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만 하다가 결국 임기 끝까지 차별금지법 안 만들었다

2022.05.09 15:15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을 하루 앞둔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농성장 모습. 농성장에는 인권활동가 2명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며 29일째 단식 농성 중이다. 농성장 뒤로 취임식 방송 부스가 보인다. 성동훈 기자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을 하루 앞둔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농성장 모습. 농성장에는 인권활동가 2명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며 29일째 단식 농성 중이다. 농성장 뒤로 취임식 방송 부스가 보인다. 성동훈 기자

문재인 정부는 결국 차별금지법 제정 약속을 지키지 않고 9일 임기를 마친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도 법 제정을 외면하다가 국민의힘에게 ‘여당’ 타이틀을 넘겨준다. 국민 다수가 찬성하고 시민사회가 오랫동안 요구해온 법 제정은 다시 안갯속으로 빠졌다.

■‘할 수 있는 건 다 한’ 시민사회, ‘할 수 있는 것 다 안 한’ 정치권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지몽 스님과 종수 스님(사회노동위원회), 정보라 비정규교수 조합원이 지난해 8월30일 차별금지법 제정의 간절함과 국민 10만 청원의 뜻을 국회에 촉구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국회까지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지몽 스님과 종수 스님(사회노동위원회), 정보라 비정규교수 조합원이 지난해 8월30일 차별금지법 제정의 간절함과 국민 10만 청원의 뜻을 국회에 촉구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국회까지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인간 존엄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만들기 위해 지난 몇 년 간 입법청원, 도보행진, 집회, 문화제, 거리유세, 토론회, 성명 등 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을 했습니다” 지난달 11일 국회 앞 기자회견에서 오경진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처장은 답답함을 토로했다. 성별·인종·나이·종교 등 모든 유무형의 차별을 금지하자는 차별금지법은 2007년 처음 발의된 뒤로 매 회기마다 발의됐지만 한 번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대선 때 차별금지법 제정을 약속한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당선되자 시민사회의 기대가 컸다. 그러나 법 제정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3년 만인 2020년에야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차별금지법을 대표발의했다. 이후 법안 제정을 촉구하는 국회 국민동의청원이 10만 동의를 얻어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됐다. 그러나 9일 국회의안정보시스템을 보면 차별금지법(장혜영안)은 2020년 9월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딱 한 차례 논의됐다. 그나마 회의록에 기록된 대화 13만6000자 중 차별금지법 논의 분량은 2.8%인 3800자에 그쳤다. 민주당 의원들이 발의한 평등법 3건(이상민·박주민·권인숙안)은 아예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정치권의 냉대에 시민사회의 구호는 “차별금지법에 찬성해달라”가 아니라 “찬성이든 반대든 입장을 밝혀달라”가 됐다. 박래군 인권재단사람 이사는 지난해 10월22일 기자회견에서 “(의견 없이) 깔아뭉개는 무책임한 행태를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선거공학적 이해타산만 횡행하는 망령이 여의도와 청와대까지 휩쓸고 있다”(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비판이 나왔다. ‘차별에 찬성한다’는 낙인은 싫지만 보수 기독교 등의 반대를 의식해 정치권이 침묵했다는 것이다.

정치권이 꿈쩍도 하지 않자 지난달 11일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이종걸 공동대표와 미류 책임집행위원이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문재인 정부의 임기가 끝나는 이날은 이들이 단식농성에 돌입한 지 29일째 되는 날이다. 송두환 인권위 위원장은 지난 8일 “단식농성자들의 애끓는 절규는 한 달이 돼 가고 있다”며 “절박한 심정으로 차별금지법 공청회를 조속히 개최하고 입법 절차를 지체 없이 시작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했다.

■지방선거 앞두고 또 침묵?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지난 4월11일 오전 인권사회단체 활동가들과 정치인들이 차별금지법 4월 제정을 위한 평등 텐트촌과 단식투쟁 돌입기자회견을 하고있다. 가운데 흰옷입은 두 사람이 단식을 할 미류(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좌 ), 이종걸(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사무국장)씨다. 우철훈 선임기자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지난 4월11일 오전 인권사회단체 활동가들과 정치인들이 차별금지법 4월 제정을 위한 평등 텐트촌과 단식투쟁 돌입기자회견을 하고있다. 가운데 흰옷입은 두 사람이 단식을 할 미류(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좌 ), 이종걸(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사무국장)씨다. 우철훈 선임기자

정치권은 ‘사회적 합의가 더 필요하다’며 법 제정 노력을 미뤄왔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여론조사는 법을 제정 ‘사회적 합의’가 이미 이뤄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장 최근인 지난 8일 인권위의 ‘평등에 관한 인식조사’를 보면 시민 67.2%가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지난 2월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가 개신교 신도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차별금지법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42.4%로 반대(31.5%)보다 많았다.

임기 말을 앞두고 여권에서 일부 움직임이 있었지만 내실이 없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인권위 설립 20주년인 지난해 11일25일에야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인권 규범을 만들어 나가는 일에 함께 역량을 모아야 한다”며 임기 중 처음으로 법안 제정 필요성을 언급했지만 선언적인 수준에 그쳤다. 민주당은 지난달 말에야 법안 내용을 논의할 공청회를 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공청회 개최 시기와 내용, 참석자도 정하지 않았다.

시민단체들은 오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의 침묵이 또다시 반복될까봐 우려한다. 더구나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후보 시절 차별금지법을 두고 “논란의 여지가 많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터다. 장예정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은 “향후 방향은 대통령 취임사 등 새 정부의 입장이 나온 뒤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관련기사▶‘차별’에 눈감고···또 표만 본 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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