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빈곤자의 2023년

①육아 가구에 다가오는 ‘주 69시간’의 먹구름

2023.03.26 18:43 입력 2023.03.26 19:27 수정

강호민씨가 퇴근 후 아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에 들러 함께 귀가하고 있다. 김태훈 기자

강호민씨가 퇴근 후 아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에 들러 함께 귀가하고 있다. 김태훈 기자
일주일은 168시간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대로 한 주 노동시간이 69시간까지 늘어나면 99시간이 남는다.
통계청이 5년마다 실시하는 생활시간 조사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취업자의 1주당 평균 ‘필수·의무시간’은 103.5시간이다. 노동시간을 제외하고 수면과 식사, 직장 출·퇴근, 가사노동 등 개인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이만큼이다. 여기에 여가를 포함하지 않았는데도 주 69시간을 일하면 4.5시간 ‘적자’가 발생한다.
‘시간 빈곤’은 소득 빈곤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다. 특히 자녀를 양육하고 있거나, 노인·장애인·환자 등 돌봄이 필요한 구성원이 있는 가구는 수시로 시간 빈곤에 시달린다.
연구자들은 통상 여가(자유시간)가 그 나라 중윗값의 60% 이하이면 시간 빈곤으로 여긴다. 국내 연구에서는 한국의 시간 빈곤율이 19.9%(신영민, ‘시간빈곤인의 노동시간 특성에 관한 연구’. 2021)라는 조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소득이 모자란 가구는 이를 보충하기 위해 일하는 시간을 늘려 시간 빈곤에 빠진다. 일하는 시간을 늘리면 가족 돌봄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가족을 방치하지 않으려면 가족을 대신 돌봐주는 서비스를 이용해야 하고, 그만큼 지출이 늘어나 경제적 어려움이 반복된다.
이런 만성적인 시간 빈곤은 저출생의 한 원인이기도 하다. 양육비나 보육서비스 지원 등의 정책으로는 해결되지 않으니 결국 아이를 낳아 기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경향신문은 자녀를 비롯해 늙거나 병들어 돌봄이 필요한 가족이 있어 시간 빈곤을 겪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잠 자고 밥 먹는 시간까지 쪼개 최소한의 돌봄 시간을 확보하려는 이들은 ‘시간 복지’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부족한 돌봄 가구와 이들의 시간 빈곤 문제를 연구한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3회에 걸쳐 소개한다.

목차
①‘시간 빈곤’ 육아 가구에 다가오는 ‘주 69시간’의 먹구름
②돌봄은 시간이 든다, 아주 많이
③우리에겐 ‘시간 복지’ 정책이 필요합니다


혼자서 자녀 둘을 키우며 직장에 다니는 임효빈씨(44)는 며칠 전 심한 두통으로 직장에서 조퇴했다. 그러나 병원 가는 것을 포기하고 먼저 집으로 향했다. 초등학교 4학년과 6학년인 두 아이를 일찍 만날 기회였기 때문이다. 임씨는 집에서 ‘휴식 겸 돌봄’을 하면서 두통을 다스렸다.

건설업체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임씨는 평소에는 오후 7시 퇴근 후 곧바로 집에 돌아와 저녁 식사 준비를 한다. 이어 설거지와 집 청소도 임씨의 몫이다. 지난 24일 기자와 만난 임씨는 “회사 회식에 한 번도 참석하질 못했다”며 “나 혼자 쓸 수 있는 시간이 생기면 호프집 가서 맥주 한 잔 시원하게 마셔보고 싶다”고 말했다.

홀로 ‘치맥’을 즐기는 꿈은 그저 꿈일 뿐이다. 임씨는 급한 일이 생겨도 아이들을 부탁할 형제가 없다. 부모님은 만나기조차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가 노동시간을 더 늘릴 수 있도록 정부가 허용한다면 임씨는 더 이상 가정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임씨는 “이런 정책 대부분은 한부모 가정을 배제해 놓고 논의가 진행된다”며 “애초에 ‘주 52시간 노동’조차도 나랑은 다른 나라의 이야기였다”고 말했다.

임씨 같은 ‘한부모’ 가구의 양육자는 대표적인 ‘시간 빈곤자’로 꼽힌다. ‘양부모’ 가구보다 소득이 적을 가능성도 커 소득과 시간의 이중 빈곤을 경험하곤 한다.

경기도여성가족재단이 2021년 5월 내놓은 ‘생활시간조사를 통해 본 한부모 시간빈곤’ 보고서를 보면 취업한 한부모 여성의 일하는 시간은 자녀가 있는 맞벌이 여성보다 하루 평균 13분 더 길었지만 가정관리 시간은 17분 짧았다. 부족한 소득 때문에 일하는 시간을 늘리고 그만큼 가정에서 쓰는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보고서를 쓴 노경혜 경기도여성가족재단 연구위원은 “한부모의 시간 빈곤을 논의할 땐 단순한 시간사용 차원뿐 아니라 소득과 한부모 가족의 특수성을 고려해 복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간 빈곤자의 2023년]①육아 가구에 다가오는 ‘주 69시간’의 먹구름

양부모 가구는 한부모 가구보다 대체로 사정이 나은 편이다. 하지만 양부모 부모 둘 중 한 명이 빠지면 한부모 가구와 같은 일을 겪을 수 있다. 6세 아들 한 명을 키우며 맞벌이를 하는 강호민씨(41)와 김진선씨(39) 부부에게도 ‘시간 빈곤’이 때때로 찾아온다. 부인인 김씨는 “남편이 일하는 회사 프로젝트 마감이 닥치면 새벽에나 귀가할 때도 종종 있다”며 “남편이 바쁜 와중에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하원시킨 뒤 다시 회사로 가거나, 내가 연차를 쪼개 써야 겨우 아이를 돌보는 게 가능한 날도 있다”고 말했다.

‘6시 퇴근’을 지켜도 시간이 풍족하게 남지는 않는다. 아이는 부모와 함께 출근길에 함께 집을 나서서 퇴근 시간까지 어린이집에서 지낸다. 각자가 일터와 보육시설에서 지내는 시간이 하루 대부분을 차지하다 보니 막상 세 가족이 함께 여가를 즐길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김씨는 “적어도 하루에 한 시간은 함께 하는 시간을 확보하려고 하지만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주 69시간’까지 노동시간을 늘리려는 정부의 정책은 강씨와 김씨 부부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느껴진다. 김씨는 “정부가 일과 가정을 양립하겠다는 얘기를 계속해오면서 그게 가능해지려면 시간이 중요하다는 점은 몰랐는지 답답하다”며 “주 52시간제에도 현실이 이런데 주 69시간을 하겠다는 건 가정을 해체하겠다는 소리”라고 말했다.

3년 전 결혼한 이석훈씨(39)와 조민정씨(37) 부부는 시간 빈곤을 ‘간접 경험’하고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다. 이씨는 “누나가 첫째를 낳았을 때까지만 해도 다니던 대학원의 박사 논문을 곧 마칠 것처럼 보였는데 연년생인 둘째를 낳은 뒤 10년 넘게 해왔던 공부를 아예 놔버리는 걸 봤다”고 말했다.

이씨 부부는 아이가 생기면 소득 빈곤과 시간 빈곤을 모두 경험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이씨는 “무엇보다 2세가 늘 바쁘면서도 돈에 쪼들리는 부모 아래서 자라게 하고 싶지 않다”며 “육아의 현실을 주변에서 어깨너머로 봐온 경험으로는 기본소득처럼 누구나 언제든 쓸 수 있는 기본휴가 같은 대책도 같이 나와야 하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