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의 다리들
정월대보름의 꽉 찬 달이 떠오르는 저녁, 집집마다 등불이 걸렸다. 솥에 찐 찰밥으로 배를 채운 아이들이 어둑해진 하늘에서 연을 거둬들이면, 공터에서 마른 짚단을 태운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풍물패의 공연이 벌어지자 벌써부터 탁주에 취한 취객들이 불 주변을 돌며 춤을 췄다. 주민들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강가로 쏟아져 나와 섞였다. 대나무 자루에 걸린 초롱에서 새어나온 은은한 불빛이 반딧불 무리처럼 긴 행렬을 이뤘다. 어른들은 광통교를 시작으로 청계천의 열두 다리를 밤새도록 밟아 돌아다녔고, 쌀가루를 하얗게 얼굴에 뒤집어쓴 아이들이 멋모르고 대열의 꼬리에 따라붙었다. 다리로 다리를 밟아 액을 막는다는 뜻의 풍속이라는데, 그 의미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먼 옛날에도 거의 없었을 것 같다. 그저 도시 전체가 낭만에 흠뻑 젖은 밤이 지나가는 게 다들 아쉬워서 밤을 배회하지 않았을까. 마굿간에서 태어났다는 예수의 생일을 떠올리지 않고도, 현대인들 역시 한파가 덮친 거리로 끌려나간다. 침엽수 트리, 알전구와 눈꽃 장식, 구세군의 종소리, 성가대의 찬송가 혹은 합창단의 캐럴송, 호두까기 인형과 연말특선 영화, 솜털로 만들어붙인 가짜수염, 와인을 거덜내는 파티가 벌어지는 식탁…… 기원이야 무엇이든 마음을 들뜨게 하는 축제의 본질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다리로 다리를 밟아 건너보자는 내 기행의 개념도 같은 것이었지만 축제의 들뜸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제 서울의 다리는 대부분 인간의 다리보다는 자동차의 바퀴를 지탱하기 위해 존재한다. 도시의 걸음에 낭만을 입히기 위해 반세기 만에 복원된 청계천의 다리들에도 문화적 단절의 흔적은 남아있다. 정월대보름 다리밟기 행사의 본무대였던 광통교를 건너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평범한 철골 콘크리트 교량인 지금의 광교가 놓인 자리를 걸어야 할까, 아니면 세월의 질감이 빠진 매끈한 새 돌로 그 옆에 다시 쌓아올린 광통교를 걸어야 할까? 수표교를 건너려면 옛 돌이 보존된 장충단공원의 연못으로 가야 할까, 모양만 겨우 본뜬 청계천의 나무 다리로 향해야 할까? 레플리카로 부르기도 민망한 새 다리에 이름만 옮겨붙인 모전교를 건너면 정말 모전교를 건넌 것일까? 청계천의 다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대명사로만 문장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 고증의 부실함만을 탓하는 건 가혹한 일이다. 이 불확실성은 그보다는 수백년 동안 파내고 들어엎기를 반복한 청계천의 운명을 닮았다.
최초의 돌다리 중 하나인 광통교는 600여년 상업과 서민 문화의 중심지
조선시대엔 ‘신분 낮은 자들의 거리’라고 하여 ‘저잣거리’라고 불렸다
이명박의 복원 사업은 조선 영조의 청계천 준설과 몇가지 점에서 닮은꼴
청계천의 옛이름은 개천(開川)이었다. 문자 그대로는 ‘물을 파내다’라는 뜻이고, 조선 태종이 도성 주변 작은 개울의 물길을 정비하고 냇가에 돌다리들을 놓으면서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작은 개울을 뜻하는 일반명사 개천은 청계천을 지칭하는 이 고유명사의 용법이 확장되면서 딸려나왔다. 최초의 돌다리 중 하나인 광통교 주변은 지난 600여년간 상업과 서민 문화의 중심지였고, ‘신분 낮은 자들의 거리’라고 하여 저잣거리라고 불렸다. 도성을 들고나는 물자와 돈이 모이는 광통교 저잣거리는 (예술이라는 분명한 개념이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예술가들이 활동했던 무대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에는 광통교 주변에 한글 소설의 필사본을 빌려주는 세책방이 즐비했다. 주요 독자는 부녀자들이었고, 문자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연기력을 곁들여 소설을 읽어주는 전기수의 낭독을 듣는 쪽을 선호했다. 전기수는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길목인 청계천의 돌다리에 주로 자리 잡고, 절정에 치달을 때쯤 마치 드라마의 광고 시간처럼 공연을 멈추고 엽전을 거둬들였다고 한다. 이 시기 널리 읽힌 소설의 대부분은 작자 미상이다. 지식과 문자를 적절히 조합해서 긴 이야기를 써나가는 것은 당시로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기예가 아니었다. <사씨남정기>의 김만중과 <홍길동전>의 허균처럼 양반 계급의 문인이 몰래 붓을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영화 <음란서생>은 여기서 한발 나아가, 조선 최고의 문장가가 익명으로 쓴 도색 소설을 세책방에 공급했다는 가설을 내세운다.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은 상상이다. 김영하는 PC통신에 올린 무협지 형식의 소설로 작가 경력을 시작했고, 나도 한때 로맨스 소설을 몰래 게시판에 올리고 독자 반응을 살폈던 적이 있다.
저잣거리의 문화가 왕궁의 담벼락을 넘는 모습은 영화 <왕의 남자>에 더 현실적으로 드러나 있다. 영화 속에서 기녀 출신이었던 장녹수는 후궁이 되어 왕의 마음을 사로잡고, 장녹수가 왕의 아들을 낳는다는 내용의 풍자극으로 거리를 들썩이게 만든 놀이패는 포승줄에 묶여 왕 앞으로 끌려간다. 하지만 왕이 사랑하는 저잣거리의 여자를 곁에서 뜯어낼 수 없듯이, 왕마저 웃겨버린 저잣거리의 남자들을 벌할 수도 없다. 변덕스러운 권력의 취향과 충동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 난 구멍으로, 궁궐과 청계천 저잣거리를 이어주는 은밀한 통로와 같았다. 어깨 너머로 배운 그림을 광통교의 서화 상인들에게 내다팔던 장승업 같은 화가는 이 구멍을 비집고 궁궐로 들어갔다. 반대로 궁궐에서는 근엄한 왕의 표정을 화폭에 담던 김홍도의 익살맞은 풍속화가 광통교의 서화 상인들에게 비싼 값에 팔려나가기도 했다.
영화와 달리 실제 장녹수는 딸을 낳았지만, 후궁의 아들이면서 왕이 된 사례는 조선 왕조를 통틀어 일곱 건이나 된다. 반대로 적장자 출신으로 왕이 된 세자 역시 일곱명뿐이다. 왕위 계승을 결정하는 혈통의 셈법은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왕을 낳은 후궁 중에는 영조의 어머니였던 숙빈 최씨처럼 허드렛일을 하던 무수리 출신의 여성도 있었다. 무수리 시절 숙빈 최씨는 빨랫감을 이고 궁궐 바깥의 청계천을 셀 수 없이 드나들었을 것이다. 왕의 비단옷도, 천민의 넝마도 청계천 돌다리 밑 빨래터에서 물에 푹 담가야 씻어낼 수 있었다. 절반은 세속의 신분인 무수리는 궁녀처럼 순결이나 비혼의 제약을 받지 않았기에, 숙빈 최씨의 과거와 기혼 여부는 아직까지도 다분히 정치적인 베일에 가려져 있다. 왕의 친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당시에도 끊임없이 영조를 괴롭혔고 훗날 이인좌가 일으킨 반란의 대외적인 명분이 되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오랜 속담은 개천과 용을 무엇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미묘하게 다르게 읽힌다. 어쩌면 본래 이 속담은 사회적인 주장보다는 음모론적인 암시를 담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한편 한양의 모든 빨랫감과 쓰레기가 모이던 청계천의 오염 문제는 영조의 골머리를 썩였다. 이주민들이 정착한 강변의 거주촌이 확장하면서 당시 청계천은 생활 하천으로서 수명을 다해가고 있었다. 바닥이 얕아져 길이 막힌 물은 악취를 풍겼고, 반대로 큰 비가 내리면 있으나마나한 제방 너머로 넘친 물에 가옥들이 침수되기 일쑤였다. 개국과 함께 파낸 물길을 다시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돈과 노동력을 엄청나게 잡아먹는 치수 사업은 민의를 잃기 쉬운 정치적인 변수였으므로 영조는 조심스럽게 고민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청계천 준설에 관한 영조의 근심이 엿보인다. 과거 시험장에 방문하여 청계천을 다시 트는 것이 이로운지 해로운지를 묻는 문제를 직접 던진 적도 있을 정도니까. 물론 영조는 청계천을 되파기로 마음을 굳혔으므로 장원급제의 가능성을 지닌 답안의 방향은 정해져 있었을 터다.
서민 거주지를 관통하며 생활용수를 대는 청계천의 관리 방침은 시대마다 바뀌었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역시 청계천을 파내는 것과 덮는 것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청계천변을 따라 전쟁 난민의 판잣집이 통제불능으로 늘어나자 이승만 정부는 콘크리트를 쏟아부어 돌다리들과 함께 청계천을 덮어버렸다. 그 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청계천 복원 사업은 영조의 청계천 준설과 닮은 점이 몇 가지 있다. 한때 이 작업에 엄청난 재정과 주민 노역을 동원했던 영조가 정치적인 부담을 떠안았듯이, 서울시장 시절 이명박 전 대통령 역시 무리한 재정 사용에 대한 비판과 상인들의 반발을 무마해야 했다. 대통령 당선 직후 시행된 국가직 공무원시험에 영조의 치적을 묻는 문제가 출제된 걸 보면 그 역시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이 객관식 문항의 정답은, 좀처럼 연대를 식별하기 어려운 역사적 디테일을 눌러담은 다른 보기들 사이에서 응시자들에게 유혹적인 윙크를 날리고 있었다. “④청계천을 준설하여 도시를 재정비하고자 하였다.” 영조가 출제했던 과거 시험 문제처럼 답은 정해져 있었고, 응시자들은 고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개천이라는 옛 이름 그대로 청계천은 처음부터 인공수로의 성격 지녀
전시적 복원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다르고 정치적 성향 위에 포개져
다만 ‘청계천 8가’의 노랫말에 담긴 삶의 풍경들은 슬프게 지워져 갔다
개천(開川)이라는 옛이름 그대로 청계천은 처음부터 인공수로의 성격을 지녔다. 콘크리트 복개가 무조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없듯이, 전시적인 복원이 무조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냇가의 산책로를 따라 데이트하는 연인들과 소란스럽게 물장구 치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청계천의 문제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도시 한복판에 하루 종일 음침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화물차라도 한 대 지나가면 불안한 떨림과 함께 먼지를 쏟아내던 고가도로를 대체 누가 그리워할까? 그래서 청계천 복원을 세기의 치적으로 꼽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실효적인 이주대책 없이 내몰려야 했던 청계천의 상인들과 이 문제로 논쟁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며, 불가피한 희생이었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을 때조차 스스로 그런 희생을 치를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빛과 어둠에 대한 반응성의 차이는 사람마다 다르고, 정치적인 성향 위에 어김없이 포개진다.
민중가요 ‘청계천 8가’의 노랫말에 담긴 삶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풍경은 천천히 지워져 갔다. “땀냄새 가득한 거리”에는 땀냄새의 빈티지함을 잘 살린 맛집과 카페가 끼어들었고, “희미한 백열등 밑으로 어느새 물든 노을의 거리”는 이제 선명한 LED 가로등이 밝힌다. 물가의 판잣집들은 콘크리트에 묻혔다. 재봉틀 하나로 생계를 꾸리던 판잣집의 빈민들은 평화시장에 가게를 냈고, 거기서 일했던 재단사 전태일은 ‘우리는 재봉틀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몸을 불살랐다. 이제는 두타와 밀리오레가 내려다보는 납작하고 볼품없는 시장 안에서도 삶의 높이는 들쭉날쭉 벌어져 있었다. 다시 청계천에 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평화시장 앞에도 다리가 놓였다. 다리 한가운데 세워진 전태일 동상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록스타를 만난 팬처럼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기념사진을 찍는 정치인들에게 물어봤을 것이다. “너 대학은 나왔냐?” 초등학교를 중퇴했던 전태일은 정치인까지는 아니고 대학생 친구 하나를 가져보는 게 꿈이었다. 어떤 기념물은 조용한 슬픔을 남긴다. 눈앞에서 충분히 멀어져야만 사랑받을 자격도 생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