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애씨(72)의 가게는 서울 남대문시장 칼국수 골목에 있다. 의자는 일렬로 네 개. 네 명이 동시에 앉으려면 어깨와 팔꿈치가 스칠 각오를 해야 할 만큼 아담한 규모다. 17개 국숫집이 모여 있는 이 골목에서 정애씨는 ‘훈이네’라는 간판 아래 20년째 밥을 짓고 국수를 만든다. 칼국수를 주문하면 비빔냉면을, 찰밥을 주문하면 수제비를 주는 이곳은 뭐든 ‘1+1’이다.
정애씨는 인생의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지만, 국숫집만으로 그의 삶을 다 설명할 순 없다. 정애씨는 1970년대 제사공장(양잠업) 노동자였고, 88 서울 올림픽 땐 한식당 오너셰프(요리도 하는 경영자)였으며, 1990년대 남대문 패션시장 호황기 땐 여성복 디자이너이자 사장님이었다. 돈 버는 노동의 사이사이 돌봄과 가사 노동도 쉰 적 없다. 연년생인 딸과 아들을 키웠고, 시아버지를 간호했으며, 뇌경색과 치매를 앓고 있는 남편을 20년 넘게 돌보고 있다.
매일 새벽 4시에 출근하는 정애씨는 “내가 벌어 사는 삶이 좋다”고 말한다.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도망가지 않았다”며 늠름한 삶에 대한 자부심도 있다.
정애씨의 생애사는 한국전쟁부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코로나19까지 이어진 굴곡진 현대사와도 닿아 있다. 지난해 10월부터 다섯 번에 걸쳐 정애씨의 출·퇴근길과 일하는 현장을 함께했다. 명함은 없지만 평생 일한 현역 노동자로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 오늘도 일찍 나오셨나요.
“그럼요. (새벽) 2시20분에서 40분쯤 일어나요. 집이 만리동인데 3시 반에서 4시 사이에 나와서 걸어오면 남대문시장까지 30분쯤 걸려요. 오다가 맨손체조도 두어 번 하면 건강에도 좋잖아요.”
- 몇 시에 주무시는데요.
“9시쯤 자요. 1주일에 한 번 김치 담그고, 우거지나 콩 삶고 그러면 11시 넘어서 자고요. 깨는 건 똑같아요. 일찍 나오면 좋아요. 혼자 생각도 정리하고요. 옛날엔 김치 가져오려면 무거웠는데 발통(바퀴) 달린 가방 사고부턴 괜찮아요. 코로나 전엔 밤 10시에서 11시까지도 일했는데 요즘은 손님이 적어서 욕심 안 부리고 6시 넘어가면 문 닫고 가요.”
- 국숫집은 언제부터 하셨어요.
“2003년부터요. 그전에는 건너편에서 옷 장사도 했고요.”
- 일을 오래 하셨네요. 사장님 일하신 이야기를 여쭤보려고 해요.
“나 같은 사람 얘기 들을 게 뭐 있나. 물어봐요(웃음).”
- 고향은 어디세요.
“(경남) 밀양이에요.”
- 실례가 안 된다면 나이를 여쭤보고 싶어요.
“1950년생인데 호적(옛 가족관계등록부)엔 1954년생으로 돼 있어요. 그 시절엔 다 그랬어요. 애를 낳아놔도 일찍 죽으니까, 1년 정도 있다 하는 경우가 많았지. 아버지가 동생 출생신고를 하러 갔는데 나도 안 돼 있더래요. 깜빡한 거죠. 8남매 중 다섯째고 딸로는 둘째인가 그래요.”
- 한국전쟁(1950~1953년) 때라 혼란기여서 더 그랬군요. 어린 시절은 어떠셨나요.
“아버지가 나 중3 때 식도암으로 돌아가셨는데요. 돌아가시기 직전에 미안하지만 공부를 그만두라고 하셨어요. 동생들이 공부를 계속하면 큰아들에게 짐이 될까 그러신 것 같아요. 그때 공부를 그만둔 게 항상 후회가 돼요.”
- 어릴 적 꿈이 있으셨나요.
“하고 싶은 게 많았죠. 미용학원도 다니고 양재학원(옷 만드는 것을 배우는 곳)도 다녔는데 오빠가 말렸어요. 한 번은 학원 앞까지 쫓아오고, 한 번은 좋게 타이르더라고요. 여자가 재주가 많으면 남자가 놈팡이가 된다고요.”
- 중학교 졸업 후엔 어떻게 지내셨어요.
“밤에는 종교단체에서 하는 학교를 다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학교도 아니에요. 낮에는 집안일 좀 돕다가 작은 사무실에 나갔죠.”
- 어떤 일을 하셨어요.
“장부정리 일을 했어요. 도자기공장에서도 일하고 제사공장에서 누에고치서 실 뽑는 일을 했어요. 거기서 우리 아저씨 만나 결혼했지.”
전쟁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여성들은 ‘집 밖 노동’에 적극적으로 투입됐다. 1948년 ‘남조선 과도정부 노동부 통계실’ 자료를 보면 공업 부문에서만 여성은 전체 노동력의 23.3%를 구성하고 있다. ‘근로 여성 50년사의 정리와 평가(2001년, 노동부 토론회, 책임연구원 장하진 한국여성개발원장)’는 “1960년대에 시작된 경공업 중심의 수출지향적 공업화는 섬유·의복, 가발, 전기·전자 등 노동집약적 수출 산업에서 대량의 여성노동력을 창출했다”고 분석했다. 정부는 1962년부터 수출증진과 소득증대 사업의 일환으로 ‘잠업증산 5개년 계획’을 15년간 추진했고, 1970년대 양잠수출액은 2억7000만달러 규모(경북도청 자료)였다. 그러나 정애씨가 경험한 대로 많은 여성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급하게 노동 현장에 편입됐다.
- 연애결혼 하신 거예요.
“우리 아저씨가 의성농협에 다녔는데 출장 왔다가 나를 보고 따라다녔어요.”
- 첫인상은 어떠셨는데요.
“별로였지(다 같이 웃음).”
- 어쩌다 연애도 하고 결혼까지 하셨어요.
“우리 아저씨가 친정까지 찾아왔어요. 옛날엔 그렇게 소문나면 결혼해야 됐어. 내가 많이 못 배워서 배운 사람이 좋았는데 우리 아저씨는 대학까지 나왔거든요. 사람도 야무져 보였어요. 살아보니까 아니더라고요. 영 사람을 잘못 골랐어요(웃음).”
- 결혼생활은 어떠셨어요.
“직장 다니면서 번 돈으로 목장을 차리려고 했는데 시댁이 원체 없는 집이라 돈이 안 모아지더라고요. 아저씨가 5남매에 맏아들이었어요. 바로 애를 가졌는데 유산됐어요. 임신중독증이었는데 시골 노인들이 애 가진 몸에 주사 맞는 거 아니라고 해서… 그래도 바로 애를 가져서 연년생으로 낳았어요. 딸이 말띠(1978년생), 아들이 양띠(1979년생)예요.”
- 서울엔 언제 어떻게 오셨어요.
“아저씨가 유원건설 해외인력부에 취직 돼 올라왔어요. 우리 딸 돌 지났을 때쯤, 아들은 기저귀 차고 용달차로 올라왔으니까 1980년쯤일 거예요.”
- 서울 생활은 어떠셨어요.
“나는 돈을 좀 벌고 싶었는데 아저씨가 경상도 사람이라 고지식해서 여자가 나가 벌면 가정을 등한시하고 신랑을 무시한다고 못하게 했어요. 아저씨가 사우디(아라비아)에 3년 정도 파견을 나갔거든요. 그때 몰래 돈을 벌었죠.”
- 어떤 일을 하셨어요.
“내가 손으로 하는 건 다 잘해요. 뜨개질도 잘하고 수도 얼마나 잘 놓았는데요. 우리 시모가 그랬어요. 우리 애미는 똥도 버릴 게 없다고요. 서울 와서 공덕동 단칸방에서 시작했는데 17개월 만에 만리동에 집을 샀어요.”
- 그때 건설업에서 중동 진출을 많이 했죠.
“사우디에 나가면 월급을 2배인가 더 줬어요. 알차게 모았죠. 아저씨가 일을 잘한다고 노동부장관상도 받았어요. 근데 회사가 사우디에서 철수하면서 나갔던 사람들이 차례로 명예퇴직을 했어요. 우리 아저씨도 그때 그만뒀어요.”
1970~1980년대 중반까지 중동의 오일달러는 한국에 큰 기회였다. 1973년 삼환기업이 사우디 고속도로 공사를 따낸 것을 시작으로 많은 건설기업이 중동에 진출했다. 1975년 7억5000만달러였던 건설수주액은 1980년 82억달러까지 늘었다. 정애씨의 남편이 일한 유원건설도 1979년 사우디에서 3억2000만달러 규모의 병원, 학교, 사원, 체육관 공사를 수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우디 리야드, 제다 등에 해외지사도 개설했다. 그러나 중동 건설 경기는 1980년대 중반 이후 하락세로 돌아섰다.
- 그 이후엔 두 분이 어떻게 일하셨어요.
“아저씨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사무일을 보고, 나는 남영동에서 식당을 했어요. 낮엔 근처 회사에 식권을 팔았고, 저녁엔 삼겹살이랑 갈비도 팔았어요. 테이블도 많고 잘됐어요.”
- 갑자기 밖에 나와 요리도 하고 경영도 하는 게 힘들진 않으셨어요.
“내가 원래 반찬 만들고 이런 걸 좋아해서 그런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그때가 88올림픽 때인데 하는 일도 잘됐고, 가진 돈도 있고요. 그땐 내가 좀 잘나갔어요.”
- 근데 왜 그만두셨어요.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경북 사람들이라 격식을 많이 따져서 초상을 오래 치렀거든요. 한 달 가까이 식당 문을 닫으니까 회사 사람들이 떨어진 거야. 그리고 애들이 초등학생이었는데 엄마가 집에 없으니까 실력이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남대문으로 가서 옷 장사를 시작했지. 옷은 새벽 장사니까 밤새 장사하고 애들 학교에서 올 때쯤 밥도 챙겨주고 숙제도 봐줄 수 있었어요.”
- 그럼 잠을 거의 못 주무신 것 아닌가요.
“한 시간 반 많으면 두 시간 잤어요. 그때는 옷도 잘되고 하니까 힘들다는 생각도 안 했어요.”
- 식당과 옷가게는 전혀 다른 업종인데 어떻게 하게 되셨어요.
“원래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었거든요. 남영동에서 남대문이 가까우니까 종종 와서 옷 만드는 걸 봤죠. 원단 하는 사람들 따라다니며 익혔어요.”
- 직접 디자인을 하신 건가요.
“내가 디자인을 하면 재단사가 샘플을 빼 와요. 그럼 내가 입어보고 어딜 손봐야겠다고 하고 맞춰오고, 사이즈별 색깔별로 주문을 넣는 거예요. 백화점에도 납품했어요.”
1897년 최초의 도시 상설시장으로 문을 연 남대문시장은 1980~1990년대 패션호황기를 이끌었다. 특히 여성복과 아동복, 액세서리 등이 큰 인기를 끌며 ‘남문패션’이란 말이 나오기도 했다.
- 디자이너이자 피팅모델이자 경영자셨네요. 직접 디자인한 옷이 잘 팔리면 굉장히 뿌듯하셨을 것 같아요.
“미시복을 팔았는데 나는 바지가 좋더라고요. 기모바지가 히트 쳤어요. 가운데 선을 삥 두른 거요. 나팔바지도 히트 쳤지.”
- 옷가게는 혼자 운영하셨나요.
“네. 내 옷은 잘되고 우리 아저씨 일은 잘 안 됐어요. 그러다 아저씨가 (1998년 2월에)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6개월 만에 시아버지까지 쓰러졌어요. 검사를 해보니 암에 치매까지 다 왔더라고요.”
- 많이 놀라셨겠어요.
“두 환자가 누워있으니까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요양원을 알아보니 한 달에 800만원이 들더라고요. 그런 돈이 어딨어요. 집에서 간호했죠.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드니까 너무 힘들었지만 도망가지 않았어요. 내 인생은 없다, 나는 돈 버는 기계다 생각하며 살아보자 했죠. 그때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나도 애들도 그때 일을 정확히 기억을 못해요. 연도나 날짜 이런 것들……. 이상해서 의사한테 가서 물어봤는데 그러더라고요. 의사도 싫은 기억은 지운다고요.”
- 장사에 병간호, 살림까지 다 하신 거네요.
“뭘 먼저 해야 할지 결정하는 게 너무 어렵더라고요. 옷가게 일은 제대로 못했어요. 그러다 신용불량자가 됐죠. 3년7개월 만인가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옷가게 정리하고, 칼국수 골목에 온 거예요.”
정애씨의 삶은 남편과 시아버지의 병, IMF 외환위기가 겹치면서 큰 폭풍을 맞았다. 동대문 패션시장으로 진출하려던 꿈도 꺾였다. 1997년 1월 재계 자산순위 14위였던 한보그룹의 부도를 시작으로 기업들이 쓰러졌다. 1997년 9월까지 도산한 기업들이 은행에 진 빚은 20조5000억원이었는데, 이는 당시 국가 예산(71조5000억원)의 30%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기업의 줄도산은 금융위기를 불러왔고, 정부는 1997년 11월19일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했다.
- 국숫집은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바로 앞에서 옷 장사를 했으니까 이 자리를 분양하는 걸 알았죠. 신용불량자를 빨리 벗어나려고 1년에 딱 이틀, 설이랑 추석만 놀고 열심히 일했어요. 신용회복위원회에 매달 얼마씩 갚으면서 1년 만엔가 벗어났어요. 그런데 내 몸이 망가졌어요. 집에서 김치 담그다가 뇌혈관이 터져서 쓰러졌어요. 지난해(2020년)엔 무릎 인공관절 수술도 했고요.”
- 지금은 괜찮으세요.
“A/S 잘해서 쓰니까 괜찮아요. 기계도 몇십년 쓰면 고장 나잖아요. 내 몸에 맞게 반찬도 잘해서 먹고요. 관리를 잘해요. (의학) 지식은 없지만…….”
- 지혜는 있으시고요.
“(웃음) 의사가 나 보고 잘한다고 그래요.”
- 국숫집 일은 어떠세요.
“지금은 다 좋아요. 음식 하는 거 자체를 즐겨요. 먹고 더 달라고 하면 더 좋아요. 한번은 어떤 엄마가 아들 둘을 데리고 왔는데 큰아들이 다 먹었길래 ‘좀 더 줄까?’ 그랬더니 더 달래. 그 엄마가 미안해하면서 ‘그만 먹어’ 하길래, 나도 자식 키운 사람이다 그랬죠.”
- 기억에 남는 손님들도 많이 있으시겠네요.
“엄마랑 딸이 같이 오는데 딸은 건너편 집 단골이고 엄마는 우리집 단골이에요. 딸이 돈낼 때는 건너편 집으로 가고, 엄마가 돈 낼 때는 우리집으로 와요(웃음). 한번은 어떤 할아버지가 와서 ‘저 모르겠어요?’ 그래요. ‘언니는 찰밥 드시고, 아저씨는 칼국수 드셨는데 맞아요’ 하니까 맞대요. 부인이 암으로 고생하다 저세상 갔대요. 내가 참 속이 안 좋더라고요.”
- 여기서 수많은 인생을 보시겠어요.
“50대 손님이 한동안 안 보인다 하면 어디 수술받으러 들어갔구나 하고, 70대 손님이 몇년 안 보이면 아이고 갔구나 해요.”
- 장사는 잘된 편이었나요.
“한창 바쁠 때는 새벽에 나와서 밤까지 앉아 있을 틈도 없이 일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지난해엔 많이 쉬었어요. 얼마 전에 도깨비(남대문 수입상가)에서 확진자가 나왔고… 조심스럽지.”
코로나19로 인한 자영업자들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2021년 12월11일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 2020’ 자료를 보면 자영업자들은 외환위기 때보다 코로나19로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 남편분 건강은 지금 어떠세요.
“10년 전쯤에 치매가 왔어요. 처음엔 많이 힘들었어요. 장사하다 찾으러 가기도 하고 애를 먹었어요. 지금은 세상이 많이 좋아졌어요. 위치추적기 있으니까 어딨는지도 알고요. 1주일에 두 번 구청 치매교실에도 가요. 아침에 일어나서 반찬만 해놓고 오면 돼요.”
- 새벽 4시에 출근하시면서 반찬까지 해놓고 오세요.
“국이나 찌개 끓여서 반은 냉장고에 넣어놓고 반찬도 해놓고. 그 덕에 나도 먹고 좋잖아요.”
- 정말 대단하세요.
“안 대단하면 어떡해.”
- 양가 제사를 여전히 다 챙기신다면서요.
“친정 부모 제사는 작년(2020년)에 절에 모셨어요. 우리 언니도 아프고 하니까 힘들더라고. 시부모 제사는 아직 내가 모셔요. 아저씨가 살아 있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시동생들도 한 번씩 모이고 하니까요. 근데 자식들한테는 안 물려주고 싶어요.”
-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왔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으실 것 같아요.
“그건 있어요. 시골에서 올라와 여자가 두 환자 보살피며 애들 공부시켰고, 상상을 초월할 만큼 힘들게 살았죠.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더 잘할 순 없을 것 같아요. 지금은 너무 좋아요. 애들이 생활비 준다고 그만두라고 하는데, 내가 버니까 친정도 KTX 타고 왔다 갔다 하고 언니 아플 때 반찬도 해서 보내주고 했죠. 자식들한테 받으면 그 돈을 그렇게는 못 쓸 것 같아요. 내가 벌어서 우리 아저씨 먹이고, 대학병원도 다니고요. 손녀들한테도 ‘인기짱’이야. 군것질거리도 사주고 용돈도 줄 수 있잖아요. 얼마나 좋아요.”
- 자녀분들이 존경스럽다고 할 것 같아요.
“딸이 그래요. 사람의 한계가 100이라면 엄마는 100을 초과한 사람이라고. 아들은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게 사는 사람이라고, 우리는 엄마만큼 못할 것이라고요. 내가 그랬어요. 너희들은 엄마보다 훨씬 더 잘할 것이다. 엄마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고.”
- 자녀분들은 어떤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딸도 살림만 하게끔 안 키웠어요. 며느리도 직장 다니면서 자기 길 가는 게 좋고요. 우리 애들이 잘 커줬어요. 그 보람 없었으면 못 살았지. (정애씨의 딸은 상담교사로 일하고 있고, 아들은 결혼 후 일본에서 사업하며 살고 있다.)”
- 단시간에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은 나라에서 70년을 넘게 사셨는데 세상에 많이 변했구나 하고 느끼시나요.
“많이 변했죠. 옛날엔 여자들이 마음대로 다니지도 못했잖아요. 극장 구경을 가도 오빠한테 허락을 받았잖아요. 하고 싶은 대로 일할 수 있다는 건 좋은 것 같아요. 일을 해야 보는 눈이 생기고 머리도 깨이고 생각도 나아지는 것 같아요.”
- 좀 더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하는 생각은 안 드세요.
“다시 태어난다면 나를 위해서 살고 싶어요.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고 그랬던 것이 굉장히 후회스러워요. 손녀들이 서로 다른 문방구 간다고 싸우면 저는 둘 다 가요. 만날 양보하면 나이 들어서도 양보할까 봐. 옛날엔 양보하는 게 미덕이었지만 요새는 미덕 아니야. 나는 그게 싫더라고요.”
- 예전엔 비혼이 선택이 아니었죠. 결혼하지 않고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으세요.
“네. 혼자서 자기 하고 싶은 일 하고 배우고 그런 것도 괜찮지. 뭐든지 열심히 해서 자기 적성에 맞는 거, 좋아하는 것을 즐기면서 돈도 벌고 싶어요. 사람이 살면서 스트레스가 없을 수는 없잖아. 그래도 좋아하는 걸 하면 스트레스를 덜 받을 것 같아요. 애들한테도 결혼해라, 애 낳아라 그런 얘기 안 했어요. 열심히 일하고 쉴 때는 그냥 쉬라고 해요.”
- 국숫집은 언제까지 할 계획이세요.
“한 5년은 더 할까 했는데 요즘 우리 아저씨가 자꾸 몸이 마르는 게 (세상 떠날 날이) 많이 남지 않은 것 같아. 아저씨 벌어먹일 때까지 한 3년은 더 하려고요. 나이 들어서 벌면 70~80%는 다 자기가 쓰고 가는 거예요. 내가 벌어서 나한테 쓰는 거예요. 지금 임플란트도 세 번째 하는 거거든요. 누구 만났을 때 밥 한 끼라도 살 수 있고요. 얼마나 좋아요.”
- 장사 그만두면 뭘 하고 싶으세요.
“한 2년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쉬고 싶어요. 여행도 다니고 공부도 좀 하고 싶어요. 첫째는 컴퓨터를 배우고 싶고 내가 좋아하는 옷이랑 펀드나 주식 같은 것도 알고 싶고요. 공부해서 내 적성에 맞으면 육체노동은 덜 해도 되니까요.”
-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걸 하시면 안 되나요.
“일단 우리 아저씨가 저렇게 누워있는데 나 혼자 여행 다니고 그런 건 마음이 안 좋아요. 젊어서 만났는데 내가 보호도 해야 하고 책임져야 할 의무도 있고 도리도 있고 그런 거지.”
- 가족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싶으세요.
“그냥 열심히 한 사람으로요. 딸이 ‘엄마는 항상 주기만 하고 언제 받으실랍니까’ 그래. 내가 딱 잘라서 얘기했어요. 엄마한테 받은 사랑 플러스알파 해서 네 딸한테 줘라. 그럼 허무하지 않냐고 해요. 내 자식인데 뭐가 허무해요. 저희도 열심히 했고 나도 열심히 했으니 후회는 없지.”
- 평생 일하셨는데요. 혹시 명함 있으세요.
“아뇨. 뭐 하러. 안 만들었어요.”
- 그러네요. 인생이 명함이시니까요.
“눈뜨면 내가 나갈 자리가 있다는 게 참 좋은 거예요. 예전엔 기도도 많이 했는데 이제 안 해요.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장은교(젠더데스크) 이아름·심윤지(플랫) 조형국·이수민(데이터저널리즘팀 다이브) 이하늬(정책사회부) 이준헌(사진부) 최유진(뉴콘텐츠팀) 김윤숙(교열부)
▶️[젠더기획]"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201260600001)
▶️[젠더기획] 1954년 32만명의 딸들이 태어났다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20126060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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