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을 고쳐 쓸 수 있을까 : 수리할 권리

2022.06.22 14:43

※경향신문의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링크) 6월 22일자에 게재된 글입니다. 뉴스레터에는 해당 주제에 대해 추가로 읽을만한 책과 글 소개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편의 글로 하나의 깊은 영감을 드리는 〈인스피아〉를 구독해 주세요. 혹시 링크가 연결되지 않으면 괄호 안의 주소(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07426)로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직접 컴퓨터나 라디오, 핸드폰 등을 고쳐본 적이 있으신가요?

어렸을적 어른들이 TV나 믹서기 등이 잘 작동하지 않으면 설명서를 가져와보라고 하시던 것이 기억납니다. 기계에 달린 설명서, 해부도를 참고해보면 작은 고장들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재미난 게임을 할 수 있는 컴보이나 카세트 테이프도 고장이 자주 났기 때문에 항상 육각연필, 작은 드라이버, 지우개, 알콜솜 등의 공구(?)를 서랍에 두기도 했죠. 사소한 고장 정도는 ‘어쨌든 투닥투닥 해보자’는 태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끔 욕심이 앞서는 바람에 기계를 엉망으로 만들기도 했지만요.

옛날 기사들을 보다보면 과학자, 발명왕의 어린시절을 묘사할 때 “온 집안의 기계를 죄다 뜯은 뒤 다시 조립하며 놀았다” “기계가 고장나면 일단 무조건 분해해보았다” 등의 말이 단골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1959년에 국내 최초로 생산된 만들어진 금성의 라디오 A-501모델. (왼쪽) 지난해 새로 출시된 맥북 프로 노트북. 금호라디오박물관 / 애플

1959년에 국내 최초로 생산된 만들어진 금성의 라디오 A-501모델. (왼쪽) 지난해 새로 출시된 맥북 프로 노트북. 금호라디오박물관 / 애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턴가 예쁘고 새로운 기계들이 ‘신묘한 블랙박스’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1kg도 안되는 가벼운 노트북, 태블릿, 이음매 없이 물고기처럼 미끈한 스마트폰은 내가 뜯어볼 수 있는 무언가라는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았죠. 보증 기간이 남아있으면 AS센터에 가거나 버리고 차라리 새것을 사는 습관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어쩔 땐 심지어 고장나는 걸 기다리게 될 정도로 눈을 사로잡는 신기한 신제품은 빠르게 쏟아져나오고 있습니다.

지난 3일(현지시간) 미 뉴욕주가 포괄적인 ‘수리할 권리(Right to repair)’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수리할 권리가 다시금 크게 주목받고 있는데요. 지난해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직접 행정명령을 내리는 등 수리할 권리 요구가 높아지자, 지난 4월 말 애플은 소비자가 아이폰 등을 직접 수리할 수 있는 키트 대여 서비스를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수리할 권리란 무엇이며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오늘은 ‘기계 덕후’로 유명한 물리학자 볼프강 M. 헤클이 쓴 책 <리페어 컬쳐>와 최신 유튜브, 소식 등을 지팡이 삼아 ‘수리할 권리’에 대해 해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수리권’이 왜 필요해?

“현재 대부분의 제품들이 실제 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상태로 시장에 출시되고 있는 상황이다-Mark Miodownik(빅 리페어 프로젝트,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교수)”

‘수리할 권리’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물건이 고장나면 회사 AS나 전용 부품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자유롭게 물건을 스스로 고칠 수 있는 권리가 핵심인데요. 이 밖에도 수리 가능하고, 내구성이 높은 제품을 구입하는 걸 선택하는 권리를 넓게 일컫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튼튼한 핸드폰을 구입할 권리, 핸드폰이 고장났을 때 꼭 값비싼 부품이나 서비스를 기다리지 않아도 적정한 값과 노력으로 쉽게 고칠 수 있는 권리 등이죠.

최근 점차 신제품들의 부품값, 수리비용이 비싸지고 제품 내구도가 낮아지는 등 제조사들이 소비자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높아지고 있는데요. 이에 전세계 소비자들은 ‘수리할 권리’를 활발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지난해 영국이 수리할 권리 법안을 통과시켰고요. 프랑스는 2020년 스마트폰, 노트북 등 전자기기 제조업체들이 수리가능성 지수(1~10단계)를 표기하도록 법으로 정했습니다. EU도 2020년 신순환경제 실행계획을 발표하면서 소비자의 ‘수리할 권리’를 언급하기도 했죠.

애플의 수리 키트를 이용해 아이폰을 고치고 있는 장면(왼쪽). 온갖 종류의 브랜드, 제품의 수리 방법 등을 제공하는 수리할 권리 사이트 IFIXIT의 메인 화면. IFIXIT은 수리권 관련 다양한 입장, 팁 영상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애플의 수리 키트를 이용해 아이폰을 고치고 있는 장면(왼쪽). 온갖 종류의 브랜드, 제품의 수리 방법 등을 제공하는 수리할 권리 사이트 IFIXIT의 메인 화면. IFIXIT은 수리권 관련 다양한 입장, 팁 영상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수리할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래 두 가지 이유에서 수리할 권리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1.소비자가 돈을 아낄 수 있다!

2.함부로 버리지 않기 때문에 쓰레기를 줄일 수 있다!

우선 첫번째 이유는 곰곰 들여다보면 비교적 쉽게 이해가 됩니다.

만약 자동 비눗방울 기계가 있는데 비눗물을 채우는 통만 부서져서 비눗방울을 만들지 못하게 된다면, 고장난 통만 교체하는 것이 가장 돈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이겠죠. 우리가 “물건이 고장났다”고 말할 때 아주 불행한 우연의 연쇄가 아닌 이상(노트북 자판 위로 커피를 쏟는 동시에 화분이 날아와서 모니터를 깨부수고 곧 이어 고양이가 앞발로 쳐서 책상 밑으로 떨어트리는 등), 대체로 한가지 부품이 고장이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부품 고장도 아니고 단지 단자나 연결이 살짝 어긋나는 경우도 아주 많고요.

그런데 만약 제품들이 해부 자체가 불가능한 디자인으로 출시되거나(물통 일체형 비눗방울 기계), 아주 작은 고장이라도 매번 AS센터에 가서 굳이 비싼 정식 부품을 사야지만 수리가 가능하고, 소모품 혹은 부품이 단종된 경우 우리는 굳이 ‘작은’ 고장 때문에 매번 새 제품을 사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사람들이 더 고쳐 쓰면 덜 버리니까 환경에도 도움이 된다는 건데요. 미국 공익 연구단체 US PIRG에 따르면 매년 전세계에서 스마트폰 100억개를 생산하고, 5억9000만톤의 전자제품이 버려진다고 합니다.

우리가 만약 전자제품을 잘 수리해서 오래오래 쓸 수 있다면 이런 전자 쓰레기를 크게 줄일 수 있겠죠.

2020년 1월 방학숙제로 ‘미래엔 핸드폰 배터리를 교체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신묘한(?) 아이디어를 내놓은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의 글. 이 질문은 그 엉뚱함으로 인해 성지가 되었는데요. 곰곰 생각해보면, 애초에 배터리가 분리되는 편이 사용자에게 있어선 진보인 것이 아닐까요? (왼쪽·링크) 중국의 전자제품 쓰레기의 산. ⓒ네이버 지식인 화면 갈무리 / Guardian

2020년 1월 방학숙제로 ‘미래엔 핸드폰 배터리를 교체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신묘한(?) 아이디어를 내놓은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의 글. 이 질문은 그 엉뚱함으로 인해 성지가 되었는데요. 곰곰 생각해보면, 애초에 배터리가 분리되는 편이 사용자에게 있어선 진보인 것이 아닐까요? (왼쪽·링크) 중국의 전자제품 쓰레기의 산. ⓒ네이버 지식인 화면 갈무리 / Guardian

한편 이 밖에도 지식의 공유 차원에서도 ‘수리할 권리’가 강조되기도 합니다. 수리할 권리를 위해선 반드시 기계에 대한 자세한 정보 및 작동법이 공개되어야 하니까요.

애플의 공동창업자이자 애플 컴퓨터를 개발한 전설적인 엔지니어 스티브 워즈니악은 지난해 7월 Cameo1)에서 수리할 권리를 옹호하며 “내가 어렸을 때 라디오 등 모든 전자기계들은 해부도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완전히 오픈소스였다”며 “만약 내가 오픈된 기술, 기계 생태계를 누리지 못했다면 결코 애플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수리할 권리는 비단 해외에서만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1월 대선 국면에서 이재명 당시 대통령 후보가 ‘소확행’ 공약 중 하나로 소비자 수리권을 제시하기도 했고요.강은미 정의당 의원은 ‘수리할 권리에 관한 법률’을 대표 발의하는 등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왜 수리하지 못하는가 : <리페어 컬처>

볼프강 헤클의 <리페어 컬처>는 수십년 된 기계도 직접 뜯어서 고쳐야 직성이 풀리는 기계 덕후 물리학자가 쓴, 고치는 것 보다 새걸 사는 게 간편한 우리 시대에 ‘수리해서 쓴다는 것’의 의미를 고찰한 에세이입니다.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평소 자기 집의 아주 작은 전등이나 전동칫솔, 라디오부터 수영장 펌프, 오토바이 등 모든 것을 직접 고쳐온 사람인데요. 친구, 동료들과 함께 ‘수리 동호회’도 만들고 1920년대에 제작된 기계를 사들여 직접 관리할 정도로 열정적인 기계광입니다.

그런데 그는 세월이 흐를수록 이런 ‘수리 열정’을 발휘할 수 없는 기계들에 맞닥뜨리며 당황합니다. 점차 기업들이 부품을 단종시키거나, 아예 수리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기계를 만들어놓아서 소비자가 새 제품을 살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면 수영장 펌프의 작은 부품 하나만 바꾸면 될 것을 부품 자체를 단종시켜서 수십만원짜리 펌프를 새로 사게 만든다든지(결국 그는 수소문 끝에 20년된 펌프의 작은 부품을 구해서 셀프 수리에 성공하긴 합니다), 전동 칫솔의 배터리를 교체하려면 본체를 톱으로 썰어야 해서(...) 배터리가 다 닳으면 칫솔을 버리고 새것을 사야하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얘기를 읽다보면 꽤 낭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사실 이런 제품 기획을 일컫는 용어로 ‘의도적 노후화(혹은 계획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라는 게 있습니다. 1920년대 제너럴모터스의 회장을 지낸 알프레드 슬론Alfred P.Sloan이 만든 개념인데, 소비자들이 더 많은 제품을 사게 하기 위해 일부러 기계를 쉽게 고장나게 만들거나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진부해보이도록 하는 것이죠.

20세기 초반엔 재봉틀, 스타킹이 너무 ‘튼튼’해서 잘 팔리지 않자 의도적으로 부품을 허술하게 만들거나 잘 찢어지게 만들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알프레드 슬론)는 자동차에 변화를 주어 고객들이 더 빨리 새 차를 사도록 유도하라고 지시했다[...]그들은 부러 품질이 떨어지는 자재를 사용해서 제품의 내구성을 낮췄다. 오늘날에는 최적의 수익구조를 내기 위해 수명을 제한하는 요소들을 더 먼저 계산에 넣는다.

- -볼프강M.헤클, <리페어 컬처>(이하 동일)

한편 저자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개인 소장품인 1960년대 핸드마사지기를 소개했는데요. 만들어진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여전히 손잡이에 튼튼한 하늘색 인조가죽을 씌운, 교체 가능한 솔이 달린 기계는 멀쩡하고 멋졌다고 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시대가 흐르고 기술력이 높아질 수록 제품의 내구성이나 성능이 함께 좋아질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것이 어쩌면 허상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엄청나게 튼튼하고 투박한 전등을 만들어서 평생 전등 하나만 갖고 쓴다면 기업들에게는 손해일테니까요.

적당히 유행도 빨리 바뀌고(‘멀쩡한데 촌스러워’), 신상을 소개해 결핍감을 만들고(‘요새 스타일러 없는 집도 있어?’), ‘때마침’ 제품도 고장나서 소비자에게 ‘지름의 명분’을 만들어줘야 경제가 활발히 돌아갑니다.

미국의 대형 트랙터 회사 존 디어는 트랙터가 고장날 경우 단순한 고장에도 농부들은 오랫동안 공식 수리를 기다리다 귀중한 수확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에 일부 농부들은 직접 트랙터 시스템을 ‘해킹’해 스스로 수리하는 것을 시도하고 있습니다(왼쪽·영상) 코로나 시기 의료기기가 고장나도 공식 AS를 받기 위한 절차가 복잡해 피해가 속출하기도 했습니다. VICE 유튜브 갈무리 / shutterstock

미국의 대형 트랙터 회사 존 디어는 트랙터가 고장날 경우 단순한 고장에도 농부들은 오랫동안 공식 수리를 기다리다 귀중한 수확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에 일부 농부들은 직접 트랙터 시스템을 ‘해킹’해 스스로 수리하는 것을 시도하고 있습니다(왼쪽·영상) 코로나 시기 의료기기가 고장나도 공식 AS를 받기 위한 절차가 복잡해 피해가 속출하기도 했습니다. VICE 유튜브 갈무리 / shutterstock

‘수리할 권리’는 ‘의도적 노후화’의 반대편에 있다고 할만합니다. 왜냐면 누구나 자유롭게 고장난 물건을 고칠 수 있다면 더 이상 물건이 잘 팔리지 않을테니까요.

스스로 수리할 권리가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비자가 받는 실제 피해들도 막대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 팬데믹 상황에서 제품 수리가 제한되어서 고장난 의료기기를 고치지 못해 난처한 경우가 생겼다고 합니다. 간단한 걸쇠가 고장나도 공식 AS를 맡기느라 몇달간 기계를 쓰지 못하게 되었죠. 이 경우 환자의 목숨이 오갈 수 있어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링크) 그리고 미국의 트랙터 제조업체인 존 디어 역시 오로지 AS를 자사 전문가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해, 수확 시기를 놓쳐 굉장히 큰 타격을 받게 되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헤클은 일부 부품을 제외하곤 멀쩡한 수영장 펌프의 부품이 없어 못 고친다는 상담직원의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20년간 아무 탈없이 작동한 펌프를 제조사가 그전 모델보다 더 나은 점이 하나도 없는 다른 모델로 바꾸면서 그전 펌프와 호환도 되지 않게 만들었다면, 이는 곧 기형적인 시장경제의 본보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핸드폰을 충전할 때 쓰는 다양한 모양의 커넥터만 생각해봐도 그렇고, SCSI, USB, 파이어와이어, 선더볼트 등 수없이 많은 데이터전송 케이블 규격도 마찬가지다.

즉, 이상의 이야기로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조업체가 돈을 많이 벌려면 사람들이 물건을 많이 사야 합니다. 튼튼하고 잘 고칠 수 있다면 덜 팔립니다.

이 때문에 그간 제조업체들은 ‘수리할 권리’에 부정적이었던 것이죠. 실제 애플 등의 세계적 제조기업들은 수리할 권리에 대항해 오랜 기간 반대 로비를 해온 것이 밝혀져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기계를 파악하기, 돌보기


볼프강 헤클은 <리페어 컬처>에서 ‘의도적 노후화’에 대한 지적 외에도 ‘세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게 해주는 수리의 가치’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작은 기계를 뜯어보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파악하는 걸 통해 우리는 세계의 작동 원리를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이는 기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점차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복잡해져만 갑니다. 세상이 더욱 ‘최첨단’이 될수록 우리는 각자 좁은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어떤 전문가도 자기 바깥의 세계를 파악하고 커다란 이야기를 ‘감히’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개미 발바닥만한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대부분의 것들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으니까요.

제가 <리페어 컬처>를 읽으며 인상적으로 느꼈던 부분은, 수리할 권리와 세계의 작동 원리를 파악하는 능력-안목을 연결한 대목이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과거 전문가들이 쓴 기계 책 가운데선(오이겐 네스퍼, <아마추어 무선 방송(1923)> 등) 일반인들도 알기 쉽게 과학적 원리를 설명해놓은 책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최근 나오는 기계 책들은 더이상 일반인들에게 말걸지 않습니다.

헤클은 ‘수리가 불가능한 사회’란 결국 지식이 서로 대화할 수 없는, 모두가 숲 대신 나무만 보는 닫힌 사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부품 하나를 용접하는 일만 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물의 전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안목을 가지기도 힘들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물론 전문가들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어떤 사물이 생겨나고 그것이 사라지는 과정을 개괄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리페어 컬처>를 쓴 볼프강 헤클의 개인 작업실. 그는 FAZ와의 인터뷰에서 리페어 문화의 가치를 강조하며 “우리는 우리의 앞에 있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FAZ

<리페어 컬처>를 쓴 볼프강 헤클의 개인 작업실. 그는 FAZ와의 인터뷰에서 리페어 문화의 가치를 강조하며 “우리는 우리의 앞에 있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FAZ

나아가 우리가 ‘숲’을 볼 수 있다면 우리를 둘러싼 상황에 대해서도 더 책임감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헤클은 이에 대해선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리페어 컬처는 지식과 능력, 분석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지만 또한 삶의 지혜와 가치관 그리고 무엇보다 세심함에도 기초하고 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물질적인 것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곧 인간으로서의 나에 대해서도 뭔가를 말해준다. 예를 들어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자기 소유도 아니고 어차피 또 이사도 가야 하니 함부로 방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기후 변화에 대해서도 ‘나중에야 어찌 되든 내 알바 아니다‘라는 식의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이제 건강을 이야기할 때 ‘예방’ 의학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병이 걸리기 전에 미리미리 작은 점검과 유지보수를 통해 몸을 오래 건강하게 쓰자는 것이죠.

그런데 세탁기나 냉장고, 에어컨 등의 기계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걸 문득 깨달았습니다. 애초에 기계는 유통기한이 있는, 티슈처럼 뽑아 쓰고서 언젠간 쉽게 버릴 무언가로 생각하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진 것이죠. 물론 기계 뿐 아니라 가구 등의 많은 물건들도 마찬가집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조금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간 내 몸을 돌보고 화분을 돌보았지만, 세탁기를 돌보고 밥통과 에어컨을 돌보는 일(?)엔 너무도 무심했던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요.

기계를 돌본다 말이 좀 묘하단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지구를 오래 쓰는 일을 궁리하면서 우리 주변에서 가장 친숙하게 많이 쓰는 것들에 대해선 오래 쓰는 일과 책임을 궁리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요?

헤클의 말대로 “귀찮으니 고치지 말자. 새거 사면 되지!(혹은 버리면 되지)”라는 태도는 비단 기계에만 적용되는 생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맺음말

최근 ‘수리할 권리’ 운동의 상황은 분명 꽤 고무적입니다. 수리할 권리를 외쳐온지 수십년만에 전세계 각지에서 수리할 권리 법안이 여기저기서 활발하게 통과되고 있고요.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수리할 권리 반대!’ 로비를 해왔던 애플이 무려 직접 셀프 수리 키트를 출시했을 정도니까요.

다만 저는 여전히 조금 갸우뚱했습니다. 이걸로 된 것일까요?

제가 본문에서 자세한 내용을 쓰진 않았지만, 지난 4월 이후 제가 살펴보았던 해외 주요 언론의 IT 칼럼니스트들의 ‘애플 셀프 수리 키트’ 체험기를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대환장파티”였습니다.(링크)

일단 커다란 여행가방 두개에 들어있는 낯설고 복잡한 장비들을 꺼내고 나서도 굉장히 섬세한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불꽃과 후회, 비탄, 눈물이 난무하는 수많은 IT 유튜브와 후기 등을 살펴보면서 처음엔 “음. 역시 도배는 도배전문가에게, 수리는 수리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낫겠군” 정도로 생각했습니다만, 기계에 익숙한 유저들조차도 애를 먹곤하는 영상들을 보며 조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거의 80쪽이 넘어가는 빼곡한 매뉴얼과 모양이 제각기 다 다르게 만들어진 나사들은 오히려 일반인들이 능숙하게 조립하는 편이 이상한 것 아닐까요.

216만 구독자를 보유한 IT 유튜버 잇섭이 지난 5월말 직접 수리키트로 아이폰을 수리하는 영상(링크). 나사들의 모양이 전부 달라 정비성이 좋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왼쪽) IFIXIT 유튜브에서 애플의 셀프수리키트를 리뷰하는 모습. 그간 IFIXIT이 주장해왔던 수리할 권리의 핵심 가치(휴대가능성, 접근가능성, 용이성 등)에 셀프수리키트가 부합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출처 잇섭 / IFIXIT 유튜브 영상 갈무리

216만 구독자를 보유한 IT 유튜버 잇섭이 지난 5월말 직접 수리키트로 아이폰을 수리하는 영상(링크). 나사들의 모양이 전부 달라 정비성이 좋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왼쪽) IFIXIT 유튜브에서 애플의 셀프수리키트를 리뷰하는 모습. 그간 IFIXIT이 주장해왔던 수리할 권리의 핵심 가치(휴대가능성, 접근가능성, 용이성 등)에 셀프수리키트가 부합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출처 잇섭 / IFIXIT 유튜브 영상 갈무리

애초에 쉽게 고칠 수 없게 만들어진 제품, 즉 제조 과정에서 ‘수리 편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제품을 고칠 수 있는 장비를 준다고 해서 과연 ‘수리할 권리’가 제대로 보장된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제대로 된 수리할 권리 보장을 위해선 기계를 만드는 방식 자체가 바뀔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복잡한 기계는 그대로 둔 채 수리도구만 주는 것은 마치 무거운 쇠로 된 모터보트에서 모터만 떼고 노를 걸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가볍고 중심이 잘 잡히고 단순한 노젓는 배를 따로 디자인하는 것이죠.

물론 헤클같은 훌륭한 기계 덕후이자 과학자는 이 정도의 ‘도전’도 꽤나 흔쾌히 받아들였겠지만(훗 오랜만에 나를 불타오르게 하는 과제로군) 저같이 컴퓨터 고장나면 가장 먼저 전원으로 손이 가는 종류의 기계치에게 너무 복잡한 기계는 역시 좀 곤란합니다. 이 때문에 최근엔 애초부터 수리가 편리한 방향으로 디자인된 DIY, 모듈형 전자제품도 출시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는 어쩌면 ‘수리할 권리’가 완성되기 위해선 ‘적정기술’의 개념이 반드시 함께 가야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정기술이란 주로 상대적 낙후 지역에서 적정 수준의 자원과 기술, 에너지를 사용해 작동해 삶의 질을 높이는 기술인데요. 최첨단 성능보다는 간편함, 효율성 등의 가치가 중요하죠.

사실 우리는 기능에 대해 ‘고고익선’이라고 생각하곤 하지만(쿼드코어! 수천만 화소!), 저처럼 핸드폰을 대체로 전화 기능 달린 뗀석기처럼 쓰는 사람은 차라리 최첨단 엣지나 접힘 화면같은 것도 없고 카메라 성능은 좀 낮더라도, 깨지지 않는 튼튼함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볼 때 어쩌면 수리할 권리라는 것은 비단 수리키트를 제공하는걸 넘어, 물건 만들기 및 시장경제의 근간을 다른 방향으로 디자인해가야하는 일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우리나라에서도 수리할 권리와 관련해 더 깊고 다양한 논의가 오가길 기대합니다. 그러면 언젠간 핸드폰 하나를 10년 넘게 쓸 날도 오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렇게 질문을 적어놓고나니 앞서 인용한 초등학생의 ‘순진한’ 네이버 지식인 질문이 떠오릅니다. 제 질문에 대해 누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이봐! 원래 전화기는 10년 넘게 쓰는 거였어!!”

1965년에 방영된 미국 시트콤 <Get Smart>에 등장한 ‘신발 휴대폰’. 전화가 올 때마다 신발을 벗은 뒤 발바닥 에 귀를 대고(...) 전화를 받아야 합니다. 꽤나 튼튼하겠죠.

1965년에 방영된 미국 시트콤 <Get Smart>에 등장한 ‘신발 휴대폰’. 전화가 올 때마다 신발을 벗은 뒤 발바닥 에 귀를 대고(...) 전화를 받아야 합니다. 꽤나 튼튼하겠죠.

※경향신문의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링크) 6월 22일자에 게재된 글입니다. 뉴스레터에는 해당 주제에 대해 추가로 읽을만한 책과 글 소개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편의 글로 하나의 깊은 영감을 드리는 〈인스피아〉를 구독해 주세요. 혹시 링크가 연결되지 않으면 괄호 안의 주소(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07426)로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