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와의 대화, 그 후 18년

2021.03.13 17:02

2003년 3월 9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시행한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는 검찰개혁의 신호탄이었다.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에서도 검찰개혁이란 단어는 종종 나왔지만 구호에 그쳤다. 국민의 정부 초기 김대중 대통령은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선다”고 일갈했지만 공언에 그쳤다. 그간 정치권력은 검찰개혁 대신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검찰을 이용했다. 본격적인 검찰개혁은 참여정부 들어 시작됐다. 검찰의 저항은 거셌다. 검사와의 대화에서 검찰은 고졸 출신 변호사인 노 전 대통령에게 ‘학번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을 정도로 저항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평검사들은 ‘검찰 독립을 위해서 인사권에 간섭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2003년 3월 9일 열린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  / 청와대 사진기자단

2003년 3월 9일 열린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 / 청와대 사진기자단

2003년 2월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하면서 개혁 작업이 시작됐다. 여성, 비검사, 낮은 기수 출신의 장관을 임명해 개혁 의지를 공고히 한 것이다. 검경수사권 조정과 검찰 중립성 확보 방안 등 구체적인 검찰개혁안도 나왔다. 참여정부는 정치권력으로부터 검찰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개혁 방향을 정했다. 청와대는 개별 사건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다는 방침도 세웠다. 검찰 독립성 보장 방침에 따라 당시 검찰은 살아 있는 권력에도 거침없이 칼을 겨눴다.

노 전 대통령의 참모이자 왼팔인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후원자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을 구속했다. 권력에 좌고우면하지 않는 검찰이라는 여론이 생겨났고 국민적 지지가 이어졌다. 여기에 한나라당에 ‘차떼기 당’이라는 오명을 안겨준 대선자금 수사까지 이어지면서 검찰의 신뢰도는 치솟았다. 검찰은 국민의 검사라는 평을 받았고, 동시에 검찰개혁 열망은 점차 희석됐다. 국민 지지에 힘입어 참여정부 첫 검찰총장인 송광수 총장은 “차라리 내 목을 쳐라” 하며 당시 정부가 추진하던 중수부 폐지에 반발했다.

보수정권 9년, 공고해진 검찰공화국

참여정부는 검찰개혁에 실패했다. 개혁 실패에 대한 결과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라는 치명적인 비극으로 이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저서 <문재인의 운명>에서 “우리는 검찰개혁의 출발선을, 검찰의 정치적 중립으로 봤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순식간에 과거로 되돌아가 버렸다. 검찰을 장악하려 하지 않고 정치적 중립과 독립을 보장해주려 애썼던 노 대통령이 바로 그 검찰에 의해 정치적 목적의 수사를 당했으니 세상에 이런 허망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라고 회고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들어서면서 ‘검찰공화국’이 도래했다. 보수정권은 “정치적 반대나 주장은 물론 시민사회의 집단적 요구나 민원조차 업무방해죄나 교통방해죄, 명예훼손죄 등의 형사문제로 만들어 검찰의 폭력 아래 처단했다.”(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검찰은 어떻게 무소불위 권한을 가지게 되었나>)

이명박 정부는 청와대에 검사를 편법 파견하는 방식으로 공생관계를 형성했다. 이명박 정부에서만 22명의 검사가 사직서를 내고 청와대에서 근무한 후 모두 검찰로 복귀했다.(청와대 검사 파견 현황 보고서, 참여연대) 이명박 정부에서도 검찰개혁 논의는 있었지만, 개혁이 추진될 때마다 검찰은 집단 반발하며 기득권 수호에 나섰다. 2011년 수사권과 공소권을 분리할 수 있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당시 대검 검사장과 검사들은 집단으로 사표를 제출하며 반발했다. 김준규 당시 검찰총장은 여기에 책임을 지고 임기 만료 46일을 앞두고 퇴임했다. 사실상 검찰 후배들이 김 전 총장의 책임을 물어 쫓아낸 셈이다. 2012년 한상대 전 검찰총장도 검찰개혁의 일환으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폐지를 추진하다 검찰 내부 반발로 인해 중도하차했다.

박근혜 정부는 노골적으로 검찰을 권력의 도구로 활용했다. 권력형 비리 부실 수사와 재벌·대기업 봐주기 수사, 정부 비판 세력에 대한 과잉 수사가 이어졌다. 칼끝을 청와대로 향한 검사는 좌천됐다. 2013년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박근혜 정부의 아킬레스건인 국정원 대선 여론(댓글) 조작 사건을 원칙대로 수사했다가 찍혀나갔다.

참여연대는 박근혜 정부 검찰을 ‘국민 위에 군림하고 권력에 봉사하는 검찰’이라고 규정했다. 박근혜 정부 4년간 검찰에 대해 정치로부터의 독립은커녕 기계적 권한 분배를 위한 힘빼기 작업도 이뤄지지 않았다. 검찰을 동원하기 위해 정치권력이 만들어준 검찰권력은 고스란히 남았다.

대검찰청/우철훈 선임기자

대검찰청/우철훈 선임기자

갈길 잃은 검찰개혁

박근혜 정권의 ‘호위무사’였던 검찰은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자 박 정권에게 칼을 빼들었다.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선 것이다. 국정원 댓글수사를 이끌었다가 좌천됐던 윤석열 당시 대전고검 검사는 박영수 특검에 합류하면서 재기했다. 대표적인 친박계 정치인 김재원 국민의힘 전 의원은 3월 11일 페이스북에 “탄핵과 적폐몰이의 중심에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있다. 본인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박 전 대통령 탄핵의 법적 토대는 당시 박영수 특검의 공소장이었고, 특검의 중심인물은 윤석열이었다. 이어진 적폐몰이 수사의 핵심이 윤석열과 한동훈이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검찰개혁이 다시 전면에 나선 것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다. 9년 전 참여정부의 실패 경험을 토대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기대가 높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검찰의 ‘권한 나누기 작업’은 속도를 내지 못했다. 오히려 적폐 청산 차원에서 이뤄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수사를 통해 검찰의 영향력과 지위는 공고해졌다.

검찰 조직론자 윤석열 검찰총장 취임 이후 검찰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에 대한 수사를 시작으로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수사, 월성원전 수사, 라임·옵티머스 수사 등 청와대를 겨냥한 수사를 이어왔다. 추·윤 갈등 국면에선 평검사들이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에 맞서 집단반발하기도 했다. 검찰개혁에 대한 기득권의 저항이냐, 정치적 중립성의 안착이냐를 두고 여론이 둘로 갈라졌다.

그 사이 검찰총장 윤석열은 정치인 윤석열로 거듭나 대권 행보를 시작했다. 검찰이 정권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 모양새다. 김재원 국민의힘 전 의원은 페이스북에 “이길 수만 있다면 윤석열이 괴물이면 어떻고 악마면 어떤가”라며 “차라리 윤석열이라도 안고 가서 이 정권을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윤 전 총장의 출마는 검찰 부활의 신호탄이 될까. 아니면 시대적 요구는 피할 수 없을까. 1년 뒤면 그 답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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