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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1호기 해체 계획, 검증이 어렵다

2021.03.06 11:01 입력 2021.03.06 12:28 수정

고리1호기는 1978년 상업운전을 시작한 국내 첫 상업용 원자로이다. 설계수명 30년을 다한 후 한차례 수명연장을 거쳐 2017년 6월 영구정지됐다. 약 500다발의 사용후핵연료는 붕산수가 채워진 사용후연료저장조로 옮겨져 냉각되고 있다.

사용후핵연료가 저장조에서 식을 동안 해체를 위한 준비가 진행된다. 먼저 해체 승인을 받아야 한다. 해체 인허가를 위한 문서의 하나로 최종해체계획서가 포함된다. 원자력안전법에 따라 최종해체계획서 본안 마련을 위해 주민 의견 수렴을 거친다. 이를 위해 한수원은 2020년 7월 1일부터 60일 동안 고리1호기 최종해체계획서 초안의 주민공람 절차를 거쳤다. 주민공람은 고리원전의 방사선비상계획구역 내의 주민 및 경계를 포함하는 읍·면·동 주민을 대상으로 한다. 부산 기장·해운대·금정구와 울산 울주군, 남구·중구·북구·동구 그리고 양산시 등 9개 기초자치단체가 대상이다.

부산 기장군 장안읍 월내방파제에서 고리원자력 발전소 1~4호기(오른쪽부터)가 한눈에 보인다. 주영재 기자

부산 기장군 장안읍 월내방파제에서 고리원자력 발전소 1~4호기(오른쪽부터)가 한눈에 보인다. 주영재 기자

해체계획서 초안, 절반 이상 블라인드 처리

“투명하고 공개적인 설득과 정보제공을 통해 국민의 신뢰와 이해를 바탕으로 해체를 추진(한다.)” 고리1호기 최종해체계획서 초안에 나온 해체의 기본원칙 중 하나이다. 주민공람은 끝났고 공청회 절차도 막바지 단계에 있지만, 이 원칙이 잘 지켜졌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이 있다.

해체계획서 초안은 대상지역의 시청, 주민센터, 마을회관 등에 비치됐지만 볼 수 있는 시간이 일과 시간으로 제한돼 있었다. 초안을 볼 수 있는 사람도 대상지역 주민으로 한정됐다. 사진을 찍어선 안 되고 복사도 안 됐다. 초안은 문서 형태로만 제공돼 시민단체나 전문가들이 접근하기 쉽지 않다. 한수원은 파일 형태로 제공하는 것에 부정적이다. 인허가 신청단계로 검토 중인 내부문서라 공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수희 에너지정의행동 국장은 “기술자나 기업의 시각만이 아니라 시민의 다양한 입장을 반영해야 안전에 가까워진다”면서 “주민공람 제도를 소극적으로 해석해 여러 제한장치를 뒀는데 다양한 시각으로 해체계획을 검증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 공개 범위를 넓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 국장은 “초안은 700페이지 분량인데 절반 이상이 블라인드 처리됐다”면서 “방사선 영향 평가를 위해 관심 핵종이 얼마나 줄어드는지도 알아야 하는데 이 내용도 비공개 처리됐다”고 말했다. 저작권법에 따라 한수원이 권한을 가진 도면 등을 비공개할 순 있지만, 안전에 관한 핵심 정보조차 비공개 처리한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고리원전 인근에서 사는 박갑용씨(부산시 시민안전대책위원회 위원)는 폐로 절차나 사용되는 기술의 구체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초안에는 원론적인 내용만 있고 검증된 기술을 담고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면서 “지역 주민을 실험용 쥐 삼아 해체 기술을 시험하는 원자력계의 실험장으로 만드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박씨는 특히 해체 과정의 안전사고 시 주민 대피 방안이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초안은 원전을 영구정지하면 환경에 대한 선량 영향이 정상 운영 때보다 낮아지고, 해체 구역 철거 때 발생하는 기체와 액체 방사성폐기물은 대부분 미립자로 여과방법으로 쉽게 제거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작업장에 차폐체를 설치해 고체 방사성폐기물이 줄 영향도 미미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2012년 미국 뉴멕시코주 칼즈배드에 있는 저준위 핵폐기물 저장시설에서 폐기물 드럼이 폭발하면서 오염물질이 공기 중에 누출되는 사고가 났듯이 철거와 폐기물 매립 과정이 완벽히 안전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초안도 방사성폐기물 저장 지역의 화재, 운송 중 폐기물 낙하로 인한 내외부 피폭, 제염 후 폐액체를 모은 탱크가 파손될 경우 등의 위험을 예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고 시나리오를 적용해도 비상계획구역 내 주민집단 유효선량값이 모두 기준치보다 낮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박씨는 “해체계획서는 계산상 대피 계획을 세울 이유가 없다고 나오지만, 조금이라도 잘못될 경우를 항상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웠으면 한다”고 말했다.

고리1호기 해체 계획, 검증이 어렵다

해체 공청회도 안 연 지자체

해체계획서 초안과 관련한 공청회는 지난해 울산에서 두차례 열렸다. 부산에서는 지난해 11월 첫 공청회가 열렸고, 2차 공청회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연기돼 오는 3월 26일 열린다. 주민공람과 공청회 등 절차는 모두 지켰지만, 실제 내용을 보면 요식행위에 그쳤다는 지적이 나온다.

초안을 공람한 주민의 수는 부산의 경우 65명에 불과했다. 양산시의 경우 방사선비상계획 구역 안에 12만명이 속하는데 열람한 주민이 한명도 없었다. 여기엔 지자체의 무관심이 한몫했다. 정 국장은 “대상지역 주민이 아니면 의견을 낼 수도 없고, 지자체는 초안에 대한 전문가 검토도 하지 않았다”면서 “지자체의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양산시 관계자는 “초안을 열람한 지역주민이 한명도 없었고, 부산에서 한사람이 왔을 뿐”이라면서 “열람하는 사람이 없으니 설명회도 열지 않았다”고 말했다. 부산시 관계자는 “공청회에는 지자체 주민만 참여할 수 있고, 발언자는 사전에 신청해 질문하고 답변을 받게 된다”면서 “관심 있는 외부인은 참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리1호기 해체 계획, 검증이 어렵다

안전보다 해체 산업 육성에 우선

대다수 국가는 원자력의 비용 증가로 인한 경제성 하락과 핵폐기물 문제 때문에 폐로를 결정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그보다는 해체 산업 육성에 주목했다는 게 정 국장의 해석이다. 그는 “2015년 고리1호기 폐로 결정을 내렸을 당시에 폐로로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을 해체 산업을 육성해 얻을 수 있는 이득으로 만회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며 “해체 산업 육성을 위한 정책적 판단이 폐로를 결정한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말했다.

정수희 국장은 안전을 우선한다면 고리가 다수 호기 가동지역이라는 점에서 다수 호기 해체 전략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체하면 기본적으로 진동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고리1호기와 2호기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시설도 있다. 인접해 3·4호기도 있다는 점에서 안전하게 해체한다면 최소한 설비를 함께 쓰는 1·2호기를 묶어 해체하는 게 바람직하다.” 고리1호기 즉각 해체를 택한 현재의 해체계획서는 ‘한국형 해체 기술’을 되도록 빨리 시험해보고 이를 토대로 해외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국내 원전 해체 시장은 원전 30기에 대해 1호기당 해체비용을 8129억원(산업통상자원부 고시)으로 추산할 경우 총 24조4000억원으로 추정된다. 전 세계로 보면 2020년 3월 기준 운전 중인 원전은 442기, 영구정지 원전은 187기이다. 이중 21기만 해체 완료됐는데 상업용 원자로는 8기에 불과하다. 수명이 다한 원자로가 늘면서 원전 해체 시장 규모는 2050년을 전후로 누적 500조원대로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원전 해체 산업의 성장성이 크다고 보고 2015년부터 본격적인 산업 육성에 나섰다. 2015년 10월 ‘원전 해체 산업 육성을 위한 정책 방향’을 발표하고 2021년까지 96개 해체 기술을 개발하기로 했다. 원전 해체 기술 개발은 착실히 진행됐다. 한수원에 따르면 2021년 2월 기준 산업부가 맡은 58개 상용화 기술 중 ‘원격조작·취급·제어’ 기술 등 54개가 개발 완료됐다.

나머지 4개 기술(지하수 감시 및 오염평가 등)은 고리1호기 해체 일정에 맞춰 2021년까지 완료할 예정이다. 과기부가 맡은 핵심 기반 기술 38개도 올해 개발 완료될 것으로 보인다. 과기부 관계자는 “선진국 대비 기술 수준이 95%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개발한 기술은 산업부에서 세운 원전해체연구소에서 검증과 실증 작업을 거치게 된다”고 말했다.

전문가 사이에서는 해체 산업의 경제성이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산업부와 과기부가 공동 추진한 ‘원전 해체 핵심기술 개발사업’이 지난달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탈락한 것도 이런 의구심이 해소되지 않아서다. 산업부 관계자는 “납득하긴 어렵지만 심사기관은 국내 산업계 참여가 부족하고, 해외시장 진출 가능성이 불확실하다고 봤다”면서 “사업 내용을 보완해 다시 예타를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애초에 원전 해체는 산업이 될 수 없다는 입장도 있다. 한병섭 원자력안전연구소 소장은 “해체는 산업이 아니라 일종의 폐기물을 처리하는 단발성 사업에 불과하다”면서 “해체 산업이 일종의 돈을 먹기 위한 복마전으로 변한 걸 예타에 참여한 공무원들도 느낀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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