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안될거 왜 혼인신고까지 하냐고요?”

2020.05.17 15:33 입력 2020.05.25 18:13 수정

·성소수자 권리 찾기 김규진씨 부부의 외침

김규진씨(29)는 지난 7일 서울 종로구청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했다. 김씨의 트위터에서 이 소식을 접한 누군가가 댓글을 남겼다. “어차피 안될 거 굳이 왜 혼인신고까지 하는거에요?” 그런 그에게 김씨가 답했다.

“법 앞에 내가 어떤 결과를 받게 될지, 그리고 그 결과로 무얼 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위해선, 우선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냥 결혼 1주년이라 남들 다 하는 것 해보고 싶었습니다.”

지난 7일 종로구청에서 받은 혼인신고 불수리 통지서. 김규진씨 제공

지난 7일 종로구청에서 받은 혼인신고 불수리 통지서. 김규진씨 제공

레즈비언인 김씨는 남성이 아닌 여성과 결혼했다. 지난해 5월 미국 뉴욕에서 혼인신고를 마쳤고, 그해 11월 가족과 친구들을 초대해 결혼식을 올렸다. 내친 김에 결혼 1주년을 맞아 한국에서도 혼인신고를 해보기로 했다.

“늘 ‘안 되겠지’ 생각했거든요. 결혼식 때 와이프에게 쓴 편지에도 ‘우리가 혼인신고서를 제출하면 다음날 거절 당하겠지’라는 구절이 있어요. 그러다 대한항공에서 동성부부의 마일리지를 합산해줬다는 뉴스를 보면서 깨달았어요. 뭔가 시도를 해야 변화가 있다는걸요. 혼인신고는 납세자로서 당연한 권리라는 생각도 했어요. 우리는 부부이고, 세금 내는 시민이니까, 못 할 이유가 있나 싶었죠.”

김씨는 지난 10일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혼인신고서를 제출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어차피 안 될 일이라고 덮어두기엔, 직접 확인하고 싶은 부분도 많았다. 김조광수·김승환씨 부부가 서울 서대문구청에서 혼인신고 불수리 통보를 받은 것이 2013년이다. 국가가 동성 간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법적 근거는 무엇인지, 7년 전과 달라진 점은 없는지 알고 싶었다. 미국에서 받은 혼인증명서가 영향을 미칠지, 모든 구청이 일관된 매뉴얼을 가지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소수자임을 자각하다

혼인신고 전, 김씨는 주변 이성애자 친구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구청에서 서류를 접수하면 3~7일 내 문자로 결과가 통보된다고 했다. 자신도 “접수하고 불수리 통보 받고 끝”일 줄로 알았다. 동성부부는 첫 관문인 서류 접수조차 쉽지 않았다.

김규진 부부의 제주도 웨딩 사진. 김규진씨 제공

김규진 부부의 제주도 웨딩 사진. 김규진씨 제공

“구청 직원이 저보고 ‘대리인’이냐고 묻더라고요. 부부가 모두 여성이라고 하니 그때부터 얼굴이 사색이 됐어요.”

김씨는 “현행법 어디에도 동성 간 혼인을 ‘금지’하는 조항은 없다”고 했다. 직원들은 두꺼운 사례집을 뒤적였고, 대법원 법원행정처에 유권해석도 의뢰했다. 막내 직원부터 민원실 최고참까지 여러명이 달라붙었다.

김씨가 최종적으로 불수리 통지서를 받기까지는 4시간이 걸렸다. 그에게 이 4시간은 “공권력 앞에서 소수자임을 뼈저리게 자각한 시간”이었다.

“모두가 (저 때문에) 힘들어보였고 그래서 너무 미안했어요. 그런데 사실 혼인신고가 미안할 일은 아니잖아요. 비참했습니다.” 이런저런 법률을 언급하며 “선생님의 혼인신고는 수리될 수 없을 것”이라는 직원 설명을 들을 때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레즈비언 김규진씨.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레즈비언 김규진씨.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법원행정처는 구청 생각과 달리 ‘접수 후 불수리’가 원칙이라는 답변을 내놨다. 김씨가 공식적으로 불수리 통지서를 받으려 한 건, 소송 등 다음 대응을 준비하게 됐을 때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구청 전산 시스템에선 여성과 남성이 혼인하는 경우가 아니면 개인정보 입력 자체가 불가능했다. 구청 직원들은 어쩔 수 없이 수기로 신고서를 작성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한 중년 여성은 “국회에서 법제화를 노력 중인 사람들이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보자”며 위로했다. 다시 김씨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지난 2013년 9월 7일 서울 청계천 광통교 앞에서 한국 최초로 동성 결혼을 하는 김조광수씨와 김승환씨의 결혼식이 열리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난 2013년 9월 7일 서울 청계천 광통교 앞에서 한국 최초로 동성 결혼을 하는 김조광수씨와 김승환씨의 결혼식이 열리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

국가는 김씨의 혼인신고서를 받아주지 않으며 어떤 근거를 댔을까. 사실 현행 법률 어디에도 동성결혼을 금지한 조항은 없다. 남성과 여성의 결합만 혼인이라고 규정한 조항도 없다. 다만 ‘혼인은 여성과 남성의 결합’이라는 관습이 사회에 남아있을 뿐이다.

처음 김씨가 받은 불수리 통지서에는 ‘헌법 제36조1항’(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한다)과 ‘민법 815조1항’(당사자 간 혼인의 합의가 없을 때)이 불수리 사유의 근거로 인용돼 있었다. 한국에서 동성 간 혼인은 불가능하며, 그렇기에 동성 간 ‘혼인 의사의 합치’가 있었다고 볼 수 없다는 순환 논리이다.

이 통지서는 이후 구청 측 요구로 한 차례 수정됐다. 구청은 특정 법 조항이 언급된 부분을 삭제하고 “현행법 상 수리할 수 없는 동성 간의 혼인”이라는 문구로 수정했다. 이들의 혼인이 정확히 그 법률을 위반한 것은 아니라는 법원 의견을 반영한 것이었다.

2004년에도 한 남성 동성애자 부부가 서울 은평구청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했다가 불수리됐다. 그 이후의 법률적 대응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2013년에는 김조광수·김승환 부부가 서대문구청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했다. 이들 부부는 이듬해 법원에 불수리 통보를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1·2심 모두에서 각하됐다.

당시 법원은 “시대적, 사회적, 국제적으로 혼인 제도를 둘러싼 여러 사정이 변화했다고 하더라도 별도의 입법적 조치가 없는 현행 법체계 하에서 ‘동성 간의 결합’을 법률상의 ‘혼인’으로 허용된다고 볼 수는 없다”며 공을 국회로 넘겼다. 이는 동성애자의 혼인을 법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를 판단한 첫 사례였다.

성소수자 가족구성원 보장을 위한 네트워크 회원들이 11월 13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동성혼·파트너십 권리를 위한 성소수자 집단 진정’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준헌 기자

성소수자 가족구성원 보장을 위한 네트워크 회원들이 11월 13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동성혼·파트너십 권리를 위한 성소수자 집단 진정’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준헌 기자

성소수자 부부들은 ‘어차피 안 될 것’이라는 말에 주저앉지 않고 계속해서 법원이나 정부기관 문을 두드린다. 이미 많은 성소수자 부부가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성소수자 1056명은 지난해 11월 동성커플을 위한 제도적 대책을 마련하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집단 진정을 넣었다. 성소수자가족구성권보장네트워크가 총 366명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에서 42%는 동거 생활 중 파트너의 수술이나 입원을 경험했고, 그 중 82%는 의료 과정에서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경험했다.

파트너가 아파도 보호자로 인정 받지 못했다는 사람, 응급 상황에서 수술동의서를 작성할 수 없었다는 사람, 주택자금을 분담하고도 공동명의로 할 수 없었다는 사람…. 지난해 11월 국민과의 대화에서 ‘동성애 차별은 원론적으로 안 되지만 동성혼 인정은 사회적 합의가 없어 시기상조’라는 문재인 대통령 발언은 그래서 모순적이다. 이들 부부에겐 혼인하지 못할 상황 그 자체가 이미 차별이다.

동성 결혼식을 올린 사실이 알려지고 김씨에게는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결혼한 레즈비언으로 대표성을 띠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느냐’는 질문에 김씨는 “어차피 10년 후엔 잊혀질 것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했다.

“10년 후 동성혼은 반드시 법제화될 것이고, 저도 머지않아 그들(법적인 부부)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고요.”

5월17일은 국제 성소수자 혐오반대의 날 30주년이다. 2020년 현재 동성결혼을 허용한 나라는 국가는 총 28개국. ‘시민결합’까지 합쳐 동성커플의 법적권리를 인정하는 국가는 40여 개가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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