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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의 위기? 문제는 양극화야

2022.04.10 10:41

젊은 세대의 문해력 격차가 향후 고령세대까지…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트리핀 딜레마는 국제 유동성 확보와 달러화의 신뢰도 간의 문제이다. 국제 유동성이란 국제적으로 보편적인 통용력을 갖는 지불 수단을 말하는데, 금 본위 체제에서는 금이 국제 유동성의 역할을 했으며, 각 국가의 통화 가치는 정해진 양의 금의 가치에 고정되었다.”

지난해 11월 18일 시행된 2022학년도 국어영역 시험은 수험생들을 ‘멘붕’에 빠뜨렸다. 4번 문제부터 13번 문제까지 10문제를 풀기 위해 읽어야 하는 2편의 비문학 지문이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다. 헤겔 철학의 주요 개념인 변증법을 제시한 지문과 뒤이어 나온 경제학의 ‘트리핀 딜레마’를 활용한 지문이었다. 특히 입시교육업체에서 집계한 문항별 정답률을 보면 국어영역에서 가장 낮은 정답률 22%가 나온 11번 문제 역시 이들 지문을 읽고 풀어야 하는 문제였다.

문제는 ‘트리핀 딜레마’가 나온 시험문제 자체가 아니라 교육현장에서 ‘문해력 딜레마’를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있다. 어려운 수능시험에 대비하느라 성적이 상위권인 학생에만 초점을 맞추면 문해력 향상이 더욱 절실한 하위권 학생들에겐 아예 학습기회가 더 적게 돌아갈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정답률이 22%라는 건 5개 보기 중에 하나를 찍어도 비슷한 정답률이 나온다는 얘긴데, 그런 문제를 풀 수 있는 소수의 학생 눈높이에 맞춰 학교교육을 할 수는 없지 않나.” 서울의 공립고등학교 국어교사 최모씨는 “요즘 학생들은 사흘이 4일의 다른 말인 줄 안다고 비아냥대는 얘기가 사실 완전히 틀렸다 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라 문해력의 양극화가 수학능력의 양극화로 직결되고 있다”고 말했다.

■사흘이 4일이라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장기간의 비대면 수업이 이어지면서 글을 읽고 뜻을 파악하는 학생들의 능력이 전반적으로 낮아졌다는 문제 제기도 곳곳에서 나온 바 있다. 지난해 4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전국 초중고교 교사 1152명을 대상으로 현장에서 접하는 학생들의 문해력 수준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학생들의 문해력 수준이 70점대(C등급)’라고 응답한 비율이 37.9%로 가장 높았다. 이어 35.1%의 응답자는 학생들의 문해력 수준을 60점대(D등급)로 매겼다. 문해력 수준이 낮은 이유로는 ‘유튜브와 같은 영상 매체에 익숙해서(73%)’, ‘독서를 소홀히 해서(54.3%)’를 꼽았다.

한창 배우는 나이의 학생들과 만나는 교육현장의 체감도 훨씬 더하다. 코로나19 이후 문해력의 위기가 더욱 심각해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2020년에도 정부가 8월 17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했다는 기사에 달린 댓글 때문에 뜬금없는 ‘사흘’ 논란이 벌어졌다. 최모 교사의 말처럼 ‘사흘’을 3일이 아니라 4일로 알고 있던 네티즌들이 예상보다 많았던 탓이다. 이 논란을 계기로 젊은 세대의 기초 어휘 이해가 부족하며 문해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2년 전보다 최신의 비교 자료를 확인하면 학생을 포함한 젊은 세대의 문해력이 더 낮아지고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교육부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지난해 9월 발표한 제3차 성인문해능력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 성인의 문해력이 과거보다 전반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조사대상 연도인 2020년 ‘일상생활에 필요한 충분한 문해력을 갖춘 수준(중학 학력 이상 수준)’으로 정의된 ‘수준 4’ 이상의 문해력을 갖춘 인구의 비율은 79.8%로, 2014년(71.5%)과 2017년(77.6%)보다 높아졌다. 반대로 ‘가정 및 여가생활 등 단순한 일상생활에 활용은 가능하지만, 공공 및 경제생활 등 복잡한 일상생활에 활용은 미흡한 수준(중학 1~3학년 학습 필요 수준)’인 ‘수준 3’을 비롯해 그보다 문해력이 낮은 ‘수준 1·2’를 포함한 ‘문해교육 대상 인구’의 비율은 20.2%로 2014년(28.6%)과 2017년(22.4%)보다 낮아졌다.

■도시·농촌, 학력 수준따라 격차

조사대상이 성인이지만 가장 낮은 연령대인 18~29세 구간에는 고등학생과 대학생도 일부 포함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학생과 젊은 세대의 문해력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는 주장도 힘을 잃는다. 18~29세 인구 중 문해력 수준 1~3에 해당하는 비율은 2014년 12.9%에 비해 2020년 4.7%로 크게 낮아졌다. 이런 감소세는 전 연령대에서 비슷하게 나타났다. 다만 2020년 기준 수준 1~3에 속하는 인구 비율은 30대 4.7%, 40대 8.5%, 50대 17.2%, 60대 35.6%, 70대 58.9%, 80대 77.1%로 연령이 높아질수록 문해력이 낮은 인구 비율이 더 높아지는 양상이 확인됐다.

연령이 높아질수록 문해력 측정 점수가 떨어지는 현상 자체는 국제 비교 자료를 봐도 공통되게 나타난다. 나이가 많을수록 교육기회가 균등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고, 또한 노화에 따른 인지능력의 감퇴가 문해력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한국은 유독 연령대에 따른 격차가 매우 크다는 점이 눈에 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13년 기준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를 보면 한국의 연령대별 격차가 조사대상국 가운데 가장 컸다.

국내의 고등교육 환경 변화를 알고 있다면 이와 같은 연령별 차이가 나타난 이유는 짐작할 만하다. 현재는 대학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 비율이 전 세계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를 정도로 교육환경이 개선됐지만 불과 40년 전만 해도 국내에서 고등교육을 경험한 비율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한창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있는 학생들과 교육을 마친 성인들을 포함해 전 연령대에서 문해력의 양극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 더 주목한다. 한국사회 구성원 가운데 나타나는 문해력 격차를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만드는 기준이 연령이긴 하지만, 도시와 농촌, 학력과 소득 수준, 성별에 따라 문해력의 차이가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제3차 성인문해능력조사 결과를 분석한 허준 영남대 교육학과 교수는 “현재의 기초문해교육 투자를 더욱 확대해 문해 학습자들의 실질적인 삶의 질을 향상할 수 있어야 한다”며 “더욱 복잡한 환경에서 필요한 디지털 문해력과 미디어 문해력, 정치 문해력 등을 함께 키울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국내의 문해교육정책이 가장 시급하게 문해력 향상을 필요로 하는 무학 중고령 학습자를 주대상으로 삼아왔으나 코로나19 이후 교육현장에서 나타난 학생들 간의 교육기회 격차 역시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지혜 한림대 일송자유교양대학 교수는 “코로나 시대를 지나오며 학생들의 학력 양극화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코로나 시대의 저학력 학생들이 저문해 학습자가 되어 사회로 나오는 것”이라며 “이제 정책 대상을 ‘중고령의 비문해’로부터 ‘청년과 중년의 저문해’로 대폭 확장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문해교육 전반의 디지털 전환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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