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중국 초마면 본 일본인이 짬뽕이라 불러”…한국 근대를 맛보다

2017.03.17 21:44 입력 2017.03.17 21:51 수정

박찬일 셰프와 인천 음식기행

‘70인과의 동행’ 참가자들이 지난 11일 박찬일 셰프와 함께 인천 차이나타운의 짜장면박물관을 둘러보고 있다. 이곳은 한국에서 최초로 짜장면을 팔았던 ‘공화춘’이 있던 자리로, 이제는 국민음식이 된 짜장면의 탄생과 변천사를 볼 수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70인과의 동행’ 참가자들이 지난 11일 박찬일 셰프와 함께 인천 차이나타운의 짜장면박물관을 둘러보고 있다. 이곳은 한국에서 최초로 짜장면을 팔았던 ‘공화춘’이 있던 자리로, 이제는 국민음식이 된 짜장면의 탄생과 변천사를 볼 수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컵)가 없으면 못 마십니다. 붑빠라붑빠 붑빠빠.”

원로 코미디언 고 서영춘 선생이 불러 유행했던 만담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들으면 고개를 갸웃거릴 테지만, 인천과 사이다를 괜히 연결시킨 것이 아니었다.

박찬일 셰프(가운데)가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마이크를 들고 인천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가 되기 전인 1910년까지 해외에서 유입된 근대적 문물들은 인천항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박찬일 셰프(가운데)가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마이크를 들고 인천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가 되기 전인 1910년까지 해외에서 유입된 근대적 문물들은 인천항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인천에는 1905년 국내 최초의 사이다 공장이 들어섰다. 원래 사이다는 서구에서 사과술을 뜻했지만 일본을 거쳐 들어오면서 탄산음료가 됐다. 1883년 일본에 의해 강제 개항된 이후 수많은 서구문물이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 사이다는 전화·성냥·커피 등과 함께 들어온 대표적인 근대문물 중 하나다.

“서울의 위성도시처럼 전락했지만 인천은 과거에 굉장히 융성한 도시였어요. 경제적으로 부유했고, 역사적으로도 유래가 깊죠. 일종의 역설인데, 인천이 계속 부자도시로 성장했다면 아마 지금의 인천은 없었을 겁니다. 다 재개발돼서 역사의 흔적이 없어졌겠죠.”

지난 11일 ‘글쓰는 요리사’로 잘 알려진 박찬일 셰프는 ‘경향신문 70인과의 동행단’에 인천을 이렇게 소개했다. 처가가 인천이어서 인천을 알게 됐고 사랑하게 됐다는 박 셰프는 은퇴 후 인천에서 살 생각을 하고 있다. 50년 이상 된, 맛있어서 오래된 식당인 노포(老鋪)를 즐겨찾는 그인 만큼 이날 동행은 낡고 오래됐지만 개항 역사와 옛이야기가 숨쉬는 인천 구도심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경인철도의 시발점인 인천역은 옛 시절에는 ‘하인천역’으로 불렸다. 훗날 제물포역이 따로 생겼지만, 인천역 뒤편에 있던 포구가 제물포였다. (지금의 제물포역 근처에는 바다가 없다.) 한적한 어촌이었던 이곳이 북적대기 시작한 건 개항하면서다. 일본이 쌀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인천항에 미두취인소(쌀 시세를 이용해 현물 없이 거래하는 시장)를 만들었고, 서양에서 물 건너온 박래품(舶來品)이 넘쳐났다. 그렇게 돈과 사람이 몰리면서 인천항 일대도 발전했다.

당시 제물포 항구를 상상하기 위해 올림포스호텔로 향했다. 1963년 개장한 이곳은 인천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었다. 1884~1915년 영국영사관이 있던 자리로, 호텔을 등지고 서면 인천 앞바다가 한눈에 펼쳐친다. 130여년 전 박래품이 쏟아지던 항구는 현재 제3세계로 수출되는 중고차의 야적창고로 쓰이고 있다.

‘곰표 밀가루’를 만드는 제분 공장도 이 근처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비쌌던 밀가루 음식은 미국이 한국전쟁 후 유상원조 등을 하면서 서민들도 쉽게 먹을 수 있게 됐다. 박 셰프는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잔치국수는 부자들이 먹는 음식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메밀국수를 만들었다”며 “정치적 이유가 있었지만 미국의 밀가루 원조로 우리가 짜장면, 칼국수, 우동, 국수를 먹고 자랄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역 일대의 근대건축물도 볼거리다. 대로변에는 일본식 주택 ‘나가야’ 형태로 건물과 건물이 빈 공간 없이 줄 서 있다. 대개 1930년대 이후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적산가옥(일본인이 패망 후 두고 간 건물)을 겉만 수리한 것이다. 재미있게도 불과 두 블록 떨어진 차이나타운에는 같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중국식 빨간색 벽돌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당시 이 일대에는 일본과 중국(청나라)의 조계지(치외법권 지역)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차이나타운도 1884년 청나라 조계지로 형성되면서 시작됐다. 한국에 터를 잡은 화교의 99%는 산둥 출신이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인과 함께 들어온 교역상인들이 시초다. 대개는 한국과 중국의 국교가 단절되는 바람에 고향에 갈 수 없게 되면서 눌러앉은 이들이다. 중화요리점이 많은 것도 우리 정부가 외국인의 토지·건물 소유 및 취업을 제한하자 생계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일이었다고 한다.

국내에서 최초로 짜장면을 팔았다는 ‘공화춘’은 현재 짜장면박물관이 됐다. 공화춘은 사실 중국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산동회관’에서 시작됐다. 짜장면을 팔았지만, 여성 접대부가 서비스를 하던 고급 요릿집이었다. 196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짜장면박물관에 들어가면 이젠 국민음식이 된 짜장면의 탄생과 변천사를 볼 수 있다. 박 셰프는 “상업용 춘장이 시장을 석권하기 전에는 중화요리점마다 개별적으로 만드는 짜장이 많았다”며 “(옛날식 짜장면은) 캐러멜 색소를 넣지 않아 지금처럼 새까맣지도 않고, 장이 더 짰으며 단맛이 덜했다”고 말했다.

그는 동행단을 신흥동 ‘신일반점’으로 안내했다. 차이나타운 내 중화요리점들은 옛 맛을 잃은 지 오래라고 했다. 그러나 화교인 고 임서약옹이 문을 연 지 65년 된 노포인 이곳은 요즘도 매일같이 손으로 만두를 빚는다. 만두 모양이 다소 투박하지만 속이 촉촉해 맛있다. 소스가 묻어나오는 탕수육은 시간이 지나도 눅눅해지지 않고 바삭했다.

백미는 ‘백짬뽕’이라 불리는 초마면이었다. 고기 고명을 올려 느끼할 것 같았는데 오히려 개운한 맛이 났다. 원래 짬뽕에는 해물이 들어가지 않았단다. 빨간 국물도 아니었다. 닭뼈와 돼지뼈로 우려낸 뽀얀 국물에 야채를 볶아 얹어먹던 초마면을 일본인들이 보고 자기네 나가사키 짬뽕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게 박 셰프의 설명이다. 여기에 1960년대 인천에서 한국인 입맛에 맞춰 해산물을 넣고 매운맛을 가미하면서 지금의 짬뽕이 탄생한 것이다.

짜장면에는 큼지막한 계란 후라이가 얹어져 나왔다. 박 셰프는 짜장면을 한 젓가락 입에 넣더니 “짜장을 잘 볶았다. 볶은 향이 난다. 면도 부드럽다”며 감탄했다. 그렇다면 짜장면을 먹을 때 고춧가루를 쳐야 할까. 그는 “맵게 먹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짜장의 기름진 맛을 감해줘 더 맛있다”고 말했다.

차이나타운 옆 밴댕이 골목도 박 셰프가 손꼽는 인천의 명물이다. 지금이야 쇠퇴했지만, 개항과 함께 인천으로 몰려든 부두 노동자들과 인근 산업시설 노동자들이 일을 끝내고 목을 축이던 곳이다. 가게에선 당시 싼 생선이던 밴댕이와 병어를 근처 어시장에서 사다가 굽거나 회로 쳐서 팔았다. 골목 초입에 있는 ‘수원집’이 가장 오래됐다.

인천을 대표하는 음식은 많다. 그물에 걸리면 물에 텀벙 버렸다고 해서 ‘물텀벙’이라고 불리는 아귀찜 골목이 논현동에 있다. 주꾸미나 병어 조림은 북성포구 입구에 남아 있는 너덧 집들이 잘한다고 한다. 신포동 일대에는 스지(소 힘줄)탕을 잘하는 ‘다복집’과 박대구이가 유명한 ‘신포주점’ ‘대전집’ 등 오래된 선술집도 있다. 신포시장 입구에 있는 신포과자점에서 파는 오란다 같은 옛날 과자도 별미다. 박 셰프는 “인천이 오래전 부유했던 도시라는 흔적이 시내 곳곳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지어진 물류창고를 개조해 만든 한국근대문학박물관. 김소월, 염상섭, 채만식 등 한국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문인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일제강점기 지어진 물류창고를 개조해 만든 한국근대문학박물관. 김소월, 염상섭, 채만식 등 한국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문인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근대 개항기를 엿볼 수 있는 곳들도 수두룩하다. 한국근대문학관이 대표적이다. 1892년과 1941년 지어진 물류창고를 개조해 만든 이곳에는 김소월·염상섭·채만식·한용운·나도향·현진건·정지용·백석 등 한국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문인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최남선이 일본 철도창가를 본떠 만든 <경부철도노래>(1908년)도 단순히 글자로 보는 게 아니라 귀로 들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왜 인천에 한국근대문학관이 들어선 걸까. 함태영 한국근대문학관 학예연구사는 “인천은 근대의 실험실이었다”는 말로 설명했다. 일제 식민지가 되기 전인 1910년까지 인천항을 통해 근대적인 제도들이 들어와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근대적인 모든 게 시작된 인천에서 한국근대문학 100년을 조망한다는 취지다.

문학관 일대는 개항기 때 일본 조계지였다. 당시 주변에 줄지어 있던 제1은행, 제18은행 등 일본 은행들은 현재 인천개항박물관과 인천개항장근대건축전시관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 길을 걷다보면 일본풍 목조건물이 늘어선 개항장이 나온다. 적산가옥의 분위기는 살리면서 상점이나 카페로 바꾼 모습이었다. 과거와 현재, 근대와 현대가 접목된 공간이다.

박 셰프는 인천의 옛 정취가 남아 있는 곳들을 소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중국인과 일본인에게 밀려 조선인 상권이 형성됐던 곳들이다. 신포시장에서 싸리재로 넘어오는 길에는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인 애관극장이 있다. 이 근방은 양복점이 즐비했을 만큼 멋쟁이들이 찾는 번화가였다. 지금은 애관극장도, 양복점 거리도 사람의 발길이 뜸하다.

애관극장에서 배다리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지명을 그대로 딴 ‘싸리재’라는 카페가 있다. 원래 1910년대에 지은 전통 ㅁ자 한옥인데, 1930년대에 절반만 일본식 건축양식으로 증축한 곳을 다시 개조했다고 한다. 인천 토박이인 주인이 106년 된 나팔 축음기로 아날로그 음악을 들려주자, 동행단들은 눈을 감고 허밍으로 노래하기도 했다.

고향이 부산이라는 이길현씨(60)는 “아무래도 인천하면 부산보다 처지는 항구도시라고 생각했다”며 “너무 가까워서 그랬는지 본래 가치를 제대로 몰랐던 것 같다. 다음에 개항기를 다시 공부해 혼자 인천여행을 와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박 셰프는 “인천처럼 유서깊은 곳은 서울 피맛골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잘 개발하고 아껴야 한다”고 말했다.

[명사 70인과의 동행] (38) “중국 초마면 본 일본인이 짬뽕이라 불러”…한국 근대를 맛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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