적인 남성우월주의적 심성이 탄생한다”고 진단한다. 그 결과는 약자를 하대하는 권위주의적인 행태, 일상적인 성희롱 발언과 성추행, 데이트 폭력, 쩍벌남·노상방뇨 등 시민의식 실종, 여성비하 발언 등 개저씨 행태로 나타난다.

서열관계를 통한 권력 행사는 편의 차원을 넘어 ‘당연한 것’이 된 지 오래다. 세상에는 강자와 약자, 갑과 을이 있을 뿐이다. 깊어지지도 넓어지지도 못하고 높이 오르는 데만 에너지를 쏟아부은 중장년 남성들에게 남은 건 개저씨라는 조롱뿐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개저씨에 대한 혐오가 넘쳐난다. 다음소프트가 2011년부터 2016년 5월18일까지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개저씨’ 단어는 2011년 159회 등장했으나 지난해엔 7만6766회나 언급되었다. 올해는 5월까지 6만6000회를 훌쩍 넘었다.

역설적이지만 개저씨란 말에는 ‘어른다운 어른’에 대한 열망도 담겨 있다. 여기에 응답하려면 가부장적인 습성, 강자의 갑질, 무례를 벗고 품격을 입어야 한다. ‘젠틀맨’의 미덕에 주목하는 이유다. 젠틀맨은 남성을 지칭하는 가장 고전적이고 존경받는 애칭 중 하나다. 젠틀맨의 타이틀이 긴 세월을 거치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는 명예에 걸맞은 미덕을 갖췄기 때문이다. 젠틀맨의 미덕은 시대에 따라 계속 확장돼왔다. 오늘날은 소통, 공감, 균형, 품위, 절제, 배려 등을 포괄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신사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남성들은 젠틀맨, 젠틀맨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정보기술(IT) 회사에 근무하는 김양수씨(41)는 “전철에서 다른 사람을 터치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취하는 남자, 직장에서 직위 여하를 불문하고 존댓말을 하는 남자”를 젠틀맨이라 말했다.

증권맨 이형범씨(33)는 “여자에게 매너를 지키는 것은 기본이고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대하는 사람”이라며 “젠틀맨은 튀거나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다. “뒤에서 조용히 주변을 챙기기 때문에 오랜 시간 쌓인 평판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것. 김태동씨(36·회계사)의 대답은 보다 구체적이었다. “어려움에 처한 타인을 돕는 데 주저하지 않는 남자, 어려운 상황에서 솔선수범하는 남자가 젠틀맨이죠.” 조직생활을 하는 남성들의 경우 위계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합리적인 업무 처리를 하는 상사에게서 젠틀맨의 모델을 찾는 경향이 강했다.

치과의사 김종수씨(45)에게 젠틀맨은 보다 확장된 개념이었다. 그는 “말은 아끼지만, 상대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필요한 말은 꼭 할 줄 알고,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알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젠틀맨에 칼로 잰 듯한 ‘완벽함’만을 대입하는 것은 아니었다. 경기남부경찰청 김경운 홍보기획계장(41)은 “일과 개인 생활을 잘 조화시키는 사람, 이성적이지만 그 밑에 늘 따뜻한 감정이 있는 사람”을 꼽으면서도 “너무 완벽한 건 매력 없다”고 말했다. 실수나 실패가 있더라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도량을 가져야 신사라는 것이다.

남성들이 젠틀맨의 미덕으로 자주 언급한 단어는 존중, 매너, 예의, 배려 등이었다. 이한상 경일대 교수(37)는 “‘아재’와 ‘젠틀맨’은 누군가의 지적을 받았을 때 명확하게 드러난다”며 “고집을 부리거나 우기면 아재,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면 젠틀맨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이 잘못됐음을 알면서도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억지를 부리는 남자들이 있는데 젠틀맨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태도를 가장 먼저 깨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젠틀맨은 남자라면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쉽게 찾아지지 않는 존재다. 그 틈새를 비집고 ‘아재’들이 뜬다. 친근함이라는 당의정을 입은 아재들이 ‘아재 개그’와 ‘아재 파탈(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아재라는 뜻으로 통용되는 신조어)’이라는 찬사 속에서 꽃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아재가 ‘개저씨’의 탈출구가 될지는 회의적이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 또한 여느 유행 담론들이 그러하듯 곧 지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해 초 남성 월간지 ‘GQ(Gentlemen’s Quarterly)’는 가장 GQ다운 남자 50명을 발표했다. 기준은 “우리가 좋아하고, 옹호하고 지지하는, 유대감을 나누고픈 남자”로 축구선수 기성용, 배우 김래원, 제국의아이들 멤버 임시완, 손석희 JTBC 사장이 상위권을 차지했다. 이충걸 GQ 편집장은 “젠틀맨의 기초는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다. 내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헤아리는 마음. 거창하게 말하면 배려지만, 이건 양식”이라고 말했다.

젠틀맨 이미지는 깨지기도 쉽다. 신 교수는 “일면만 보고 그것을 하나의 속성이라고 판단하다 보니 다른 면에서 봤을 때 쉽게 깨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화이론가이자 미술가인 코디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대표되는 영국의 젠틀맨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도 1980년대까지 돈보다 도덕적 가치를 지키는 선비사상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젠틀맨 개념이 유명무실하게 된 원인을 추적해 가면 미국의 금융자본주의가 나온다고 지적했다. “불과 10~20년 전만 해도 비판의 의미를 담아 속물근성이라는 말을 했지만, 요즘은 아무도 그 단어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속물이기 때문이죠.” 타자 개념에서 보면 속물근성의 반대가 젠틀맨이라는 것이다. 신 교수는 “정형화된 이미지로서의 젠틀맨은 사라졌다”며 “낡은 젠틀맨이라는 이름보다는 글로벌한 인식과 양성평등, 다양성에 대한 수용, 공감 능력을 지향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대한민국 중장년 남성들은 과연 개저씨 오명을 벗을 수 있을까. “타인에 대한 배려를 특별한 가치가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태도로 갖는 남성도 많다”는 신 교수의 말에 희망을 걸어본다.

■당신의 ‘젠틀맨 지수’는

1. 신입사원에게 존댓말을 한다. □

2. 지난 일주일 동안 모르는 사람에게 ‘미안합니다’라고 한 적이 있다. □

3.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행동은 기본 에티켓이다. □

4. 치마 입은 여성과 계단 오를 때는 내가 앞선다. □

5. 주문한 음식이 나오지 않으면 내가 먼저 나서서 확인한다. □

6. 식당에서는 바깥쪽 좌석에 앉는다. □

7. 여직원의 옷차림을 평가하지 않는다. □

8.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내를 마누라라고 부르지 않는다. □

9. 무매너 차량이 끼어들어도 운전대를 잡았을 때는 가급적 욕을 하지 않는다. □

10. “그렇게 얘기하시면 성희롱입니다”라는 얘기를 들으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

11. “3인분 같은 2인분 주세요”라는 주문은 아저씨한테나 재밌는 것이다. □

12. 연령·성별 상관없이 누구와 만나도 5분 이상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


*위 문항 중 10개에 해당하면, 이미 주변에서 젠틀맨이라 불리고 있을 겁니다. 5개 이하라면 무엇이 부족한지 다시 한번 살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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