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사람 몰아내고 또 사람이 지켜낸…밤섬의 어제와 오늘을 ‘횡단’

2019.09.08 21:56 입력 2019.09.08 21:58 수정
손아람 작가

서강대교

하늘에서 바라본 서강대교. 밤섬을 가로지르며 서울 마포구 신정동과 영등포구 여의도동을 잇는다. 사진의 왼쪽 부분이 서강대교 북단이다. 이 부근의 한강을 조선시대에 서강(西江)이라 불렀다.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하늘에서 바라본 서강대교. 밤섬을 가로지르며 서울 마포구 신정동과 영등포구 여의도동을 잇는다. 사진의 왼쪽 부분이 서강대교 북단이다. 이 부근의 한강을 조선시대에 서강(西江)이라 불렀다.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영화 <괴물>의 첫 장면. 음침하기 그지없는 지하 실험실에서 미국인 박사가 독극물을 한강에 방류하라고 명령한다. 그는 망설이는 한국인 조수를 다그친다. “한강은 무척 큽니다, 김씨.” 곧 오염수를 먹고 돌연변이 괴물이 자란다. 한강시민공원으로 올라와 소녀 한 명을 납치한 이 괴물은 강 건너편의 수풀이 무성하게 자란 섬으로 헤엄쳐 달아난다. 눈썰미가 좋은 관객은 알아챘겠지만, 그곳은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된 밤섬이다. 환경오염이 낳은 재앙이 인간을 꿀꺽 집어삼킬 때, 하늘 위로는 야생동물보호법의 비호를 받는 철새들이 유유히 날고 있다. 영화 <김씨 표류기>의 주인공은 또 다른 김씨다. 그 역시 인간을 피해 밤섬에 들어갔다. 경제적 어려움을 비관하여 한강에 몸을 던졌다가 떠내려간 것이다. 사회로부터 단절된 무인도의 삶은 좌절의 연속이지만 혼자 힘으로 극복하지 못할 난관은 없다. 김씨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희망의 감각을 되찾아 나간다. 하지만 그를 섬에서 쫓아낼 환경 단속반이 들이닥치는 것만큼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문제다.

실향의 상처 딛고 철새의 쉼터 된 무인 생태계 예술 탄생의 공간
밴드 ‘밤섬해적단’은 추방민 집단을 모티브로 삼아 만들어져

도심 한복판의 무인 생태계, 인간이 인간을 몰아냈고 인간이 인간으로부터 지켜낸 공간. 밤섬의 역설은 많은 대중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했다. 처음부터 이 섬이 무인도는 아니었다. 한때는 수백명이 살던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여의도를 개간해 택지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서울시는 주민을 이주시킨 뒤 밤섬을 폭파했고, 흙모래 파편들을 쓸어담아 여의도의 뚝방으로 다져올렸다. 수십년이 흘러 물길을 따라 퇴적된 모래가 밤섬을 되살려냈다. 사람이 떠난 땅에 철새들이 몰려들었다. 여의도로 드나드는 교통량을 분산시키기 위해 밤섬을 지나는 서강대교를 놓을 즈음에는, 섬의 주인과 함께 시대가 한참 바뀌어 있었다. 한때 인간의 거주지마저 거침없이 가라앉힐 수 있었던 도시 개발이 철새의 쉼터를 지키자는 목소리에 가로막힌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부상한 고고한 명분이 거기서 쫓겨난 주민들에게는 되레 섭섭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다들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한 인디밴드는 이 질문에 그럴싸한 상상력을 가미했다. 아나키즘 성향의 밴드 ‘밤섬 해적단’의 이름은 여의도를 노략질하는 해적으로 전락한 밤섬의 추방민 집단을 모티브로 삼았다. 거꾸로 물어볼 수도 있다. 여의도로 몰려온 침략자들은 누구였나? 이 질문에는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증언할 수 있다. 바로 나 같은 사람들이었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뒤 할머니는 전라도 나주에서 여의도에 조성된 아파트 단지로 거처를 옮겼다. 여섯 형제자매가 여의도로 모여들었고 내 아버지도 할머니 가까이에 집을 구했다. 고향을 통째로 옮긴 것이지만 결국 나주에 남았더라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는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이 흘러 돌아가신 할머니를 할아버지 무덤 옆에 나란히 묻던 날, 나는 아버지의 진짜 고향에 처음으로 내려갔다. 흑백 사진으로만 보던 대나무 숲에는 여의도와 다를 게 없는 대단지 아파트가 자라나 있었다. 일가족이 언젠가 아파트가 들어설 땅을 떠나 이미 아파트가 들어선 땅으로 생활을 일찍 옮겨온 셈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여의도에서 유년기를 보낸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 지각을 형성하게 되었다.

여의도로 이주해 보낸 유년기 경험 다른 세계에 대한 지각 형성
학군 편제·지역사회 기능 분리, 지역성 대표 못하는 불안 조성
도시 정착민 2세대로 성장 경험이 예술의 상상력과 영감 자극

어떤 아이들이 숲을 뛰어다니면서 색깔의 이름을 배우듯이, 여의도는 도시에 내재된 규모의 언어와 위계 논리를 배우기 쉬운 곳이다. 권력기관과 중산층 거주지를 뒤섞어 설계한 개발 구역이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달리다보면 대기업 본사, 금융기관, 방송사의 본부들과 국회의사당을 지나치게 되는 곳에서 자란 아이들이 꼭 자긍심이나 야망을 키우는 건 아니다. 거주 공간의 상징적 성격과 스스로를 동일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되면서 체념이나 짓눌린 태도, 심지어 적개심을 먼저 배울 수도 있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니도록 학군이 편제되어 있지만 정작 그 종착점인 지역사회의 기능은 이들과 분리되어 있다. 서울에서 자란 세대가 대체로 고향의 감각이 희박하긴 해도, 지역성을 대표하지 못하는 지역민으로 성장하는 건 그보다 큰 불안을 남기는 경험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아이들이 평일을 학교에서 보내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다시 만났는데, 오로지 교회만이 모두를 향해 공평하게 열려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적벽돌을 반원 모양으로 쌓아올린 순복음교회의 예배당은 서강대교 남단 교차로 앞에 서 있다. 세계 최다라는 등록교인수는 2000년대 초반에 이미 75만명을 돌파했다. 집계 숫자에 나도 포함되었을까? 예배에 참석하면 주어지는 포상은 믿음으로 입문하는 과정이었다. 구원은 너무 먼 데다 추상적이고 논쟁적인 개념이었지만, 햄버거 세트는 훨씬 이해하기 쉽고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공짜가 아니라 신실한 태도와 교환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목사님이 기도문을 읊는 동안 눈을 뜨고 있었다는 이유로 인솔교사에게 꾸짖음을 당한 날이 있었다. “기도하는 동안 눈을 감고 있던 사람은 눈을 뜬 사람을 찾아낼 수 없잖아요!” 항변은 통하지 않았다. 농담처럼 잊혀질 뻔한 추억이 되살아난 건 교회의 탈세 문제를 기사로 내보낸 언론사 앞에 모여 시위하는 교인들을 보았을 때였다. 이번엔 그들이 폭로당한 목사가 아니라 고자질한 언론사를 꾸짖고 있었다. 기도의 예식이 시적인 연원을 얻게 된 순간으로 보였다. ‘눈을 감는 자’에게만 믿음이 허락되기 시작한 것처럼.

서강대교 아래 밤섬. 이곳에는 한때 수백명이 살았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서강대교 아래 밤섬. 이곳에는 한때 수백명이 살았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언제나 출입문을 굳게 닫아내린 방송사는 교회만큼이나 종교적인 신비주의에 둘러싸인 곳이었다. 전국의 텔레비전이 방송사 옥상의 전파탑과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고, 전파탑에서 나온 케이블은 다시 카메라가 설치된 방으로 이어져 있다고 나는 상상하곤 했다. 지금 거기 누가 있을지 추측해보는 건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그냥 방송사 앞에 세워진 자동차 주변을 기웃거릴 때가 훨씬 많았다. 가끔은 차창을 내리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거나 자비롭게 사인 요청까지 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뽀식이’로 국민 코미디언 반열에 올랐던 이용식씨는 내가 내민 공책에 이름을 휘갈겨 쓰고 그 아래 큰 사람이 되길, 이라고 적어주었다. 온갖 권력기관에 둘러싸인 도로 위에서 그가 염두에 뒀을 큰 사람의 모습은 아니겠지만, 작가가 되고 나서 나도 꼬마들에게 사인을 해준 적이 있다. 이용식씨를 알아보고 반가운 마음으로 달려들었던 나와는 달리, 그 아이들은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로 부모에게 등떠밀려 어색한 걸음걸이로 다가온다. 누군가 그의 바람을 공책에 써주었듯이 나도 내 바람을 종이에 쓴다. 더 나은 미래에 살기를, 이라고.

여의도의 유년기가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국 친구 한 명만이 남는다. 그를 통해 배운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내 진로에 영향을 미쳤다. 용산전자상가에서 흥정하는 방법, 모뎀이 장착된 단말기로 접속할 수 있는 PC통신망, 활자 매체보다 가상 공간의 게시판에서 먼저 움튼 사이버 펑크 소설의 조류, 재즈의 역사를 수놓은 몇몇 이름, 접영의 우아한 동작. 배울 수 있었다면 왼손잡이가 되는 법까지도 배웠을 것이다. 교육 제도가 내놓는 예언의 정확도는 매우 의심스럽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환멸을 느낄 정도로 조숙하고 영민한 아이라면 예술가의 길에 매력을 느끼기 쉬운데, 사회가 그 길을 권장하지 않을수록 더욱 그러하다. 갈수록 냉소적이고 반항적으로 변한 이 친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음악가의 길을 택했다. 밴드 ‘못’의 멤버인 재즈 피아니스트 이하윤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다. 내가 지방으로 이사했을 때 우리의 성장 경험은 반대 방향으로 갈라섰다. 삶은 아이러니하다. 사회적 압력이 느슨한 지방 학교에서 비교적 순탄한 학창시절을 보낸 뒤에 나는 거꾸로 대학생이 됐으니까 말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스스로를 대학과는 결코 맞지 않는 사람으로 여겼었다.

이하윤과 나는 스무 살 즈음 다시 만나 붙어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음울하기 짝이 없거나 분노를 쏟아내는 음악을 만들면 내가 거기에 가사를 붙였다. 지하실의 자욱한 연기와 셀로판 필름을 입힌 촌스러운 조명, 퇴근시간에 벌써 취해 있고 출근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음악들이었다. 우리는 어딘가에 버려져 있다고 느꼈다. 신촌에서 서강대교를 건너 여의도까지 이하윤과 걸었던 밤의 감정을 나는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우리는 대화를 포기하고 밤거리를 끝없이 걸었다. 강변북로 초입에 있는 편의점에서 담배와 맥주를 샀고, 서강대교를 두 다리로 건너면서 그것을 다 축냈다. 처음으로 걸어서 건넌 한강 다리는 생각보다 무척 길었다. 강바람은 서늘하지만 소리를 내지 않았다. 국회의사당이 네 모서리에서 조도가 높은 광원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완만한 쌍곡선을 그리며 높이 솟은 63빌딩의 고층에서는 많은 돈을 버는 사람들이 밥값을 하려고 야근을 하는 중이었다. 세상은 너무나 멋졌다. 그래서 나와는 조금도 관계없는 사람들이 벌써 남김없이 소유하고 있었다.”(진실이 말소된 페이지)

하지만 모자람 없이 자란 도시 정착민 2세대가 밤섬의 해적단처럼 정당한 염세주의자가 될 수는 없는 운명이었다. 기껏해야 망가진 위성처럼 궤도를 벗어나기로 결심한 예술가가 되었을 뿐. 이제 이하윤의 음악에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가 담겨있고 작가인 나는 여의도의 풍경에서 전에는 보지 못한 것들에 주목하게 되었다. 젊음이 깎여버린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여의도 역시 함께 나이 먹은 것이 분명하다. 최초의 고층 아파트 단지는 가장 오래된 고층 아파트 단지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그 위로 하루 한번 일식처럼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는 63빌딩 역시 초고층건물의 순위권에서 멀찌감치 밀려났다. 덩치가 부쩍 커진 금융가의 등쌀에 떠밀린 방송사들은 하나둘 짐을 꾸려 떠났다. 선거철이면 거물 정치인이 군중을 몰고 다녔던 아스팔트 광장에 푸른 숲이 생겼다. 반대로 성난 시위대가 국회의사당을 몇 차례 포위하기도 했다. 서울의 생애를 두고 보면 놀랄 만한 변화는 아닐지도 모른다. 가라앉은 모래섬이 물 위로 다시 떠오르고, 다이너마이트로 날려버린 마을터에서 쉬어가는 철새를 편들어주는 사람들이 등장했던 것에 비하면. 어쨌든 도시의 계절이 한번 더 바뀐 것이다.

작가의 사정으로 당초 예정되었던 ‘영주 무섬외나무다리’와 ‘서강대교’의 연재 순서를 교체해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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