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은 옆집, 비즈니스센터는 길 저쪽 입니다” 석탄먼지 날리던 폐광촌, 호텔이 되다

2020.06.05 16:20 입력 2020.06.05 23:34 수정

정선군 고한읍 ‘마을호텔 18번가’

지난달 19일 강원 정선군 고한읍에 문을 연 마을호텔 18번가의 외관. 마을호텔 18번가 협동조합 제공

지난달 19일 강원 정선군 고한읍에 문을 연 마을호텔 18번가의 외관. 마을호텔 18번가 협동조합 제공

방문을 열었다. 좌식이다. 토퍼만 깔려 있다. 침대 없는 방은 오랜만이다. 창문도 없다. 살짝 실망하려는데, 반전이다. 욕실은 최신식이고, 침구와 수건은 청결하다. 어메니티도 고루 갖춰져 있다. 자고 일어나니 개운하다. 외부의 빛이나 소음이 없어서인 듯하다. 객실 문을 열고 나오자 옆 건물인 카페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다. 토스트기와 식빵, 버터와 잼, 커피와 주스, 삶은 달걀이 정갈하게 놓였다. 하루의 시작이 상쾌하다.

지난달 20~21일 강원 정선군 고한읍 고한18리의 ‘마을호텔 18번가’에 다녀왔다. 마을호텔이란, 마을의 자원을 체계적으로 조직해 마을 전체를 하나의 호텔처럼 운영하는 체제를 말한다. 한 건물에서 숙식 등 모든 서비스가 이뤄지는 방식을 벗어나 이웃 건물과 상가들이 호텔 기능을 나누어 맡는 형태다.

고한에서 5월19일 문을 연 마을호텔 18번가는 국토교통부 소규모 재생사업의 지원을 받았다. 운영주체는 주민 11명이 출자해 조성한 협동조합이다. 조합은 식당으로 쓰이던 빈집을 말끔히 수리해 객실을 만들었다. 크기가 다른 방 3개(별방·빛방·꽃방)를 갖췄다. 가격은 1박에 9만~15만원이다.

2년 만에 깔끔하게 바뀐 골목길. 마을호텔 18번가 협동조합 제공

2년 만에 깔끔하게 바뀐 골목길. 마을호텔 18번가 협동조합 제공

바로 옆 카페에서는 조식을 제공하고, 중국집과 연탄구이집은 레스토랑 역할을 맡는다. 마을회관은 컨벤션·세미나룸, 출판인쇄를 하는 기획사는 비즈니스센터가 된다. 사진관과 방탈출 카페는 편의·오락시설 담당이다. 숙박객들은 ‘비지터 카드’를 보여주면 이들 업소에서 10% 할인이나 무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쇠락해가던 강원도 탄광마을
주민 주도로 2년간 ‘도시재생’
마을 곳곳 호텔 업장 기능 분담
지역민 이익 창출 ‘플랫폼’ 넘어
지속가능한 ‘문화공간’ 꿈 꿔

마을호텔 18번가는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았다. 고한 주민들의 2년에 걸친 노력의 성과다. 이 일대는 이태 전만 해도 낡고 허름한 폐광촌이었다. 광업으로 번성하던 강원 고한·사북 지역은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정책이 시행되며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청년들이 떠나고 인구는 급격히 줄었다. 폐광지역개발지원특별법이 제정되며 강원랜드(하이원리조트)가 들어서자 주민들은 희망을 걸었다. 일자리가 상당수 늘어나기는 했다. 그러나 연간 600만명에 이르는 방문객들은 모든 것이 갖춰진 리조트 안에만 머물렀다. ‘진짜 고한’을 찾아오는 이는 거의 없었다.

밤이 되면 곳곳에 주민들이 만든 LED 꽃이 피어난다. 마을호텔 18번가 협동조합 제공

밤이 되면 곳곳에 주민들이 만든 LED 꽃이 피어난다. 마을호텔 18번가 협동조합 제공

고한18리 주민들은 매머드 위락시설이 자신들의 삶을 바꿔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스로 마을을 변화시켜보기로 했다. 주민들은 골목의 지저분한 폐전선을 정리하고, 곳곳에 쌓여 있던 쓰레기 더미를 치웠다.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던 게시판과 담장을 허물었다. 낡은 집과 점포들을 깔끔하고 세련되게 리모델링했다. 집집마다 문 앞에 작고 예쁜 화분을 놓았다. 꽃을 구경하기 힘든 겨울철을 위해 LED 야생화 만드는 법도 배웠다. 해가 지면 골목길 구석구석에 주민들이 만든 LED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지난해 여름에는 ‘고한 골목길 정원박람회’를 개최해 많은 방문객을 불러모았다.

김진용 ‘마을호텔 18번가 협동조합’ 상임이사(47)는 고한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 아버지는 광부였다. 어린 소년은 고한에 사는 일이 부끄러웠다. 당시 고한은 온통 석탄 먼지로 그득했다. ‘아내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인 못 산다’는 말이 오고갈 정도였다. 대학 시절과 이후 몇 해 동안 외지를 떠돌던 청년은 결국 고한으로 돌아왔다. 철이 들고 보니 ‘고한을 부끄러워하던’ 자신이 더 부끄럽게 느껴졌다. 추진력 뛰어난 유영자 이장(65)과 의기투합해 2018년 ‘고한18번가 마을만들기위원회’를 결성했다. 유 이장이 위원장을, 김 상임이사가 사무국장을 맡았다.

지난해 8월 ‘고한 골목길 정원박람회’에서 열린 콘서트. 마을호텔 18번가 협동조합 제공

지난해 8월 ‘고한 골목길 정원박람회’에서 열린 콘서트. 마을호텔 18번가 협동조합 제공

그는 마을재생 작업에 본격 착수하기 전 주민들과 인터뷰를 한 기억을 떠올렸다. 연로한 이들은 “내가 여기 살고 싶어서 살겠느냐”며 자조했다. 그러던 주민들이 지금은 “우리 마을에 자긍심과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벤치마킹하고 싶어 하는 외부 견학단도 끊임없이 찾아온다. 김 상임이사는 “우리는 치열한 ‘마을 만들기 전투’에서 살아남은 승자들”이라며 웃었다.

들꽃사진관을 운영하는 이혜진 대표(27)는 골목길의 ‘기록자’다. 정선군 남면 출신인 이 대표는 서울의 NGO에서 인턴 생활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며 정선 곳곳을 탐험하다 취미이던 사진을 생업으로 삼게 됐다. 마을의 변화가 시작될 무렵 이 골목에 사진관을 열었다. 이후 마을 만들기의 과정을 빠짐없이 카메라에 담았다. “행정(관청)의 도움을 바라기 전에 모든 주민들이 시간과 돈과 정성을 투자했어요. 쓰레기 청소든 게시판 철거든 ‘다 함께’ 한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민등록증 사진을 찍으러 사북에서 왔다는 임하연양(17·사북고 2년)에게 전에 여기 와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오랜만에 와보고 깜짝 놀랐어요. 예전에는 낡고 허술했는데, 지금은 예쁘게 잘 꾸며져 있네요.”

마을 가꾸기를 통해 새롭게 탈바꿈한 주택의 과거(위)와 현재(아래).  마을호텔 18번가 협동조합 제공

마을 가꾸기를 통해 새롭게 탈바꿈한 주택의 과거(위)와 현재(아래). 마을호텔 18번가 협동조합 제공

마을호텔 18번가는 고한 주민들에게 또 다른 도전이다. 지난 2년간의 변화가 깨끗하고 아름다운 외관이라는 ‘하드웨어’를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이제는 그 안을 내실 있게 채우는 ‘소프트웨어’의 변화에 집중하려 한다. 마을호텔은 이들에게 단순한 숙소가 아니다. 주민들은 철저히 주민의 관점으로, 주민의 이익을 도모하고, 그리하여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는 구조로 향하는 ‘플랫폼’을 꿈꾼다. 김 상임이사는 “지금까지 우리가 이뤄낸 성과도 의미가 작지 않지만, 사업적으로 가치를 갖지 못하면 변화는 이어질 수 없다”면서 “마을호텔 사업을 조기에 안착시키는 게 최우선 목표”라고 말했다.

이번에 개장한 마을호텔은 1호점이다. 옛 초원식당 자리에 세워졌다고 해서 ‘초원점’으로 명명됐다. 조합은 올해 안에 초원점 근처 민박집을 개조해 2호점을 낼 계획이다. 향후 5년 안에 고한읍 전역에서 10호점까지 여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기존에 영업하던 숙박업소들의 생존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공존하기 위한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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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2018년 충남 공주 봉황동에 터를 잡은 ‘봉황재’는 마을호텔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알려져왔다. 권오상 대표가 한옥을 개조해 게스트하우스를 조성하고, 투숙객을 동네 명소와 식당에 연결시키는 시스템으로 주목받았다. 다만 엄밀한 의미에서 마을호텔이라기보다 ‘커뮤니티호텔’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김진용 상임이사는 봉황재의 실험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개인이 주도해 지역의 맛집이나 놀거리를 결합시킨 방식인 만큼, 마을호텔과는 다르지 않나 싶다. 커뮤니티호텔에 가깝다고 본다”고 했다. 그는 마을호텔 18번가의 경우 소유·운영 주체가 협동조합으로, 의사결정이 조합 차원에서 민주적으로 이뤄지며, 이익을 거두면 마을이 공유하게 된다는 점을 차별성으로 꼽았다.

고한의 변화를 초기부터 지켜본 한종호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장은 “고한의 성공은 ‘톱다운’ 방식(하향식)으로 진행돼온 기존의 지역재생 사업과 정확히 반대되는 길을 걸음으로써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중앙정부와 수많은 지방자치단체들이 지역 소멸을 막기 위해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있지만 의미 있는 성과로 이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한 센터장은 “해당 지역 주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 지역에 잘 맞는 산업이 무엇인지 고려하기보다 다른 지역에서 성공한 것을 그대로 가져와 이식하려는 경우가 많다”며 “그러다 보니 공무원이 먼저 나서고, 외주업체가 사업을 주도하고, 주민은 들러리를 서거나 방관자로 남는 일이 되풀이되곤 했다”고 지적했다. 반면 고한의 지역재생 사업은 주민들이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사업 진행을 주도했으며, 행정기관이나 외부 전문가와 외주업체들은 측면 지원에 집중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한 센터장은 “완전히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낸, 극히 드문 사례”라고 말했다.

“식당은 옆집, 비즈니스센터는 길 저쪽 입니다” 석탄먼지 날리던 폐광촌, 호텔이 되다

그럼에도 물음은 남는다. 마을호텔 18번가는 과연 상업적으로 지속 가능한 모델이 될 수 있을까. 숙박비는 저렴하다고 보기 어렵다. 호텔 주변에서 먹고 즐길 거리도 아직은 충분하지 않다.

한 센터장은 마을호텔의 실험이 성공하려면 철저한 원가 계산을 토대로 호텔의 모든 활동을 기획하고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국토부 지원으로 사업을 진행했지만, 앞으로는 치밀하고 구체적인 사업계획이 뒷받침돼야 비즈니스 모델로 안착할 수 있다는 조언이다.

도시재생 전문가인 정석 서울시립대 교수는 고한 주민들이 일궈낸 마을호텔을 ‘도시재생의 명약’이라고 표현했다. 정 교수는 “지금 우리는 개발시대에서 재생시대로 이동하고 있다”면서 “지역을 어떻게 되살려낼지 이해하기 쉽게 보여주는 사례가 마을호텔 18번가”라고 평가했다. 지속 가능성을 두고는 한 센터장과 조금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공룡과 같은 경제가 있고, 토끼와 같은 경제가 있습니다. 대기업·다국적기업·프랜차이즈기업이 공룡이라면, 마을기업·사회적기업이 토끼이겠지요. 우리가 어느 쪽을 살릴 것인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을호텔은 하룻밤 잠만 자는 숙소가 아닙니다. 지역과 사람과 문화를 체험하는 공간입니다. 이용자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소비 운동을 호소하고 싶어요. 마을호텔 18번가는 엊그제 태어난 귀한 아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민들이) 세상에 내보낸 것만 해도 대단한 일입니다. 먹을거리, 볼거리, 즐길 거리는 차차 늘어날 겁니다. 잘 키워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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