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이후, 안전사회 숙제는 풀었나

2019.04.07 09:26

‘안전’은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 동시에 가장 역설적인 단어이기도 했다. 안전을 요구하는 의식은 급격히 높아졌지만 그에 따른 정책과 현실의 변화는 기대만큼 빠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권교체 이후 들어선 문재인 정부가 내놓은 ‘국정운영 5개년계획’ 중 ‘국민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안심사회’가 20대 국정전략 가운데 하나로 포함됐지만 ‘안전불감증’ 때문에 산업현장과 생활공간에서 인명피해를 입는 참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사다리 위에서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섬유공장 관리자인 강모씨(42)가 올해부터 질리게 내뱉는 말이다.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이 올해 1월 1일부터 사다리 위에 올라서서 공사나 작업을 하는 것을 전면금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 귀에 경 읽기’다. 여러 단계로 나눠진 공정을 진행하면서 수백m에 달하는 기계설비 중간에 섬유 원단이 끼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서서 손이 닿지 않는 높이면 비계(작업발판)에 올라가서 꼬이거나 끊어진 부분을 처리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현장 작업자들은 귀찮다며 사다리 하나를 걸친 채 작업하기 일쑤다. 혹시라도 당국의 점검이 나왔을 때 적발되면 처벌 수위도 높다.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다리 위에서 하는 작업 때문에 발생하는 인명피해가 가장 큰 문제다. 최근 10년간 사다리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망자만 해도 317명이나 된다. 3만8859명이 다쳤고, 이 가운데 71%인 2만7739명은 중상해를 입었다. 사다리는 오르내리는 통로로만 써야 하는데도 작업발판 대신 쓰는 관행이 현장에 계속 남아있어 발생하는 문제다. 강씨는 “귀찮기도 하고 익숙하게 잘 썼으니 별 문제 있겠냐고 생각하는 직원들 생각도 이해는 간다”면서도 “‘아차’ 하다가 일어나는 안전사고 때문에 가장 피해를 보는 건 당사자인데 이렇게 안전불감증이 퍼져 있으니 갈 길이 멀어 보인다”고 말했다.

/ 일러스트 김상민

/ 일러스트 김상민

작업현장의 여전한 안전불감증
사다리는 산업현장뿐 아니라 생활공간에서도 자주 쓰이는 친숙한 도구지만 위험성에 대한 인식은 낮다. 정부가 나서서 강력한 계도를 시행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안전문제를 깨닫지 못했을 정도로 시민들의 안전의식 전반에도 허점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안전의식이 모든 분야에 걸쳐 낮게 나타났던 문제는 세월호 참사 이후 구성돼 활동한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산하 안전사회소위원회의 보고서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당시 안전사회소위는 세월호 참사가 정부와 기업을 포함한 사회 전반의 안전의식 부족이 겹쳐져 나온 대형 참사였기 때문에 해상·선박 안전을 넘어 안전분야 전반에 걸친 개혁과제를 조사한 뒤 제시했다.

갑작스런 재난에 대처하는 대책만 놓고 보면 가장 실질적인 변화로는 전국을 4개 권역으로 나눠 119 특수구조대나 해난사고 대비 특수구조대 등 재난대응 현장조직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실제로 현장에서 재난피해를 최소화하고 시민들을 구조하는 역량이 상당 부분 커졌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아직도 대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 역시 만만찮다. 한 지방자치단체의 소방당국 관계자는 “소방관들의 열악한 장비와 인력 부족 상황은 여전하고, 안전점검을 나가도 안전상의 문제가 심각한 지점들을 대놓고 무시해도 막상 타격이 크지 않은 처벌수준 때문에 총체적인 문제는 바뀌지 않고 있다”고 토로했다.

사다리 대신 바닥을 튼튼하게 디디고 흔들림이 없는 비계나 작업대를 사용하라고 유도해도 기업이나 작업 담당자들이 안전 대신 비용을 우선하며 반대 목소리를 높이는 것처럼 안전관리 책임에 관한 인식이 전반적으로 낮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낮은 액수의 손해배상으로는 기업 경영진의 책임의식을 높이기 어렵고, 일반 시민들의 경각심을 높여 사회적 압력을 행사하려 해도 생활공간 주변의 위험정보를 안내하는 활동 자체가 부족하다. 현장 작업자들의 안전불감증 문제도 있지만 실제로는 위험을 감지해도 작업을 중단하자고 요청하기 힘든 구조가 더 큰 문제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위험에 노출된 비정규직 노동자
민주노총 건설노조 소속의 한 조합원은 “현장 노동자들이 하청과 재하청을 거쳐 말단 업체에 소속돼 있을수록 목소리는 위로 올라가지 않고 말해도 소용없다는 생각 때문에 체념하게 된다”며 “노조나 언론을 통해 문제를 제기해도 막상 현장에 변화를 만들기 힘든 상황에 무력감만 느낄 뿐”이라고 말했다.

특히 세월호 이후에도 화력발전소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고 김용균씨가 산재로 사망하는 등 노동현장에서 목숨의 계급화가 고착되는 문제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다. 세월호 특조위 안전사회소위가 안전사회 10대 핵심과제에 ‘외주화·민영화 정책에 대한 점검과 대책 마련’을 강조했음에도 후속조치가 미흡했던 탓이다. 세월호 참사만 해도 안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갑판과 기관부에서 일하는 직원의 70%가 비정규직이었다.

전문가들은 외주화의 문제는 작은 사고가 책임부재와 얽혀 더 큰 문제로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특히 KT 아현지사 통신구 화재사태가 도시기능을 마비시키는 결과를 낳은 점을 볼 때 작은 안전관리 소홀이 나비효과처럼 광범위한 여파를 불러올 수 있으므로 대처가 더욱 엄밀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최영상 대구보건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요인 때문이라고 치더라도 피해가 확대되는 이유는 대부분 대비책이 소홀한 탓에 즉각 대응과 수습에 나서지 못하고 2차 피해가 커지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이어 “도시 기능의 발달로 한 분야의 사고가 다른 분야에까지 여파를 불러 피해가 커지는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렇게 중첩되는 피해를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재난관리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국가가 나서 낮은 신뢰수준을 회복하고 재난관리체계 전반에 쌓인 불신을 해소하는 게 선행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국가가 모든 재난을 제도나 정책으로 막아낼 순 없더라도 시민의 자발적인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게 신뢰와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특조위 안전소위 자문위원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박근혜 정부가 안전 때문에 국민의 목숨을 잃게 만들면서 몰락했다는 교훈을 이후 대선에서 후보들도 얻은 듯 보였지만, 결국 안전에는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정부가 바뀌어도 주머니를 여는 데는 주저하고 만다. 하지만 지금 예산을 들이지 않으면 언제고 똑같은 불행을 겪을 것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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