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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라이프

서울 말고 로컬②

정아영씨(29)는 지난 4월 회사에 사표를 냈다. 대학 졸업 후 5년을 근무한 첫 직장이었다. 그는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게 나을까, 다른 분야의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고 말했다. 퇴사 후 찾아간 곳은 전남 목포 ‘괜찮아마을’이었다. “고생한 제 자신에게 한 달 이상 여유로운 시간을 주고 싶었어요. 코로나19로 해외는 갈 수 없고, 제주를 가자니 사람도 많고 운전하는 것도 걱정됐어요. 한 지역에서 쉬면서 재밌는 걸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목포에 머물면서 자신의 20대를 돌아보는 내용으로 에세이집을 냈다. 책 제목은 ‘문득, 내 생각이 들면 주저 없이 연락해’로 정했다. 곧 100부가 인쇄될 예정인데 지인들에게 보낼 거라고 했다.

전남 목포의 ‘괜찮아마을’ 주민들과 이 ‘가상마을’을 만든 스타트업 ‘공장공장’의 임직원들이 지난 6월9일 마을 안의 공유오피스 ‘반짝반짝 1번지’ 주방에서 점심식사를 함께 준비하고 있다. 이날 메뉴는 샤부샤부였다.

전남 목포의 ‘괜찮아마을’ 주민들과 이 ‘가상마을’을 만든 스타트업 ‘공장공장’의 임직원들이 지난 6월9일 마을 안의 공유오피스 ‘반짝반짝 1번지’ 주방에서 점심식사를 함께 준비하고 있다. 이날 메뉴는 샤부샤부였다.

■‘밥계’하는 청년들

아영씨가 찾아간 괜찮아마을은 행정구역으로 존재하는 마을이 아니다. 목포의 청년 스타트업 ‘공장공장’이 운영하는 일종의 ‘가상마을’이다. 참가자들은 스스로를 ‘주민’이라고 부른다. 6주간 머물며 작은 프로젝트를 해보는 프로그램과, 4박5일간 머물면서 노을을 보러가고 섬을 산책하고 사람들과 밥도 함께 지어 먹으면서 쉬어가는 프로그램이 있다. 6주 일정은 270만원, 4박5일은 65만원의 참가비가 필요하다. 제법 부담이 될 법한 돈인데도 주민들이 끊이지 않고 들어온다. 2018년부터 아홉 번의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만족도 역시 높은 편이다. 프로그램이 끝나도 일부는 상당 기간 목포에 남는다. 아영씨도 지난 6월 말 프로그램은 끝났지만, 목포에 좀 더 머물 계획이라고 했다.

청년들은 왜 서울을 떠나 목포에 왔을까. 낯선 지역에서 생계는 어떻게 유지할까.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지난 6월9일 유달산 초입에 있는 공장공장의 공유오피스 ‘반짝반짝 1번지’에서 임직원들과 괜찮아마을의 주민들을 만났다.

공유오피스 ‘반짝반짝 1번지’ 안에 붙어있는 말 ‘괜찮아,어차피 인생 반짝이야’.

공유오피스 ‘반짝반짝 1번지’ 안에 붙어있는 말 ‘괜찮아,어차피 인생 반짝이야’.

수도권에서 영어강사를 하던 김수빈씨(23)는 지난해 괜찮아마을 주민으로 목포에 왔다가, 아예 공장공장 직원이 됐다. 출퇴근 시간은 직원들이 정할 수 있는데 그는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7시에 퇴근하기로 했다. 출근 전에는 목포 바닷가나 유달산 둘레길을 달리는 ‘돈워리(걱정 말아요) 러닝’ 모임에 나간다. 아침에 1시간을 사람들과 함께 뛰기 위해 수빈씨가 만든 이 모임에서 아영씨도 함께 달린다. 점심 시간에는 식사를 함께 준비하는 ‘밥계’를 한다. 회사 게시판에 자신이 하고 싶은 요리를 날짜와 함께 공지하면 직원이나 주민들이 댓글로 참여 의사를 남긴다.

이날 ‘밥계’ 메뉴는 샤부샤부였다. 수빈씨, 아영씨 등 8명이 건물 1층 공유주방에 모여 채소를 다듬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한 신입사원은 전날 게시판에 “처음으로 밥계하는 분들과 점심을 해 먹었는데 밥상 차리는 게 이토록 신나는 일이었나? 요리 욕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일 밥계가 벌써부터 설렌다”고 썼다. 말 그대로 ‘식구(食口)’가 됐다. 함께 먹을 밥을 준비하면서 나눈 대화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했다.

말 그대로 ‘식구(食口)’가 됐다. 함께 먹을 밥을 준비하면서 나눈 대화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했다.

말 그대로 ‘식구(食口)’가 됐다. 함께 먹을 밥을 준비하면서 나눈 대화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했다.

괜찮아마을과 공장공장에는 수많은 모임이 수시로 생겼다가 사라진다. 수빈씨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을 통해 목포의 청년들을 모은 뒤, 공유오피스 ‘반짝반짝 1번지’에서 무료 영어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동료들과 밴드 활동도 한다. 드럼 연주가 재미있어 저녁마다 근처 음악학원에 다닌다고 했다. “얼마 전엔 밴드에서 ‘달려’라는 곡을 만들어 녹음했어요. 돈워리 러닝 모임에서 들을 생각이에요.”

공유오피스 ‘반짝반짝 1번지’ 1층에서 사람들이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다.

공유오피스 ‘반짝반짝 1번지’ 1층에서 사람들이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다.

■지역 아닌, 나를 위한 공동체

‘괜찮아마을’을 꾸린 ‘공장공장’은 박명호씨(34)와 홍동우씨(35)가 2014년 창업한 회사다. 임직원은 14명으로, 모두 20~30대 청년들이다. 박명호 대표는 “공장공장은 ‘말도 안 되는 일’을 계속하는 실험주의자들을 양성하는 회사”라고 소개했다. 처음엔 서울과 제주에서 여행 스타트업과 게스트하우스 사업을 했다. 목포에 살던 지인이 ‘월세는 받지 않을 테니, 20년 동안 목포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해보라’며 오래된 여관 건물 하나를 내주었다. 두 사람은 수년 전 기획했던 ‘괜찮아마을’ 프로젝트를 목포에서 실행해보기로 했다.

인터뷰를 하고 있는 공장공장 박명호 공동대표.

인터뷰를 하고 있는 공장공장 박명호 공동대표.

“예전에 낯선 청년들끼리 만나 전국을 일주하는 여행 상품을 팔았거든요. 근데 유명 관광지나 박물관에 가서 뭔가를 보고 배우는 일정보다, 같이 모닥불 피우고 노래 부르고 별 보는 시간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더라고요. 우리 여행의 핵심은 그게 아니었는데… 이 친구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하구나, ‘내가 너무 힘들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 ‘그래도 괜찮다’는 얘기를 듣고 싶어서 우리 여행에 오는구나. 그래서 청년들이 언제든 찾아와 쉬었다 가는 커뮤니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홍동우 대표)

반짝반짝 1번지에 전시된 ‘괜찮아마을’ 프로그램 사진들.

반짝반짝 1번지에 전시된 ‘괜찮아마을’ 프로그램 사진들.

인터뷰를 하고 있는 공장공장 홍동우 공동대표.

인터뷰를 하고 있는 공장공장 홍동우 공동대표.

여러 지자체가 가속화된 인구 감소의 대안으로 청년 대상의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청년들은 지역을 살리기 위한 다양한 미션들을 부여받고, 해당 지역에서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를 고민한다. 반면 괜찮아마을은 온전히 ‘쉬는 것’에 집중한다고 했다. ‘목포’라는 지역을 위한 ‘미션’ 따위는 없다. 홍 대표가 말했다. “청년들이 한참을 쉬면 ‘이제 뭘 좀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더라고요. (지역이 아닌)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작은 성공을 경험하며 힘을 얻기도 해요. 잘하지 못해도 괜찮아요.”

괜찮아마을을 다녀간 주민들은 이런 후기를 남겼다. “내가 완벽하게 완성하지 못하거나, 화려하지 않아도 나를 지지해주고, ‘좋다’고 말해준 사람들 덕분에 앞으로 새로운 출발을 할 때 조금 더 자신 있게 출발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의 말에는 평가가 없고 순수한 호기심과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이 가득하다. 항상 얻어내야만 받을 수 있던 관심과 애정을 조건 없이 받는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하는 힘이 돼준다.”

반짝반짝 1번지 테라스.

반짝반짝 1번지 테라스.

괜찮아마을과 공장공장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한다.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어떤 것이든 응원하고 지지한다. 다르다고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나이를 묻지 않는다. 수빈씨가 말했다. “사람 사는 곳에 갈등이 없는 곳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사람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기본 전제로 깔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갈등을 다루는 방식은 조금 다를 것이라고 생각해요. (갈등이 생겨) 괜찮지 않다가도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또 괜찮아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공장공장에 전시된 티셔츠에 ‘장래희망은 한량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공장공장에 전시된 티셔츠에 ‘장래희망은 한량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지역의 ‘스페셜리스트’들

목포역에서 목포항으로 이어지는 원도심은 비어 있는 건물들이 많았다. 어떤 건물 1층에는 ‘점포 13평 보증금 500만원에 월 39만원. 1층 빌리면 2~4층까지 무상으로 사용’이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기도 했다. 공장공장은 이런 건물들을 직접 매입하거나, 건물을 매입한 투자자와 장기임차계약을 하는 방식으로 건물 4곳을 운영한다. 홍동우 대표는 “못하면 망해서 나가고, 잘해도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나가야 한다. 이 사업을 계속해나가기 위해 건물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반짝반짝 1번지’ 외관. 옛 이탈리아 레스토랑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반짝반짝 1번지’ 외관. 옛 이탈리아 레스토랑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20년 무상임차를 한 중앙동의 오래된 여관 건물과, 공장공장 사무실로 쓰는 측후동의 공유오피스 ‘반짝반짝 1번지’ 건물 외에, 목포항 인근 영해동에는 목공과 인쇄를 할 수 있는 2층짜리 건물이 곧 문을 열 예정이다. 공장공장은 목포역 인근 죽동에 있는 5층짜리 옛 요양병원 건물을 매입했다. 주민 숙소와 공유가게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란다. 건물들은 모두 도보로 10~15분 거리에 모여 있다.

목포항 인근 영해동에는 목공과 인쇄를 할 수 있는 2층짜리 건물이 곧 문을 열 예정이다.

목포항 인근 영해동에는 목공과 인쇄를 할 수 있는 2층짜리 건물이 곧 문을 열 예정이다.

현재 목포에 머물고 있는 주민들은 30여명이다. 일부는 공장공장에 취업했고, 일부는 인근에 식당이나 사무실을 열었다. 또 목포 내 공공기관이나 협동조합 등에 취직한 이들도 있다. 1기 주민 윤숙현씨가 2018년 목포 원도심에 낸 식당 ‘최소 한끼’는 목포에서 꽤 유명한 채식식당이다.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해 공장공장이 투자자로 나섰다. 공장공장은 최근 전남 해남군 의뢰로 해남 홍보책자를 만들기도 했는데 해남 탐방기를 숙현씨에게 맡겼다. 그는 괜찮아마을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요리’를 주제로 강의도 한다.

괜찮아마을 주민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다행(多行)이네요>를 연출한 김송미 감독은 서울과 목포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한다. 그의 스튜디오와 공장공장은 함께 영상을 제작하기도 한다. 홍 대표는 “우리의 진짜 가치는 인적자원”이라며 “이 지역에서 보기 드문 스페셜리스트들이 이곳에 있다. 각자의 역량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을 엮어주는 것만으로도 함께 수익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괜찮아마을에 주민으로 참가했다가 목포에 계속 머물고 있는 김수빈씨(왼쪽)와 김한나씨.

괜찮아마을에 주민으로 참가했다가 목포에 계속 머물고 있는 김수빈씨(왼쪽)와 김한나씨.

■목포에 남은 이유

서울 마포에서 홍보마케팅 업무를 했던 김한나씨(28)는 괜찮아마을에 주민으로 참가했다가 목포에 눌러앉았다. 그는 “목포 원도심에선 마을에 산다는 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서울에서는 가게에 들어가도 그냥 일반인1, 손님1, 행인1 정도로 알잖아요. 근데 여기서는 ‘한나 왔어?’ ‘한나 오랜만이네’라고 이름을 불러주세요. 제 이름을 들었을 때 뭔가 몽글몽글한 감정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어요. 저는 김밥집에서 사장님과 연애상담을 해요. 카페 사장님과는 수다를 떨어요. 그런 것들이 굉장히 힐링이 되는 것 같아요.” 한나씨는 “목포에서 3년을 살고 있는데, 어떻게 사나 궁금해서 와보는 친구들도 있다”며 “친구들에게 이곳으로 오라고 계속 권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빈씨는 “꿈을 이루기 위해 목포에 남았다”고 했다. “저는 사람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주는 ‘라이프코칭’이란 개념에 관심이 많거든요. ‘인생학교’ 같은 걸 만들고 싶은 바람도 있어요. 괜찮아마을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가능성을 봤거든요. 여기에서 자기를 돌아보고 인생을 다시 설계할 수 있는 그런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반짝반짝 1번지 내부 벽면.  ‘Don't Worry Village(괜찮아마을)’ 이라는 문구가 있다.

반짝반짝 1번지 내부 벽면. ‘Don't Worry Village(괜찮아마을)’ 이라는 문구가 있다.

공장공장은 지난 6월부터 ‘갑자기 지방’이라는 온라인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공장공장 같은 전국 각지의 로컬 스타트업 30여곳이 ‘로컬에서 살아가는 법’ 등의 정보를 온라인 강연 등으로 공유하는 프로그램이다. 박명호 대표는 “로컬 생태계를 함께 만들어가는 중”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다양한 지역에 괜찮아마을 같은 곳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쉬거나 인생을 다시 설계하고 싶을 때 찾아갈 수 있는 공간이 전국 곳곳에 만들어지는 거예요. 아직 시장이 무르익지 않아서 다 함께 만들어야 해요. 같이 잘하고 정보도 아낌없이 공유해야 우리도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글 이재덕 기자 · 사진 채용민 피디 duk@kyunghyang.com




도시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로컬에서 다른 삶을 살아 보려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을 하거나, 가게를 내거나, 농사를 짓습니다.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버티컬 채널 ‘밭’(facebook.com/baht.local)은 로컬에서 어떤 삶이 가능한지를 탐구합니다. ‘서울 말고 로컬’ 연재로 나만의 밭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facebook.com/baht.lo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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