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는 왜 '번아웃’에 빠질까

2019.11.30 12:54

“취업 전에는 ‘합격만 하면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일을 시작하니 영혼이 남아 있질 않아요….”

2년차 직장인 이성우씨(28·가명)도 취업 전까지는 그럴듯한 계획이 있었다. 원하던 직장에 들어가면 1년에 한 번쯤 해외로 휴가를 떠나고, 퇴근 후에는 꾸준히 운동과 자기계발을 해나가겠다는 ‘소박한’ 꿈이었다. 그러나 햇수로는 2년, 만으로는 겨우 1년을 넘긴 직장생활 동안 남은 것은 무기력과 피로감뿐이다.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는 직장인 / 경향신문 자료사진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는 직장인 / 경향신문 자료사진

흔히 말하는 ‘번아웃(burnout)’, 말 그대로 다 타버려 재만 남은 듯한 탈진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한 업무에 겨우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새로운 업무가 다급하게 닥쳐오고, 조금씩 업무능력을 키워가다보니 업무량만 더 늘어나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씨가 일하는 직장은 주 52시간 노동 상한제 적용을 받는 곳이다. 그래서 노동시간으로만 따지면 주 52시간을 넘기지는 않는 시기도 있다. 하지만 일이 몰리는 시기에는 법정 노동시간을 넘기는 야근을 피할 수 없다.

업무용 컴퓨터가 정해진 시간이 되면 일괄적으로 꺼지도록 되어 있다보니 컴퓨터의 시간대를 해외 시간으로 맞춰 계속 일하거나, 집에 돌아가서도 메신저 앱으로 실시간 업무 지시와 잔소리를 함께 들으며 남은 일들을 처리하기 일쑤다. 이씨는 “일이 많은 것 자체는 견딜 수도 있고 배울 점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일이 손에 익을수록 떠넘겨지는 일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그 일에 대한 각종 불필요한 지시와 간섭이 퇴근 뒤에도 이어지니 견디기 힘들다”고 말했다.

■다 타버려 재만 남은 듯한 탈진 경험

직장인들에게 ‘번아웃’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용어다. 이 용어가 자신의 처지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결코 달갑지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극복하거나 회피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탈진 증후군이라 이름 붙은 증상들만 보더라도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과도하게 육체적·정신적 기력을 소진하다 결국 탈진에 이르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지난 5월 제11차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에서 번아웃을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직장 스트레스 때문에 발생하는 증상의 하나로 최종 정의하고 건강 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자로 판단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20대에서 이러한 탈진을 호소하는 비율이 높다는 점이다.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진행한 직장인 번아웃 및 스트레스 관련 조사를 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무렵 완전히 소모된 느낌’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20대(69.2%)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또 더 심각한 수준으로 번아웃을 경험한 ‘업무로 인해 완전히 탈진’ 응답자의 비율 역시 20대에서 53.6%로 가장 높아 절반 이상이 직장 스트레스 때문에 탈진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조사기관의 조사를 봐도 20대가 직장 스트레스로 번아웃에 시달리는 비율이 가장 높다는 점은 일관되게 나타났다. 취업포털사이트 인크루트가 직장인을 대상으로 올해 10월 조사한 결과에서도 20대의 84.7%가 실제 건강상의 이상을 호소할 정도였다. 일 때문에 건강 문제를 겪지 않는다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 정도로 강도 높은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실제 겪은 건강 문제 중 우울증·화병·만성피로·번아웃 증후군 등을 포함한 스트레스성 정신질환의 비율이 31.5%로 가장 높다는 점 역시 소진될 정도로 일하는 환경이 건강 악화로 직결되는 모습을 잘 보여줬다.

문제는 번아웃 증상을 겪는 20대의 비율이 모든 연령대 중에서 가장 높게 나타나고 있는 배경에 20대 청년들이 아예 일자리를 잡지 못하는 실업 문제까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취업준비생 강현승씨(26)는 불면과 지각이 아예 일상이 되어버린 경우다. 취업준비를 하면서 생활비만이라도 직접 벌어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 오후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지만, 매일 밤잠을 이루지 못하다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들고 늦잠 때문에 일터에 지각하는 일상이 반복되다보니 아예 일하는 시간대를 야간으로 옮겨버렸다. 강씨는 “말이 취업준비생이지, 사실 원서는 내지만 더 이상 쌓을 스펙도 없어서 알바만 계속하는 반 백수 신세”라며 “그런데도 취직을 못 하는 날들이 계속 이어지니 몸은 피곤해도 잠을 못 자는 날이 몇 달째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20대의 84.7%가 건강상의 이상 호소

올해 4월 서울대 행복연구센터가 104만3611명에 달하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전례없는 대규모 조사를 시행한 결과를 봐도 20대가 번아웃에 빠지게 되는 배경은 여러 방면으로 짐작할 수 있다. 센터가 발간한 ‘대국민 행복 리포트 어바웃 H’에서 행복에 대한 주요 질문들을 바탕으로 연령대별 행복과 심리적 안정 등에 관한 내용을 분석한 결과 자신이 가장 불행하다고 느끼는 연령대는 역시 20대였다. 20대 안녕지수(5.06)는 전 연령대를 통틀어 가장 낮았고 자존감지수(4.48) 역시 최하위였다.

요일별 안녕지수를 조사한 결과 목요일이 가장 낮아 ‘가장 불행한 요일’로 꼽힌 점도 눈길을 끌었는데, 이에 대해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행복연구센터장)는 “수요일까지 업무와 학업에 매달린 사람들이 목요일에 ‘번아웃’을 경험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결국 20대는 취업 전까지 이전 세대들보다 더욱 극심하게 겪고 있는 취업경쟁에 시달리다 어떻게든 취업 문턱을 통과한 뒤에도 행복해지지 못하고 직장 초년생들이 겪는 과중한 업무 부담에 시달린다는 결론이 나온다. 특히 경쟁을 뚫고 들어간 직장에서는 그동안의 경쟁을 벗어나 비교적 자율적인 환경에서 업무를 담당할 것으로 기대하지만 그 기대가 빠르게 깨져버리는 점도 번아웃을 유발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가 2018년 직장인 19만5600명의 정신건강 상태를 분석한 보고서를 보면 직무 스트레스 요인 중 20대의 경우 특히 ‘직무 자율성’ 부문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응답이 25%로 가장 높았다. 관계 갈등, 직장문화, 보상 부적절 등 다른 연령대의 주요 스트레스 요인과는 다른 결과다. 조성준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직급이 낮은 젊은 직장인의 경우 아무래도 직무에 대한 자율성이 적다보니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많을 수 있다”며 “젊은 직장인들은 업무 성과를 내야 한다는 상당한 압박을 받는 데에 더해 직장 내 대인관계 갈등까지 빚어지면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사회 전체가 장시간 노동에 대한 해법은 찾아가고 있지만 비교적 관심을 두지 못했던 직장 내 업무환경에 대해서도 대책을 찾아가야 한다는 지적은 꾸준히 나오고 있다. 특히 IT업계 등 주 52시간제 시행으로 명목상의 노동시간은 줄었지만 실제 업무 강도는 더욱 높아진 산업 분야에선 특성에 맞는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연주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연구소 차장은 “게임업계 노동환경을 살펴보면 주 52시간제의 시행으로 근무시간은 일정부분 감소한 것이 맞지만, 퇴근 때 번아웃을 경험한 경우는 높아지고 있다”며 “주어진 시간 안에서 근무를 마쳐야 하는 실정이기에 업무 스트레스는 오히려 가중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선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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