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애 해수욕장’을 만든 학생들
10년 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수중 휠체어에 탄 송윤호씨(75)는 출렁이는 물결을 만끽하며 두 손을 높이 들었다. “그냥 막 좋았어, 진짜 좋았어요.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지. 날아갈 것 같았지.” 뭍으로 나온 송씨가 환한 웃음을 지었다. 송씨는 2013년 봄 왼쪽 다리를 절단했다. 어린 시절 다친 부위를 제때 치료하지 못해 평생 관절염을 앓았다.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던 송씨는 끝내 절단 수술을 받기로 했다. 통증은 사라졌으나 이제는 누리지 못하게 된 것들이 때때로 그리웠다. 바다가 그랬다.
“어릴 땐 바다가 놀이터였어요. 수영하고, 목욕하고, 낚시도 하고…. (수술하고서는) 가끔 밤에만 가봤지. (사람이 많은) 낮에 가면 나도 물에 들어가고 싶잖아요. 바라보기만 하면 너무 아쉬우니까.”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표선리 표선해수욕장. 총면적 25만1000㎡, 백사장 면적 16만㎡. 제주도에서 가장 넓은 백사장을 가진, 밀물 때면 호수를 연상케 하고 썰물 때는 하얀 모래가 둥그렇게 펼쳐지는 해변. 여름철에는 피서객이 몰리고 주민들도 바다를 쉼터 삼아 살아가는 곳이다. 외지인이건 토박이건, 마음만 먹으면 바다에서 헤엄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여기선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해수욕장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표선고등학교의 학생들은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학교 인권동아리 ‘이끼’ 소속 학생들은 지난 1년간 바다를 모두의 공간으로 돌려놓기 위한 작업을 진행했다. 지역 사회복지관과 힘을 합쳐 ‘무장애 해수욕장’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기업 후원금으로 수중 휠체어와 BF(barrier free·무장애)매트를 들여왔다. 지역 축제 기간에는 휠체어 대여 부스를 설치해 학생들이 안내 요원으로 나섰다.
이들이 직접 바다를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수능 공부를 할 고등학생들은 왜 바다로 달려갔을까. ‘하얀 모래 축제’가 열린 지난 10~11일 표선해수욕장에서 표선고 ‘이끼’ 학생들과 이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기획한 사회복지사 김민석씨(36)를 만났다.
■휠체어 타고 ‘해변 Go’…바다를 바꾸다
“휠체어팀 할 사람?” “설문조사는 누가 맡을래?”
지난 11일 오전 10시. 표선고 학생 10여명이 모인 바닷가 천막 아래는 이른 시간부터 소란스러웠다. 천막에는 ‘해수욕장 휠체어 대여 및 인생한컷 촬영’이라고 쓰인 현수막이 달렸다. 바로 옆 모기장 안에는 수중 휠체어 두 대가 놓여 있었다.
수중 휠체어에는 앞바퀴 1개, 뒷바퀴 2개가 있다. 세발자전거 형태다. 바퀴가 가볍고 폭이 넓어 모래사장 아래로 빨려 들어가지 않는다. 팔걸이 부근에 부표가 달려 물에 뜨도록 설계돼 있다.
“타기 전에 걱정하는 분들도 있는데, 위험한 건 전혀 없어요. 학생들이 직접 (휠체어를) 끌어주기도 하고요.” 김민석씨가 말했다. 김씨는 동부사회복지관 표선센터에서 일하는 11년차 사회복지사다. ‘이끼’ 학생들은 그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김씨는 “카카오가 진행하는 사회공헌 사업에 참여해 받은 지원금 2000만원으로 수중 휠체어 2대(1대당 450만원)와 BF매트(1100만원어치)를 들여왔다”고 했다.
무장애 해수욕장이란 장애인이나 노약자 등 이동 약자들도 제약 없이 바다를 즐길 수 있도록 조성된 해수욕장을 말한다. 동아리가 처음 생긴 때부터 활동한 장동현군(3학년)은 “첫해에는 학교 안에서 이동권 실태조사와 인식개선 캠페인을 진행했다”면서 “학교에서 지역사회로 활동을 확장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대표 관광지인 해수욕장을 바꿔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말했다. “바다에서 장애인을 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면 그런 적이 없는 거예요. 장애인에게 해수욕장은 ‘도전적인’ 장소일 것 같았어요. 불가능해 보였던 게 가능하게 되면 그분들에게도 자신감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표선고 인권동아리 ‘이끼’는 2022년 만들어졌다. ‘이끼’라는 이름은 교통약자와 비교통약자를 ‘잇는다’는 의미의 ‘잇기’를 소리대로 표기해 지었다고 한다. 당시 서울에서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시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시위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연일 온라인을 달구던 때였다.
최지슬양(3학년)은 일찍부터 이동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다. “가족들끼리 친척 납골당에 간 적이 있어요. 사실 그 납골당은 곧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주겠다고 해서 계약했는데, 몇년째 소식이 없었어요. 어쩔 수 없이 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직원분이 실수로 놓친 거예요. 외할아버지가 크게 다치셔서 병원에 입원하시고…너무 놀랐죠.” 최양이 초등학교 4학년 때 겪은 일이다.
“(지하철 시위 등) 장애인 관련 기사를 보면 꼭 달리는 댓글이 있어요. ‘장애인이면 집에만 있으라’는 거예요. 당장 시간만 흘러도 우리는 노인이 되고 자연스럽게 이동이 어려워지는 날이 올 거예요. 사람들은 평생 교통약자가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책 덮고 바다로 갔다… ‘우리 모두’를 위해
이동권 문제를 고민하는 방법과 속도는 저마다 달랐다. 예승휘양(1학년)은 “의미 있는 일을 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을 뿐 이동권에 관해 아는 건 아니었다”면서 “생각보다 많은 교통약자가 이동하는 데 불편함을 겪고 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차차 배워갔다”고 말했다.
엄주현양(3학년)은 장애인들의 지하철 탑승 시위를 바라보는 관점이 이전과는 조금 달라졌다고 했다.
“인권동아리에 들어온 건 학생 인권과 교권 또는 젠더 갈등처럼 대립하는 가치에 관해 토론하는 걸 좋아해서였어요. 사실 교통약자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죠. 그래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어요. 저는 전장연 시위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 중 한 명이었거든요.”
엄양은 “장애인 당사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전장연 시위에 관한 생각이 ‘비난’에서 ‘비판’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비난과 비판의 차이는 ‘어떤 사안을 아는지’에서 비롯되는 것 같아요. 지금도 시위 방식에 대한 의문은 남아 있지만… 1년 전 저는 무조건 싫다고 비난만 했던 것 같아요.”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배움의 과정이 됐다.
표선고는 IB(국제 바칼로레아) 교육과정을 도입한 공립 학교다. 암기식 교육에서 벗어나 토론과 발표형 수업, 논술·서술형 평가를 지향한다. 학생들은 수능 준비에서 자유로운 편이지만, ‘학생인데 괜찮을까’라는 걱정 어린 시선은 어김없이 따라왔다. 홍샛별양(3학년)은 “매주 한 번 야간 자습 시간에 회의하는 것 외에도, 기업 후원금을 받기 위해서는 한 달에 한 번 워크숍에 참석해야 했다”면서 “수업을 빠져야 해서 ‘왜 자꾸 너만 가냐’ ‘수업 보충할 수 있겠냐’ 같은 말도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청소년들이 직접 지역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설 때만 일어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그는 2016년 지역 초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어르신 난방 텐트 사업’을 벌였다. 2018년에는 제주 성산중 학생들과 지자체에 ‘저소득층 중학생 교통비 지원 사업’을 제안해 실현했다. 김씨는 “아이들이 나서면 사람들이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면서 “이번 ‘무장애 해수욕장’ 캠페인도 고등학생들의 활동이기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어른들 답답해서 직접 했습니다!”
‘무장애 해수욕장’ 캠페인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알려지면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지난달 시범 사업이 진행된 이후 엑스(X·옛 트위터)에서는 이런 내용을 담은 게시물이 올라와 2만회 넘게 리트윗됐다. “너무 좋은 아이디어다” “청소년들이 어른보다 낫다” “휠체어 해변은 생각지도 못했다” “제주에 훌륭한 학생들이 많다” 등 호평이 줄줄이 이어졌다.
엄주현양은 사람들의 관심이 반가우면서도 아쉬운 점이 있다고 했다. “당사자의 어려움이 더 알려진다면 좋을 텐데 학생이 주인공이 되는 것 같아서 조금 걱정도 돼요. ‘수중 휠체어’라는 소재가 눈에 띄긴 하지만 표선 거리 자체를 개선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아무리 바다에 휠체어가 있다고 해도, 바다로 오는 길이 불편하면 소용이 없으니까요.”
지난해 ‘이끼’ 학생들이 진행한 표선해수욕장 이동권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백사장으로 가는 경사로가 너무 가파르고 해수욕장 입구 건널목과 화장실 진입로에 높은 턱이 있다는 점 등이 지적돼 있다. 무엇보다 장애인 전용 주차구역이 없다는 점도 문제였다.
이들은 ‘진짜 무장애 해수욕장’을 위해서는 ‘조례 개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지자체의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이 가능하도록 예산 지원의 명시적 근거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이끼’ 학생들이 벤치마킹한 보령시의 대천해수욕장도 ‘충청남도 무장애 관광 환경 조성 및 지원 조례’에 근거해 꾸준히 지원을 받았다. 대천해수욕장은 2016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공모한 ‘열린 관광지’에 선정된 곳이다. 김씨는 “축제 기간 외에는 수중 휠체어를 상시 대여하도록 안내 요원을 배치할 여건도 부족하다”면서 “일회성 캠페인에 그치지 않고 지속 가능한 정책으로 만들어 가는 게 우리의 목표”라고 말했다.
더 큰 변화를 향한 기대도 있다. “우리 시도를 시작으로 사람들이 이동권에 대해 더 고민하고 이야기하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럼 훨씬 많은 것들이 바뀌지 않을까요.”(김예지양·1학년) “중간중간 실패도 있고 무너짐도 있었지만 우리 같은 학생들도 해냈잖아요. 어른들도 끝까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어요.”(홍샛별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