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포대교
380개의 노즐이 분당 60t의 물을 끌어올려 허공에 뿜어낸다. 물줄기는 음악에 맞춰 각기 다른 포물선 궤적을 그리며 춤추고, 200개의 LED 조명에서 쏘아낸 알록달록한 광선이 물보라 사이로 부서져 흩어진다. 반포대교는 무지개 외벽에 둘러싸인다. 무려 1140m에 이르는 이 분수 구간의 규모로 인해 이 다리는 ‘가장 긴 교량 분수’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는 분수 분야의 기네스 세계 기록으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가장 높은 초콜릿 분수’는 12.27m로 오스트리아의 초콜릿 회사가 차지했고, 소다 음료를 터뜨려 만들어낸 분수로는 멕시코의 축제 참가자들이 합심해 달성한 4334개가 최다이다. 입으로 공중에 물을 뿜어 만든 ‘인간 분수’ 중 가장 오래 지속된 기록은 무려 56.36초나 된다.
기네스협회에서 경이롭다는 찬사까지 써서 추켜세운 이 기록의 보유자는 22세의 앳된 에티오피아 청년이다.
오로지 서울의 랜드마크 되기 위해 탄생한 ‘인공섬’ 세빛섬
그 뒤로 강가를 둘러싸고 있는 기하학적 닮은꼴의 아파트 단지
남쪽으로 펼쳐진 풍경은 기록을 향한 집착적 도전의 성과물 같아
도시 경관 조성 계획은 크기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주목받기 수월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세계에서 가장 진귀한 다리, 세계에서 가장 특별한 다리…. 반포대교를 수식하는 ‘주관적인’ 타이틀은 기록의 객관적인 크기에서 엿보이는 앙상한 의도를 감춘다. 이런 유의 홍보성 기사 가운데 내가 처음 접한 것은 한 해외 사이트에서 반포대교를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다리’로 선정했다는 소식이었다. 선정 이유로는 ‘분수의 압도적인 규모’를 들고 있었다. 그 이름 모를 해외 사이트의 사무소재지가 어느 나라인지, 혹은 사무실 대신 아마존 웹서비스의 월 5달러짜리 서버공간에 입주해 있으면서 스타벅스 테이블 위에 랩톱을 펼쳐놓고 인스타그램 사진을 수집하는 여행사 직원에 의해 운영되는 것인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내가 이 영광스러운 수상 소식을 접할 수 있었던 건 해외 웹진을 구독하기 때문이 아니라, 국내 언론들이 온라인판으로 대서특필하고 누리꾼들이 반갑게 퍼날랐던 덕분이다.
반포대교 남쪽으로 펼쳐진 풍경은 기록을 향한 집착적인 도전이 일궈낸 성과처럼 보인다. 다리 옆에 떠 있는 세빛섬은 반포대교의 무지개 분수와 함께 한강르네상스 계획의 일부로 조성되었다. 반포대교가 ‘세계 최장’의 분수 다리라면, 세빛섬은 ‘세계 최초’로 수상 부유물 위에 건설한 복합 단지다. 세계 최초의 시도가 첨단 기술과 창조적인 발상으로 거둔 성과일 때도 있지만, 그저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이유를 증명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언제 방문해도 크리스마스 전야의 불국사처럼 고요한 세빛섬은 불행하게도 후자에 속한다. 오로지 서울을 빛내는 랜드마크가 되기 위해 탄생한 이 인공섬은 물 위에 간신히 떠 있을 뿐 자본 잠식에 빠진 지 오래다. 그리고 세빛섬 뒤로는 웅장한 아파트 단지가 병풍처럼 강가를 둘러싸고 있다.
고층 건물이 공중의 조망권을 높게 점유하는 것은 어느 대도시에서나 흔하지만, 똑같은 모양의 고층 건물 단지가 도시 한가운데를 넓게 점유한 풍경은 사회주의국가의 도시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도시 공간의 수평적 복제는 건물 하나를 수직으로 쌓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힘을 필요로 한다. 땅 위에는 이미 누군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파트 대단지는 사회주의국가의 계획경제에 더 어울리는 건축물이지만, 공동의 목표를 향한 초월적인 단합에 익숙한 자본주의사회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일은 어떤 식으로 가능할까? 먼저 별처럼 무수한 선주민들의 의사가 하나의 마음으로 단결해야 하고, 중앙집권적인 개발계획 수립에 익숙한 행정기관이 양해하거나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하며, 무엇보다 그 번잡한 절차를 결국에는 어떻게든 넘어서서 모든 권한을 위임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건설 주체가 사업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어야 한다. 가히 행성 스케일의 형상 복제라고 부를 만한 한국 아파트 단지의 기하학적 닮은꼴은 물질적인 것 이상을 보여준다. 한 사회의 가치 생산과 자원 분배 체계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아파트 단지의 건축 기법은 우리가 사회의 덩치를 빠르게 불린 비법과 똑같다.
하지만 아파트 단지의 몰개성을 지적하는 것은 한겨울의 앙상함을 비판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지도 모른다. 공급 주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단지형 아파트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이제 더 드물 테니까. 나 역시 소년기를 아파트 단지에서 보냈고, 이 주거 방식을 선택한 주민들까지 모욕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싫든 좋든 아파트 단지가 이유 없이 생겨나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하기엔 아쉬움이 남지 않는가? 나는 이런 상상을 해본다. 반포대교 남쪽으로 한참의 시간을 뒤로 돌린다. 백금처럼 반짝이던 아파트의 유리가 모두 부식해 떨어지고, 벽의 균열을 담쟁이덩굴이 타고 오른다. 색이 빠진 석조 건축물은 인간 생활로부터 천천히 멀어지고, 어느새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잊혀진다. 강둑 위에는 거인의 비석들이 들어찬 묘지처럼 똑같이 생긴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편견 없는 시선을 가진 미래의 탐험가가 그 풍경 앞에 멈춰선다. 그는 나란히 선 고층 건물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모양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보일까? 우리가 피라미드의 완벽한 대칭성에 감탄하듯이, 선대의 문명이 남긴 불가사의한 유산으로 여기게 될까? 이 탐험가가 추론하는 우리 사회는 자로 잰 듯한 합리성이 지배하는 곳일까? 그때까지 아파트 단지란 게 남아 있을까?
북쪽은 19세기 말부터 중·일·미군이 주둔한 유서 깊은 치외법권
젊은층은 서울 안 고립된 나라 같은 다국적 풍경에 거꾸로 매료돼
이제 반포대교 북쪽으로 걸음을 돌려보자. 전혀 다른 성격의 세계가 펼쳐진다. 남쪽과는 반대로 이곳은 한국의 사회학이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다. 서빙고동에서 남산 기슭까지의 넓은 땅은 지도 속에서 신비로운 미개척지처럼 텅 비어 있다. 이곳에는 19세기 말 청나라 군대가 주둔했고, 20세기 초반에는 일본 군대가 주둔했으며,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유서 깊은 치외법권의 변두리는 시멘트 담벼락과 가시 철조망에 둘러싸여 있고 24시간 무장 경비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보초를 선다. 국경의 삼엄함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갖는다. 경계 건너편은 행정 주소부터 캘리포니아인 까닭이다. 군 부지의 삭막함을 상상한 사람이 미군 기지 내부를 방문한다면 깜짝 놀랄 수도 있다. 잘 정비된 도로, 숲처럼 우거진 키 높은 가로수, 잔디 정원이 딸린 아기자기한 교외풍 주택들이 띄엄띄엄 늘어선 한가로운 풍경은 정말로 캘리포니아의 작은 도시를 통째로 옮겨다 놓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인구밀도와 땅값을 가늠할 때 쓰이는 숫자들은 이 넓은 부지를 둘러싼 시멘트벽 너머로 침투하지 못한다. 태평양 하나쯤 떨어져보이는 풍광의 차이를 만들어낸 방벽의 높이는 겨우 2m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미군 기지의 담장을 넘어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지만, 거기서 빠져나온 것들은 주변 지역에 쉽게 스며들었다. 부지와 면한 보광동, 한남동, 이태원동 일대에는 이국적인 정취가 가득하다. 미로처럼 복잡한 언덕 위 골목 사이사이로 작은 공방이 숨어 있다. 허름한 세탁소를 운영하는 노인이 구사하는 뜻밖의 유창한 영어를 듣게 되거나, 반대로 레바논 출신의 젊은이가 한국말로 또박또박 인사말을 건네올 수도 있다. 할랄 음식을 취급하는 식당에서 풍겨오는 향신료 냄새를 따라가면 이슬람 사원에 다다르게 된다. 새하얀 모스크는 서울 하늘을 메운 교회 첨탑의 십자가에 포위당한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이태원의 번화가로 내려오면 풍경은 더 화려하지만 더 흔한 느낌으로 바뀐다. 피자와 햄버거를 파는 레스토랑이나 ESPN의 중계방송을 틀어둔 스포츠 펍 같은 곳은 주로 서양인들이 찾는다. 이들은 몇 주를 머물거나 몇 년을 살지만 마지막까지 정착민보다는 여행자의 분위기를 풍긴다. 실제로 이태원 근처를 벗어나지 않는 서양인들은 대체로 방랑객을 자처하며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국과는 가장 거리가 먼 외국인 커뮤니티를 맴돌다 어느날 훌쩍 떠나게 된다. 엽서 속의 도시처럼 잘 추려낸 기억을 간직한 채로.
미국 애리조나 출신의 제이크 레빈은 한국에 7년 가까이 거주한 시인이자 번역가다. 한국 독자도 어려워하는 한국 시인의 시들을 영어로 번역했고, 산낙지와 사랑에 빠진 데다 홍어회마저 극복했으니 꽤 멀리까지 온 편이다. 그래도 여전히 이방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한국에 온 이유가 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조심스럽지만 솔직한 말투로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열아홉살에 미국을 떠났어요. 세상 어딘가 또 다른 삶의 방식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영국, 스페인, 리투아니아를 거쳐 한국으로 왔죠. 하지만 외국인은 고국과 거주지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두 곳 모두 거리를 두고 살아가게 돼요. 저는 인종차별을 경험하지도 않았고,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난민이었던 적이 없어요. 내 위치를 스스로 선택할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아시아계 이주민들과는 한국을 보는 관점도 다르겠죠. 제가 미국을 쉽게 떠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내 피부색, 국적, 성별 덕분이었을 거예요.”
‘고국과 거주지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두 곳 모두에서 떨어진’ 정서야말로 이태원 일대를 감도는 독특한 분위기의 근원인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에 동화하지 못한 외국인, 자발적으로 속박을 거부하는 외국인이 뒤섞여 디아스포라와 문화적 식민지 중간 즈음에 위치한 이태원만의 색깔을 만들어낸다. 이태원이 미군 기지의 후배지에 머물렀던 1990년대까지는 법조차 힘을 잃는 음습한 점령지의 인상을 떨쳐낼 수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울한 옛 소문은 왁자지껄한 거리 뒤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젊은 세대 한국인들은 서울 안의 고립된 나라처럼 느껴지는 이 동네의 색다른 분위기에 거꾸로 매료됐다. 국적이 뒤섞인 풍경의 길거리를 걷는 동안 한국 사회와 거리를 두는 경험을 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태원 프리덤’으로 노래 불리기도 한 주말 밤은 이런 모습이다. 후머스를 얇게 펴바른 피타브레드를 손으로 집어먹고, 과일맛이 나는 밀맥주를 들이켜다가 옆 테이블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젊은이와 인사를 나눈다. 그가 IT 유학생인지, 건설노동자인지, 대부호인지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거리낌없이 잔을 맞댄다. 이방인 사회의 이방인이 된 기분을 맛본다. 하지만 하우스 음악이 울려퍼지던 모던한 라운지 바가 문을 닫는 새벽 즈음이면 그들을 각자의 현실로 돌려보낼 택시가 대로변에 줄지어 서 있다. 기네스북에 오른 가장 긴 교량 분수를 통과하는 동안, 익숙한 사회적 규칙들이 빠르게 형상을 되찾는다. 승객 가운데 일부는 수천가구가 조용히 잠든 아파트 단지로 발소리 죽여 복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