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공정성’은 이 사회의 큰 화두였다. 지난해 ‘조국 사태’부터 인천국제공항공사(인국공)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논란, 최근 전공의 파업까지 사회 갈등이 두드러질 때마다 공정성 구호가 나왔다. 이해당사자들은 정규직 지위 획득, 대입, 의사 선발 등 특정 결과물을 획득하는 데 절차상 공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때 공정이란 단어는 주로 특정 집단에 진입하기 위한 ‘자격’을 묻는 데 쓰였다. 의료서비스 접근권처럼 공정해야 마땅한 ‘기회’에 대해선 질문이 나오지 않았다. 고졸 청년, 빈곤층, 지역 거주민 등의 처지도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격 없이’ 권리를 요구하는 이들에 대한 혐오표현이 나오고, 차별이 정당화됐다.
사회학자 오찬호씨는 “ ‘공정’ 단어를 엮을 수 없는 곳에도 엮고 있다. 누가 그 말을 선점하느냐가 문제”라고 말했다. 경향신문은 3일 연구자들에게 ‘공정성 담론’의 이면을 물었다.
■일부 쟁점에 국한된 ‘공정성’
조국 사태·인국공 거쳐
전공의들 의료 파업까지
한국 사회의 최대 화두로
‘자격’만 묻고 ‘기회’엔 침묵
공정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 인천국제공항을 방문한 자리에서 비정규직 1만여명의 정규직 전환을 요청하며 논쟁거리가 됐다. 공항공사가 지난 6월 비정규직 2000여명을 직접고용하겠다고 밝히자 정규직 직원들과 취업준비생 등은 공정한 기회가 훼손됐다며 반발했다.
“선발 기준에 국한되는 논쟁이었어요. 불공정은 얘기했지만, 불평등이란 단어는 쓰지 않았습니다.” 김영민 청년유니온 사무처장은 인국공 사태 당시 공정성 담론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다고 봤다. 공항 정규직 등은 ‘정규직의 자격’은 물었지만, 정규직 바깥의 비정규직 등 노동자가 마주해야 하는 열악한 현실은 논의되지 않았다. 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해야 하는지, 정규직이 아니어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노동조건과 소득을 갖출 수 없는지 질문한 사람은 적었다.
지난해 조국 사태 때도 같은 양상이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딸이 2008년 한영외고 재학 중 단국대 의대에서 인턴을 하며 논문 제1저자로 등재됐다는 보도가 나오자 대학가에서는 ‘조국 딸 입시비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의제는 오직 입시였다. 고졸 청년이 마주한 노동조건 등을 공정과 정의의 잣대로 보는 목소리는 적었다. 집회를 주도한 측도 주로 서울 소재 유명대학 학생이었다. 당시 청년 노동자단체 ‘청년전태일’은 “1% 엘리트 대학생들의 목소리에 가려진 99% 청년들의 목소리를 알리는 장을 만들고자 한다”며 조국 후보자를 향해 편지를 띄웠지만 공정성 담론 속에 묻혔다.
올 8월 시작된 의사 파업에서도 공정성 주장은 반복되고 있다. 지난 1일 ‘젊은의사 비상대책위원회’는 출범식에서 “망가져버린 부동산정책,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전환 논란 등”을 언급하며 “공정성 없는 정부에 맞서 의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청년들로서 모든 청년들과 함께 연대한다”고 밝혔다. 이들이 주장하는 공정성의 민낯은 지난 1일 대한의사협회(의협) 산하 의료정책연구소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시한 카드뉴스에서 드러났다.
이들은 공공의대 학생 선발을 우려하며 “매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학창 시절 공부에 매진한 의사”를 선발하는 것이 객관적·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집단 진입 자격’ 논의 넘어서야
입시 서열화·정규직
경제적 지위 따른 혐오
‘공정 가면’ 쓴 차별 정당화
개인의 ‘평등할 권리’ 의제 삼아야
공정성 담론의 한계는 또 있다. 박권일 사회평론가는 “공정성은 혐오표현의 숙주”라고 말했다. “성별, 장애, 종교, 나이, 출신지역 등 정체성에 기반한 혐오는 겉으로라도 ‘잘못됐다’고들 하잖아요. 하지만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른 혐오표현은 어떤 권고조차 나오지 않아요. ‘무능해서 차별당하는 건데, 당연하지 않냐’는 식이죠.” 그는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의 ‘혐오표현 리포트’ 작성 당시 ‘빌거’(빌라 거지), ‘이백충’(월소득 200만원 노동자) 등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른 차별적 표현이 심각하다는 의견을 냈다.
오찬호씨는 젊은 세대의 공정 주장에도 이유는 있다고 봤다. “외환위기 이후 사회가 불평등해졌잖아요. 일자리도 불안했고. 그때 개인들이 붙잡았던 게 회사 이름이고, 정규직이고, 그 자리를 그나마 보장해주는 게 학벌이죠.” 그는 또 “의사들도 파업 권리가 있고, 그들 주장 자체를 부정할 순 없다”고 말했다. 다만 오씨는 공정성 주장 과정에서 공공성을 위한 정책 전반을 부정하는 태도가 문제라고 봤다. “공정은 역사적으로 흑인, 여성, 빈곤층 등 특정 인종·계층이 불공정한 상황에 노출된 것을 바꾸기 위해 등장한 용어입니다. 그 맥락을 빼고 당장의 현실만 보면 ‘왜 쟤만’ ‘왜 쟤가 더’ 같은 불만이 생깁니다.” 정부가 제도 개선 등으로 개입하는 건 불공정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인데, 공정성 논리가 더 큰 불공정을 바꾸지 못하게 하는 구실로 동원된다는 뜻이다.
‘공정성’ 구호를 공유하는 이들끼리 무엇을 공정의 척도로 보는지 시각차가 나타나기도 했다. 의사 단체는 수능 성적 등 대학 입시를 공정한 의사 선발의 기준으로 보지만,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반발하는 측은 공개채용이란 특정 형식의 직장인 선발시험을 선호했다. 인국공 정규직 측이 말하는 공정 기준에서 본다면 의협 등 의사 단체는 수능성적이 아닌 의사 국가고시를 말해야 했다. 오씨는 “파업한 의사들의 논의가 인국공 때보다 더 후퇴했다는 생각이 든다. 더 일률적이고 획일적인 방식의, 직무와도 연관성이 더 떨어지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 평론가는 “인국공 등에서 치르는 공채시험도 직무능력과 얼마나 직결되는지는 검증되지 않았다. 의사로서의 능력은 의사가 된 다음에 성과를 지표로 삼는 게 객관적”이라고 말했다.
공정성 담론을 넘어, 시민 권리의 공정을 고려해야 한다며 ‘의료 기회를 얻을 권리’도 공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우석균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는 “전체 지자체 가운데 분만 시설이 적어 아이를 낳기 어려운 지역이 4분의 1 가까이 된다. 응급환자가 있어도 병원에 30분 내 도착할 수 없는 취약지역도 5분의 2에 달한다”며 “지역적으로, 경제적으로 실재하는 건강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민 사무처장은 “공정이 외려 격차를 정당화하는 논리일 수 있다. ‘공정한 경쟁’을 넘어 개인들이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를 의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