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는 민주주의에 ‘자유’를 붙이는 데 집착했다”

2018.12.21 20:32 입력 2018.12.21 20:52 수정

시민단체·학자들 ‘자유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토론회

대화문화아카데미가 7일 연 대화모임 ‘자유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는 “좌우 진영의 이데올로기 논쟁으로만 격화하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장을 열어보자”는 취지를 걸었다. 왼쪽부터 윤평중 한신대 교수, 이진우 포항공대 석좌교수(사회), 강원택 서울대 교수, 홍윤기 동국대 교수. 대화문화아카데미 제공

대화문화아카데미가 7일 연 대화모임 ‘자유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는 “좌우 진영의 이데올로기 논쟁으로만 격화하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장을 열어보자”는 취지를 걸었다. 왼쪽부터 윤평중 한신대 교수, 이진우 포항공대 석좌교수(사회), 강원택 서울대 교수, 홍윤기 동국대 교수. 대화문화아카데미 제공

한국전쟁 겪은 노년층에겐
북한 적대감의 이념적 근거
산업화 경험한 보수층에겐
‘가난을 벗어나게 해 준 사상’

유튜브 채널 ‘홍카콜라’로 돌아온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강조한 것은 ‘자유’였다. 지방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현실정치’를 떠났던 그가 활동을 재개한 것은 “전당대회나 겨냥하는 작은 목표” 때문이 아니라 “내가 꿈꾸는 자유대한민국”을 만들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가 만드는 싱크탱크의 이름은 ‘프리덤코리아’다. 그는 보수·우파가 하나로 뭉치는 ‘네이션 리빌딩 프리덤코리아 국민운동’도 제안한다.

이처럼 보수는 ‘자유민주주의’에 집착하지만, 진보는 다소 거리를 둔다. 올 1월 더불어민주당은 개헌안 초안을 발표하면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민주적 기본질서’로 바꾸겠다고 했다가 4시간 만에 “대변인의 착오”였다면서 기존 문구를 유지한다고 했다. 보수진영은 이를 두고 ‘자유 삭제’를 시도했다며 여당을 비난했다. 국정교과서 폐기 후 올 5월 새로 나온 역사교과서 교육과정 개정안에서 ‘자유민주주의’가 ‘민주주의’로 돌아가자 헌법소원을 제기한 보수단체도 있었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자유민주주의’는 뭘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37명의 학자, 시민단체 원로, 전직 국회의원이 머리를 맞댔다.

대화문화아카데미가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대화의 집’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를 주제로 가진 모임이 그것이다. 이날 대화에서는 강원택·윤평중·홍윤기 교수가 발제를, 이진우 포항공대 석좌교수가 사회를 맡았다.

“내가 꿈꾸는 자유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 활동을 재개했다는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의 유튜브 채널 ‘TV 홍카콜라’의 코너. 유튜브 ‘TV홍카콜라’ 캡처

“내가 꿈꾸는 자유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 활동을 재개했다는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의 유튜브 채널 ‘TV 홍카콜라’의 코너. 유튜브 ‘TV홍카콜라’ 캡처

■ ‘수입’된 자유민주주의

“1960년 4·19를 이끈 학생들과 지식인은 교실에서 배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가지고 싸웠습니다. ‘동의받지 못한 정부에 대한 저항은 정당하다’는 로크적인 관점을 우리 스스로 내재화한 겁니다. 그리고 통치자가 물러나는 첫 경험을 하죠.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도 그러한 관점의 저항이 이어져왔고 1987년 민주화, 2016~2017년 촛불집회가 있었습니다.”(강원택 서울대 교수)

첫 발제를 맡은 강원택 서울대 교수는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견제받는 권력’ ‘사상과 양심의 자유’ ‘공정한 선거’ 등을 꼽았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여전히 변혁적 가치”라고 짚었다. 한국은 아직 ‘제왕적 대통령제’의 나라이며 국가보안법 등으로 인한 사상·양심의 자유 억압도 해결되지 않았다. 게다가 선거제도는 “경쟁만 공정해졌을 뿐 공정하지 않은 결과”를 낳고 있다. 강 교수에 따르면 지난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지역구 국회의원을 뽑기 위해 던진 표 가운데 50.3%는 ‘사표’가 됐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동안의 자유민주주의 갈등은 이 개념의 본질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그런데 왜 자꾸 보수는 민주주의에 ‘자유’를 붙이는 데 집착해 ‘용어전쟁’을 일으키고 진보는 이 구도에 말려드는 걸까. 그것은 자유민주주의 오용의 역사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는 한국 보수의 자기정당화로 동원된 담론입니다. 푸코가 말했듯 담론은 권력과 이론의 결합물로, 결코 가치중립적이 아니지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담론은 냉전체제와 동행한 6·25전쟁을 전후해 도입됐습니다. 권위주의 정권을 비롯한 기득권 보수는 자유민주주의를 냉전반공주의, 천민자본주의로 ‘오용’했습니다. 보수세력에 저항해 온 진보 역시 자유민주주의가 냉전반공주의와 천민자본주의인 양 ‘오독’하고 냉소를 보내왔다고 생각합니다.”(윤평중 한신대 교수)

“진보는 자유민주주의를
천민자본주의인 양 오독”
‘용어전쟁’ 구도 말려들어
“자유의 가치 소홀” 지적도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의 오용·오독을 멈추는 일은 쉽지 않다. 이미 반공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한국사회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윤 교수는 “6·25전쟁의 생사 체험과 산업화의 열매는 객관적 사실이었고 그 결과 한국 시민의 ‘마음의 습관’으로 착근했다”고 지적하면서 “민중의 실감에서 유리된 어떤 개혁조차도 지속적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군부독재 정권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이 개념을 배반하는 정치를 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산업화가 이뤄졌다는 사실 때문에 자유민주주의는 실제 의미와 관계없이 보수시민들에게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준 사상’의 대접을 받고 있다. 게다가 한국전쟁을 체험했던 노년층에게 자유민주주의는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할 수 있는 이념적 근거다. 이런 상황에서 ‘개념이 잘못 쓰여왔으니 바로잡자’는 외침은 대답 없는 메아리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윤 교수는 “(자유민주주의가 냉전반공·천민자본주의로 뿌리내린 결과 형성된) 마음의 습관이 보수의 자기혁신을 가로막고 있다”고 짚었다.

정부는 지난달 북한에 제주 귤 200t을 송이버섯 답례 차원에서 군 수송기로 보냈다. 홍준표 전 대표는 말한다. “상자 속에 귤만 들어 있다고 믿는 국민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는 지금도 남북간 ‘현금거래’를 암시하는 근거 없는 ‘가짜뉴스’를 퍼뜨리고 있다. ‘자유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그가 내세우는 ‘자유’의 핵심은 여전히 ‘반공주의’다. 그런 홍 전 대표는 여전한 대중적 인기를 확보하고 있다. 방송 시작 나흘 만에 홍카콜라는 자유한국당의 공식채널(오른소리·3만5000여명), 더불어민주당의 공식채널(씀·1만8000여명)을 훌쩍 뛰어넘는 규모의 구독자(8만여명)를 모았다.

윤 교수는 또 “문재인 정부 정책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논란을 벌일 수 있겠지만 복지확대나 분배강화라는 명제에 대해서는 한국사회가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국면에 처해 있다”면서 “그런데도 보수의 주류에서는 ‘나라를 말아먹으려 하는 것이냐’는 거부반응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재벌이 나라를 먹여 살린다’ ‘사유재산은 무조건 보호받아야 한다’는 식의 인식에 머물러 있는 탓이다. 유치원 회계투명성과 감시를 강화하는 박용진 민주당 의원의 유치원 3법에 반발하며 자유한국당이 내세운 논리는 ‘사유재산권 보장’이었다.

세번째 발제를 맡은 홍윤기 동국대 교수는 “보수가 반공주의라는 말을 할 수 없으니 용어를 대체하고 조작하는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오염됐다는 윤 교수의 명쾌한 분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면서도 “현실 정치권에서 오늘의 대화와 같은 논의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일지 답답한 면이 있다”고 운을 뗐다.

그는 이어 박정희 정권 시절 헌법에 삽입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자유민주주의로 보는 보수 주류의 해석이 잘못됐음을 지적했다. 홍 교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원조는 독일기본법으로, 원래 뜻은 ‘자유롭고도 민주적인 질서’”라면서 자유롭고도 민주적인 질서는 자유민주주의를 포함해 생태민주주의, 자치민주주의 등 다양한 민주주의를 포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민주주의 대신 일관되게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한 박근혜 정부의 국정 역사교과서. 경향신문 자료사진

민주주의 대신 일관되게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한 박근혜 정부의 국정 역사교과서. 경향신문 자료사진

■ “블랙코미디 같은 논란”

참석자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오용에 대해서는 공감했으나 민주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로 대체해 극복하자는 주장에는 의견이 갈렸다. “민주주의를 업그레이드하는 면에서는 공감하지만 현실정치 측면에서는 ‘자유’를 뗄 경우 보수세력에 빌미를 주고 개혁세력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히는 문제가 있다”(윤영오 국민대 명예교수)는 지적이다. 최한빈 백석대 교수는 “‘자유’를 이용하는 세력은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기득권 세력이지만 자유를 덜 확보한 이들도 ‘자유’가 떨어져나가 그나마 덜 가진 자유마저 없어질까봐 두려워할 것”이라며 “자유라는 말을 통해 평등, 박애 등의 민주주의 가치를 더 강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반면 이국배 숭실대 교수는 “망치로 못을 박아야 하는데 어떤 공동체에서 망치를 사람 죽이는 데 쓴다면 망치를 버려야지 왜 ‘이건 원래 못 박는 거야. 사람 죽이는 거 아니야’ 라는 말을 반복해야 하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고문은 “오용, 오염된 언어라면 안 쓰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 허명에 의해 유지되는 그룹은 거기에 죽어라 매달리고 있기 때문에 현실정치에서 자유를 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며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세력이 자유민주주의에 반하는 행위를 벌이는 데 대한 ‘자각’이 이어지고 있으니 이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새로운 언어를 갈구하기 시작할 때 오용의 극복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이 다원성이라는 데 보수·진보가 합의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장은주 영산대 교수는 “‘자유’를 빼네 마네 하는 자유민주주의 논란은 블랙코미디 같다”면서 “이런 논란이 안 생기게 하기 위해서는, 체제로서의 자유민주주의는 곧 다원적 민주주의라는 합의를 하고 이 안에서 다양한 민주주의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진보진영이 ‘자유’라는 가치를 소홀히 다뤄왔음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최상용 고려대 명예교수는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원천은 ‘자유’였다”며 “자신(민주화를 이뤄낸 진보세력)이 싸운 가치를 왜 그렇게 쉽게 버리려고 하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냉전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민주주의는 버려도 좋지만 자유를 중심가치로 하는 민주주의는 지켜져야 한다. 여기에는 사회적 자유도 얼마든지 포함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날 대화의 주제는 ‘자유민주주의’였지만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모두 서구에서 들여온 것이기에 한국에서 이 개념들이 어떻게 작동해왔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 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홍구 서울국제포럼 이사장은 ‘여는 말’에서 “우리는 3·1운동 이후 지난 100년간 스스로 민주주의를 일궈낸 경험이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논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백그라운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대환 죽산조봉암기념사업회 부회장 역시 “한국의 민주정은 70년간 반전을 거듭하며 발전했고 이제 역사를 얘기할 만한 연륜이 쌓였다”면서 “한국 민주정 그 자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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