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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명·장애등록이 담지 못하는 우리...‘신경다양인’을 아시나요?

2022.09.12 10:52 입력 2022.09.12 14:14 수정

국내 첫 신경다양성 지지 단체 ‘세바다’

장애 등록 여부 별개로 신경 발달 주목

자폐인 모임서 비장애인까지 참여 확대

“신경 발달의 다양성 인정하자는 운동”

신경다양성 지지 단체 ‘세바다’ (왼쪽)이칼 활동가, (가운데)조미정(활동명 리얼리즘) 대표, (오른쪽)이윤진 활동가. 우철훈 선임기자

신경다양성 지지 단체 ‘세바다’ (왼쪽)이칼 활동가, (가운데)조미정(활동명 리얼리즘) 대표, (오른쪽)이윤진 활동가. 우철훈 선임기자

“자폐의 공식적인 진단명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입니다. 스펙트럼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자폐인은 천차만별입니다. 고래처럼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에 나오는 이 대사처럼 장애의 다양성에 집중해 당사자의 권리를 외치는 이들이 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 조현형 스펙트럼 장애, ADHD, 읽기 장애…국내 첫 신경다양인 권익 옹호 단체로 꼽히는 ‘세바다(세상을 바꾸는 다양성)’는 진단 이력 또는 장애인 등록 여부와 관계 없이 신경 발달 과정이 ‘전형적’이지 않다고 판단하면 ‘신경다양인’으로 명명한다. 지난해 10월 비영리단체로 등록한 신생단체로 활동가 20여명, 회원 70명가량이 함께하고 있다.

조미정 세바다 대표(27·조현형 성격장애인), 이칼(활동명) 활동가(19·자폐 스펙트럼 등록 장애인), 이윤진 활동가(20·자폐 스펙트럼 미등록 장애인)를 지난 7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신경다양인, 스펙트럼 안의 존재들

세바다는 자신의 발달 과정을 돌아보는 ‘당사자’를 신경다양인을 정의하는 주체로 내세운다. 진단명과 장애등록 여부만으로는 당사자들을 오롯이 규정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신체·신경 장애 등을 포괄해 폭넓게 신경다양성을 규정한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 10명가량이 이야기를 나누는 오픈 채팅방이 단체 결성으로 이어졌다. 초기 세바다에는 자폐인이 대다수였으나, 지금은 정신장애인, ADHD(주의력 결핍 과다행동장애) 당사자뿐 아니라 비장애인도 함께하고 있다. 자폐인은 ‘고인지 자폐’로 분류되는 이들이 대다수여서 더 많은 당사자들의 참여를 끌어내는 것은 과제이다.

미정씨는 “신경 발달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운동”이라며 “신경 발달에 여러 형태가 있는데, 비장애인들(신경전형인)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패턴이 있고 발달장애인 등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이지 않은 패턴이 있다”고 말했다. “장애 운동의 한 갈래로 장애 사회적 모델을 제시한다”고 설명했다.

윤진씨는 “신경전형인에게도 신경다양인에게 나타날 수 있는 뇌 패턴이 일부 섞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며 “시대가 어떻게 용인하는지에 따라 구분이 달라진다. 큰 스펙트럼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 중에는 장애인으로 등록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세바다 내 장애 미등록인과 등록 인의 비율은 8 대 2 정도다. 15년 전 유아기 때 자폐 스펙트럼 진단을 받은 윤진씨는 치료하는 데 쓴 돈만 “지방에서 집 한 채 살 정도”지만, “(당시 병원에서) 장애인 등록 기준이 얼마나 박하게 돼 있는지 아느냐”고 했다. 미등록 장애인인 그는 군 입대 전 신체검사에서는 5급 판정(면제)을 받았다.

미정씨는 “여성 당사자들은 사회에서 자폐 특성을 숨기도록 더 많이 요구받는 경향이 있는 등 자폐 진단을 받기 어려운 이유가 많다”며 “자가 진단을 하는 자폐 당사자가 상당하다”고 했다.

세바다는 최근 한국여성민우회·다른몸들과 함께 당사자들이 자신의 질병 서사를 사회 비판적으로 풀어내는 ‘약자생존’ 캠페인을 기획했다. 이들은 언론사, 정치인 등이 장애인을 비하하는 표현을 사용한 데 대해 항의했고, 정신적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녹아든 영화들을 비판하는 성명도 냈다. 탈시설·탈가정 자립, 혐오 발언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장치인 차별금지법 제정 등을 촉구하기도 했다.

신경다양인 정체성 가진 후, 있는 그대로의 ‘나’ 마주해

이들은 신경다양인 정체성을 밝히고 단체, 직장, 학교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남들과 사고체계라든가 생활습관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할 자신이 있고 제가 개인적으로 공부했던 것들도 검토해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윤진씨는 학교 연구실에 자신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임을 밝혔다.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까칠한 사람이 있으면 트러블이 생기긴 했지만, ‘귀한 사람 왔다. 환영이다’라며 반기는 사람도 있었어요.”

신경다양인으로 자신을 정의하자 비장애인과 다른 자신이 ‘틀렸다’는 생각에 균열이 났다. 비장애인에게 “맞춰주는 게 당연한 줄 알았던” 이칼 활동가는 스스로를 더 이해할 수 있게 됐고, 부당한 일들에 목소리를 내게 됐다고 했다.

장애를 고쳐야 하는 줄만 알았던 미정씨도 “내가 잘못된 게 아니었고 남들과 다를 뿐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고 했다. 자신감이 생기다 보니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도 늘어났다. 미정씨는 4살 때부터 신경다양적 특성을 보였고,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우울증이 있었다. “자폐 비슷한 특성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고 비장애인과 같은 수준의 성취를 요구받았는데, 모임에서 신경다양인이라 인정해주니 위안이 됐어요.”

우영우처럼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서번트 증후군’을 가진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는 극소수다. 신경다양인들은 이같은 소수의 특성을 일반화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신경다양인의 특성에서 비롯되는 장점이 있다고 말한다.

미정씨는 ‘창의성’을 장점으로 꼽았다. 그는 단체 행사 기획, 슬로건 발굴 모두 척척 해냈고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칼 활동가는 기억력이 뛰어나고 미각이 예민하다. 윤진씨는 청각·후각이 섬세하다.

‘세바다’가 7월15일부터 16일까지 양재 aT센터에서 열린 ‘제2회 오티즘엑스포’에 참여한 모습. 세바다 제공

‘세바다’가 7월15일부터 16일까지 양재 aT센터에서 열린 ‘제2회 오티즘엑스포’에 참여한 모습. 세바다 제공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

비장애인 중심 사회의 벽은 여전히 두텁다. 더 많은 능력을 입증해야 함께 생활하고 일할 수 있다. 이른바 ‘고인지 자폐인’들은 훈련을 통해 자폐 특성을 가리는 마스킹(masking)을 하기도 한다.

윤진씨는 “주변 사람들이 4시간 일할 때 8시간 일한다. 편견을 넘으려면 남들보다 많은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금 나오는 행동들도 다 마스킹 연습을 한 것”이라는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는 눈을 못 맞췄다. 고치는 게 매우 어려운데, 억지로 집중해서 보는 습관을 들이다 보니 그나마 나아졌다”고 했다.

미정씨는 “일을 못해야만 정신적 장애인이라는 편견이 강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윤진씨는 “이해를 잘 해주는 사람도 있고, ‘네 행동 하나하나를 어떻게 다 신경써주고 감안해주겠냐’는 반응도 많이 받았다”며 “당사자에 대한 관점에 따라 편이 갈라졌다”고 했다.

비장애인과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고 취업난을 겪거나 직장에서 해고되기도 한다.

미정씨는 자신이 겪은 학교 폭력 경험을 털어놨다. ‘혼잣말 하면 무섭다’ ‘다른 사람들은 하지 않을 법한 이야기를 한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첫 직장에서는 “일 처리가 느리다”며 해고했다.

중·고등학교 때 특수학급에 배정됐지만 대부분의 수업을 ‘일반 학급’에서 들은 이칼 활동가는 “대학교도 특수학급으로 갈 거냐”와 같은 혐오 표현에 무방비로 노출됐다고 회상했다. 윤진씨 역시 “보통 사람이 보기에 불편하게 행동할 거면 시설로 들어가야지, 왜 사회에 나오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 필요해

세상을 바꾸는 다양성. 세바다의 명칭처럼 다양성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윤진씨는 신경다양인의 사회활동 반경이 넓어질수록 비장애인들 역시 자신들이 가진 다양한 요구나 욕구를 세심하게 채워나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무조건 섞여서 평균이 될 필요는 없잖아요. 그냥 빨간 구슬, 파란 구슬인 채로 섞일 수 있는 것처럼요. 그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신경다양인들에게는 무엇이 필요할까. 우영우에게는 ‘봄날의 햇살’ 같은 동료 최수연, 절친 동그라미, 자신의 편견을 깨닫고 인정하는 상사 정명석, 자폐인의 특성을 알아가려는 연인 이준호가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장애가 더는 ‘장애’로 남지 않는 순간들이 쌓인다. 환경이 장애를 장애로 만드는 것이다.

윤진씨는 “미국 등 해외 고용 시장에서는 자폐 스펙트럼 (특성)을 우대하는 풍조가 있다”고 했다. 신경다양인들이 자신의 진단 특성을 활용해 색다른 아이디어를 내는 등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정씨도 “(신경다양인들이) 자신에게 잘 맞는 환경을 찾으면 적응해 성과를 낼 수 있다”고 했다. “세바다에서는 누군가 증상 때문에 문제가 생겨도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아요.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이 존중받는 게 가장 중요해요. 직접 경험하도록 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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