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보호구역, 디지털 세상에도 있나요?

2021.11.18 16:52 입력 2021.11.18 18:46 수정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교복 모델 하실래요?” 박지호양(고2)이 페이스북에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올리자 한 가계정이 메시지를 보내 왔다. 거절했더니 ‘그러면 사진을 써도 되겠느냐’는 답장이 돌아왔다. 수상함을 느낀 박양은 계정을 신고하려 했지만 상대방은 그새 계정을 삭제했다. “많이 무서웠어요. 작년 일인데, 진짜로 제 사진을 그 사람이 썼다면 어디 떠돌아다니고 있는지 저는 절대 모르잖아요. 요즘 남의 사진을 (부적절한 이미지에)합성한다는 이야기도 있고….”

디지털 미디어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지만 그 안에서 아동·청소년의 권리는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기술 발전 속도에 비해 윤리적·제도적 고민이 부족한 탓이다. 디지털 플랫폼에서 아동·청소년은 유해 콘텐츠에 무분별하게 노출되거나 범죄의 타깃이 되기도 한다. 아동·청소년을 형상화하면서 편견과 혐오를 부추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경향신문은 한국의 유엔아동권리협약 비준 30주년(20일)을 앞두고 미디어에 관한 아동청소년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보기 싫어도 보이는 유해 콘텐츠

경향신문이 만난 아동·청소년은 디지털 미디어 환경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고 느꼈다. 곳곳에 널려 있는 유해콘텐츠 때문이다. 김시후군(중3)은 특히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유튜브 광고가 거슬린다. 콘텐츠는 연령제한이 있지만 광고는 무방비로 모두에게 노출된다. 초등학교도 안 간 아이들이 그런 영상을 보게 되면 폭력을 모방할까봐 걱정된다고 했다. 김예진양(고2)도 어린 아이들이 청소년 이용 불가 드라마인 ‘오징어게임’을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는 상황이 이상하다.

박양의 경우처럼 모르는 사람에게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잦았다. 하나의 사회처럼 기능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공간에서 아동·청소년을 상대로 부적절한 언행을 하는 이들이 늘어난 것이다. 고등학생 A양은 인스타그램이 해킹돼 난감한 상황을 겪었다. A양은 “한 번은 모르는 사람한테 ‘누구신데 욕하세요’라는 인스타그램 메시지가 왔다. 무슨 말인가 싶어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내가 그 사람에게 욕을 했다는 거였다”며 “상대방이 보낸 캡쳐본을 보니 실제로 내 계정이 욕을 보냈다. 말로만 듣던 해킹이었다”고 했다.

미디어가 아동을 다룰 때 드러나는 편견에 불쾌해지기도 한다. 김예진양에게는 ‘O린이’라는 표현이 그렇다. “고등학생이라 제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어린이들이 들으면 기분이 나쁠 것 같았다”며 “어린이들을 낮게 보고 얕잡아보는 말인데, 급식충이라는 단어도 그런 단어라 기분이 좋지 않다”고 했다.

어린이 보호구역, 디지털 세상에도 있나요?

코로나19로 디지털 미디어 이용 시간이 늘면서 그 안에서 아동권리 침해도 따라 늘었다. 굿네이버스 아동권리연구소가 지난해 아동 337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0년 아동 재난대응 실태조사’를 보면, 코로나19 이후인 지난해 온라인 폭력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중학생은 22.5%로 2018년 조사 때 2.1%보다 10배 이상 늘었다. 같은 기간 온라인 폭력을 경험한 초등학교 고학년도 2018년 1.7%에서 2020년 18.5%로 폭증했다. 고완석 굿네이버스 아동권리옹호팀장은 18일 “미디어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동권리에 대한 감수성이 있는지, 아동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며 “아동을 성인과 동등한 권리주체가 아니라 희화화돼도 되는 존재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국제사회도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대응하고 있다.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지난 2월 디지털 환경에서의 아동권리를 다룬 ‘일반 논평 제 25호’를 채택했다. 1989년 채택된 유엔 아동권리협약이 오늘날 디지털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이 지침에는 ‘모든 어린이의 디지털 환경 접근 보장’ ‘기회 보장과 위험으로부터의 보호’ ‘어린이 당사자의 견해 존중’ 등 내용이 담겼다.

■위험하니 일단 보호? 최선일까

위험한 미디어 환경으로부터 아동청소년을 ‘보호’하면 그것으로 끝날까. 당사자와 전문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오늘날 디지털 공간은 정보 이용의 주된 통로이기 때문이다. “유튜브에서 짧은 시간에 지식을 재밌고 쉽게 알 수 있다”(김예진), “내가 좋아하는 취미를 편하게 즐기고, 시사 이슈에 대한 내 생각도 정리할 수 있고”(김시후), “코로나19에도 원격으로 친구들과 공부를 함께 하거나 온라인 수업을 들을 수 있다”(박지호)는 것이다.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것이 꿈인 김예진양의 경우 미디어는 세계 다른 지역의 상황을 쉽게 알 수 있는 창이기도 하다.

미디어의 장점을 ‘잘’ 이용하기 위한 미디어 리터러시(문해력) 교육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경향신문이 만난 아동·청소년은 최근 한 연예인의 사생활 논란에서 혼란을 겪었다고 말했다. 어떤 매체가 믿을 만 한지, 기사와 가짜 뉴스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이다. 박양은 “나도 미디어 리터러시라는 단어를 고등학교 와서야 알게 됐다. 어릴 때부터 그런 교육들을 많이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국의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국어·사회 등 과목의 단원을 통해 이뤄진다. 문제는 교육 내용이 단편적인 수준에 그친다는 데 있다. 정현선 경인교대 미디어리터러시연구소장(국어교육과 교수)은 “기기, 플랫폼, 콘텐츠 등 미디어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한데, 지금의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단편적이고 분절적”이라며 “단순히 스마트폰을 쓰지 말라는 식의 교육도 문제다. 수학을 배울 때 계산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했다. 또 “교육과정에서 디지털 역량을 강조하자는 의견이 나오지만 여전히 코딩 등 기술적 부분에 치우쳐 있다”면서 “디지털 미디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기회는 무엇이고 위기는 무엇인지, 이게 우리의 민주주의와 삶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등 시민성에 중심을 둔 교육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지나친 보호주의가 디지털 시대 아동권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내 법은 개인정보보호법과 교육기본법, 청소년보호법 등을 통해 디지털 아동권리의 보장을 지원하지만 대부분 유해정보 차단 등 보호책에 집중돼 있다. 정해린 굿네이버스 아동권리연구소 연구원은 ‘아동과 디지털 환경에 관한 기초연구’에서 “정보통신기기에 대한 아동의 접근 및 활용을 과도하게 차단하는 법제들이 주축”이라며 “평등권, 최선의 이익, 의견 표명권, 정보 접근, 표현의 자유 등이 저해되거나 위축된다”고 분석했다.

■아동 보호에 그들 목소리 반영돼야

미디어는 우리가 사는 사회를 반영한다.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아동에게 쏟아지는 각종 위험은 아동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투영돼 있다. 고완석 팀장은 “아동은 발전 과정에 있는 인간으로서 특별히 보호받아야 하지만, 그와 함께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보고 존중하는 태도도 필요하다”며 “오프라인 세상에서도 아이들에 대한 존중이나 감수성이 있어야 미디어에서도 존중할 수 있다”고 했다.

어른들의 ‘보호주의’ 역시 아동·청소년을 미숙한 존재로만 바라보는 편협한 관점의 발로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박양은 등교하면 학교에 휴대전화를 내야 한다. 중학교 때 급식실에서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화장 여부를 검사했다. 화장한 학생은 밥을 못 먹게 하기도 했다. 박양은 “화장한다고 나쁜 사람인 것도 아닌데 상처를 받았다. 겉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내면을 봐주면 좋겠다”고 했다. 김시후군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아동의 이미지와 실제 아동은 너무 다르다. 좀 더 현실적인 아동으로 우리를 대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아동권리 보호 정책이나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관련 논의에 아동의 목소리가 반영돼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김시후군은 “아동을 위한 법을 만들 때 아동·청소년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고완석 팀장은 “한국은 아동을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보호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어른들이 (정책 등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인식이 크다”며 “특히 디지털 미디어와 관련해서는 어른이 생각하는 문제와 아이들이 겪는 문제가 다를 수 있다. 입법과정이나 정책 수립에 아동이 직접 참여할 기회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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