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학들 ‘활용가능 범위·한계 규정
한국 대학들도 챗GPT 지침 고민 중
“챗GPT, 계산기 같은 학습 보조수단”
글쓰기 능력·지적 역량 양극화 등은 우려
“우리 학교는 2년 전부터 인공지능 고등학교로 선정돼 관련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번 학기 초 챗GPT의 확산은 정말 빨랐어요. 새 학기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챗GPT를 활용해 자기소개를 간단히 작성하고 달리(DALL·E: 인공지능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로 그에 맞는 이미지를 생성해 발표하도록 한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학생들도 챗GPT를 잘 알고 활용하고 있고요. 현재 동아리 선발 기간 중인데 학생들이 지원자들의 지원 동기를 챗GPT에 집어넣고 사람이 쓴 것인지 인공지능이 쓴 것인지 검증하려는 시도까지 하더라고요.”
이왕렬 선린인터넷고 교사가 14일 서울 마포구 이화여대에서 열린 ‘제6차 디지털 인재양성 100인 토론회’에서 소개한 사례다. 지난해 말 챗GPT가 등장한 뒤 첫 새 학기를 맞아 교육현장에서 챗GPT와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AI) 기술의 활용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학기 체계가 한국과 다른 해외 대학들은 챗GPT 관련 규정을 이미 상당히 정비했다. 한국 초중고와 대학들도 바람직한 챗GPT 활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정제영 이화여대 미래교육연구소장은 이날 발표에서 챗GPT 관련 해외 대학 동향을 소개했다. 미국 대학들은 대체로 챗GPT의 활용을 피할 수 없다고 보고 활용 가능 범위와 한계 등을 교수가 명확히 하도록 지침을 세우고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은 수업에 챗GPT의 사용 가능 여부와 허용 가능 방식을 확실히 명시하도록 하고, 과제 구성 시 챗GPT가 답할 수 없는 종류의 과업을 요청하거나 출처를 표기하도록 하는 규정도 만들었다. 예일대는 AI 도구를 제한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강의계획안에 챗GPT 활용 가능 여부를 명시하고, 불가능할 경우 반드시 기재하도록 했다. 워싱턴대는 교수진들이 고등교육 수준의 학습이 중요한 이유, 노력이 학습의 한 부분이라는 점 등에 대해 학생들과 소통을 많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서는 아직 대학이나 교육당국 차원에서 관련 지침이 다듬어지지는 않았다. 학계에서는 챗GPT를 계산기와 같은 학습 보조수단으로 활용하면 창의적 사고력을 키울 수 있다는 전망부터 일부 영역에서는 챗GPT 활용을 제한해야 한다는 지적까지 다양한 의견이 엇갈린다고 정 소장은 말했다. 정 소장은 “엄밀한 과학적 프로세스를 입증하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글쓰기를 사용하는 이공계열과 달리 글쓰기 자체가 중요한 학습 과정인 인문·사회계열에서는 학생들의 능력 함양에 대한 우려가 충분히 타당하다” “계산기가 처음 도입될 때 수리능력에 문제가 생길 거란 우려가 무색하게 인류는 단순 계산에 머물지 않고 고차원적인 수학적 논리를 키우고 있다” 등 일선 교수들의 의견을 소개하기도 했다.
토론회 현장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챗GPT를 교육현장에 적용될 새로운 도구 중 하나로 인정해야 한다면서도 부작용 없이 활용하기 위해서는 판단력과 실제 문해력, 자기 주도적 학습역량 등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는 발제문에서 “기본 계산 역량을 갖춘 학생에게만 계산기 사용을 허용하듯이, 생성 AI 의존성을 줄이면서 효과적으로 활용하게 하려면 체계적 글쓰기 역량을 먼저 기르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당국이 챗GPT 출현으로 예견되는 문제들에 미리 대비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도 나왔다. 박 교수는 “열악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하고 교사도 열정적이지 않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즉답 AI에 의존해 과제를 수행할 가능성이 큰데 그렇게 되면 이 학생들의 문제 발견과 이해력, 자료 분석, 비판, 창의적 아이디어 생성 등의 고급 지적 역량이 길러지지 않거나 퇴보할 수 있다”며 “학생들의 전반적 지적 역량 약화뿐 아니라 계층 간 양극화 발생 가능성에 대해서도 미리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왕렬 교사는 “앞서 메타버스가 주목받았을 때 교육당국에서 사용 연령에 대한 지침을 너무 늦게 내려보내는 바람에 이미 메타버스를 교육과정과 각종 활동에 적용했던 학교 현장에 혼란이 있었다”며 “챗GPT 사용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빠르게 학교 현장에 알려졌으면 한다는 의견을 드린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 출범한 디지털 인재양성 100인 토론회는 시도교육청과 대학, 학회, 연구기관, 교사연구회, 관련 산업협회 전문가와 학생·학부모 등으로 구성됐다. 디지털 역량을 갖춘 미래인재 양성방안 등에 대해 논의하는 행사를 지금까지 6차례 열었다. 나주범 교육부 차관보는 “앞으로 챗GPT 등 디지털 신기술에 민첩하게 대응하고 교육현장에서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