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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전

한국 1세대 여성 사진작가 박영숙부터 ‘땡땡이 호박’으로 유명한 구사마 야요이, 비디오 아티스트이자 백남준의 아내인 구보타 시게코, 필리핀 독재에 저항한 여성 예술가그룹 카시불란. 1990년대 페미니즘 미술을 주도하고 세계적 작가에 오른 이불까지….

아시아의 ‘센 언니’들이 다 모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접속하는 몸-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전시에서다. 아시아 11개국의 60여 팀의 여성 작가들의 130여 점의 작품을 한데 모았다. 주제가 주제인만큼, 강렬한 작품들로 가득 채워진 전시다.

이들이 그려내는 ‘여성의 몸’은 여성적 신체에 대한 통념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마녀, 투사, 노동자, 괴물, 여신 등으로 변신하며 여성의 몸에 기입된 사회적·문화적 고정관념과 성역할을 비틀고 벗어던지고 해체한다. 1960년대 이후 주요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을 조망하는 전시로 도쿄도현대미술관, 필리핀국립미술관, 미국 버클리미술관 등 국내외기관의 소장품을 대여하고, 그간 잊혀졌던 국내 작가들의 구작들을 발굴했다. 구보타 시게코의 비디오 조각 ‘뒤샹피아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미쓰코 타베의 ‘인공태반’ 등 국내에 최초 전시되는 작품들, 국내외 작가들의 신작들도 볼 수 있다.

전시를 여는 것은 박영숙의 ‘마녀’ 등 사진 연작이다. “중세 ‘마녀사냥’에 충격받아 페미니스트 되다”라고 쓴 박영숙은 과거 마녀라는 이름으로 사라졌던 여성들을 재소환한다. 류준화의 1992년작 ‘붉은색 살고기’와 ‘아메리카의 멸망’은 32년 만에 빛을 봤다. 작업실 구석에 둘둘 말린채 보관됐던 작품을 발굴, 복원처리해 공개했다.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문화를 비꼰 작품으로 여성의 신체를 참치의 살코기에 빗댔다.

필리핀의 참여적 여성 예술가그룹 ‘카시불란’에 소속된 이멜다 카지페 엔다야가 ‘돌봄을 이끄는 이들의 자매애를 복원하기’ 작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영경 기자

필리핀의 참여적 여성 예술가그룹 ‘카시불란’에 소속된 이멜다 카지페 엔다야가 ‘돌봄을 이끄는 이들의 자매애를 복원하기’ 작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영경 기자

“WOMAN POWER CAN STOP THE NUCLEAR PLANT.” 강렬한 대문자와 함께 아이를 안고 주먹을 불끈 쥔 여성이 강렬한 눈빛을 뿜는다. 필리핀 독재정권에 저항한 여성 예술가들의 모임인 ‘카시불란(여성과 미술의 새로운 의식)’ 소속 작가인 이멜다 카지페 엔다야의 작품이다. 1980년대 필리핀에서 건설하던 핵발전소 반대 운동을 다뤘다. 엔다야의 ‘돌봄을 이끄는 이들의 자매애를 복원하기’도 함께 볼 수 있는데, 스페인 식민지배에 저항한 비밀 조직 카티푸난 조직원들의 아내, 어머니, 딸 등 여성 연대에 대한 내용을 담은 대형 설치작품이다.

카시불란과 비슷한 시기인 1988년 설립된 페미니즘 미술 단체인 여성미술연구회 소속 윤석남, 정정엽, 김인화의 작품들과 함께 감상할 수 있어 아시아 여성 예술가들의 고민을 비교하며 볼 수 있다. 정정엽 ‘나의 작업실 변천사 시리즈’는 1985년부터 2017년까지 작업실을 15번 이사한 과정을 20장의 그림으로 기록한 작품으로, 젊은 여성 작가가 고군분투하며 작업을 이어나간 역사를 지켜볼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 미츠코 타베의 ‘인공태반’ 뒤로 이미래의 ‘봐라, 나는 사랑에 미쳐 날뛰는 오물의 분수’가 전시돼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 미츠코 타베의 ‘인공태반’ 뒤로 이미래의 ‘봐라, 나는 사랑에 미쳐 날뛰는 오물의 분수’가 전시돼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섹슈얼리티를 다룬 2부는 강렬한 작품들이 본격적인 각축을 벌인다. 배를 가르고 피를 흘리는 이미지, 오줌으로 만든 작품 등 사회적 금기를 넘어서고 여성의 성과 재생산, 섹슈얼리티에 대한 규범에 의문을 던지는 작품들이 선보인다.

내장과 생식기가 얽힌 거대한 덩어리로 보이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장파의 ‘여성/형상: Mama 연작’ 앞에 이미래의 ‘봐라, 나는 사랑에 미쳐 날뛰는 오물의 분수’가 설치돼 있다. 장파의 작품이 여성을 성적대상화하거나 모성으로 치환하는 여성에 대한 전형적 이미지를 비꼬고 해체한다면, 이미래는 성에 대한 노골적 표현과 잔혹한 표현을 구사한 김언희 시인의 ‘오지게, 오지게’의 한 구절을 인용해 여성의 욕망을 이야기한다.

이불 작가의 ‘아마릴리스’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불 작가의 ‘아마릴리스’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카시불란 소속 작가인 아그네스 아렐라노의 ‘풍요의 사체’는 작가의 제왕절개 경험에 기반해 출산의 고통과 파괴가 창조로 이어지는 필리핀 신화를 연결한 작품을 선보인다. 장지아 작가는 ‘오줌 픽서’를 이용해 인화한 사진 ‘고정된 오브제’와 오줌에 소금을 섞어 끓인 결정체를 이용한 조각 ‘픽세이션 박스’를 선보인다. ‘땡땡이’로 유명한 쿠사마 야요이의 초기 영상작품 ‘쿠사마의 자기소멸’(1967)에선 쿠사마가 강박적으로 점을 그리기 시작한 순간을 엿볼 수 있다. 인간, 동물, 식물에 점을 붙이고 그리는 쿠사마의 행위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 여성과 남성 등 이분법이 흐려진다.

오노 요코, 구보타 시게코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존 레논의 아내’ ‘백남준의 아내’라는 수식어를 떼고 예술가로서 그들의 작품과 대면한다. 구보타의 ‘뒤샹피아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는 한국에 처음 선보이는 작품이다. 마르셀 뒤샹의 회화를 비디오 매체를 통해 재현한 것으로 서구 남성 중심 미술사에 대한 도전을 담고 있다. 오노 요코의 ‘컷 피스’는 관람객들이 무대 위의 예술가의 옷을 가위로 자르게 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인간의 폭력성, 여성에 대한 폭력 등을 가시화한다.

전시는 ‘마지막 한 방’을 숨겨놓았다.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정은영과 키라라의 작품은 놓치지 않는 게 좋다. 트랜스젠더 뮤지션인 키라라와 정은영이 협업한 작품으로, 전시의 대전제인 ‘여성’이란 단일한 범주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품이다. 전자음악의 강렬한 비트 속에 키라라의 ‘진짜 목소리’를 숨겨놓았다. 헤드폰을 껴야만 들을 수 있는 ‘시켜서 만든 음악’엔 “나도 이런 예술 작품에 참여한다고 여성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나는 여성이란 두 글자 안에서 안전했던 적이 한 번도 없는데”와 같은 키라라의 독백이 흐른다. 음악 속에 숨은 키라라의 목소리는 성별이분법적 사회속에 비가시화된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환기시킨다. 전시는 내년 3월3일까지.

▼ 이영경 기자samemind@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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