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지 수집하는 노인들 위해
녹색병원 ‘새 운반구’ 연구 중
리어카는 무게만 50~70㎏
유아차·음료 카트는 양 적어
왕복 불편에 폐지 잘 쏟아져
만성 허리·어깨 통증 등 유발
병원, 노인들 요청사항 연구
‘캠핑카’ 타입으로 설계 진행
김순자씨(73·가명)는 매일 오전 6시 음료 운반용 카트를 밀고 폐지 수집에 나선다. 김씨의 폐지 수집 구간은 주택가 일대 2㎞ 정도다. 주택가 뒤편에 버려진 종이 상자와 인근 상가에서 내놓은 상자들을 빠짐없이 모으다 보면 몇 시간이 훌쩍 흐른다. 김씨는 지난 13일 오전 11시 서울 중랑구 송계공원에서 여느 날과 다름없이 목장갑을 끼고 폐지 수거 작업에 한창이었다.
“발로 건드려보면 알아. 병 소리가 나는지, 깡통소리가 나는지.” 쓰레기봉지를 이리저리 살피던 김씨가 봉지 안에서 ‘에프킬라’ 빈 통 2개를 찾아냈다. 버려진 밥솥도 준비해둔 비닐에 담아 카트 손잡이에 척 걸었다. 버려진 종이 상자 사이에서 캔이나 고철류를 만나면 유난히 반갑다. 고물상에서 가격을 후하게 쳐주기 때문이다.
30분쯤 지나 고정끈으로 동여맬 수 없을 정도로 카트에 상자가 쌓이자 그는 상자를 하나씩 해체해 카트에 차곡차곡 쌓았다. 김씨가 이날 한 시간 남짓 모은 폐지의 양은 24㎏가량이었다. 인근 고물상에 수집한 폐지·고철을 넘겨주고 받은 돈은 1400원. 김씨는 이 돈을 받아들고 “한 번 돌아서 500원도 못 받는 날이 있는데 오늘은 캔이랑 밥솥도 있어서 좀 더 받았다”고 했다.
칠 벗겨진 음료 운반용 카트는 김씨의 ‘오랜 동반자’다. 가로·세로 길이 1m 남짓한 상자까지 카트에 담을 수 있다. 어깨높이까지 차곡차곡 폐지를 쌓으면 카트 무게는 60㎏까지 되는데, 이 정도가 김씨가 무게중심을 잃지 않고 옮길 수 있는 최대치다.
김씨는 2000년 무렵 남편과 트럭을 몰면서 폐지를 수집했다고 했다. 동네 곳곳에 폐지와 고철이 널려 있던 때였다. 이후 남편과 사별한 뒤부터 김씨는 남편이 남긴 높이 1.2m의 14㎏짜리 카트를 밀며 폐지 수집 일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최근 들어 부쩍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끼곤 한다. 지난 8월 팔에 통증이 심해져 병원을 찾았지만 ‘물리치료 비용 3만원’이라는 말을 듣고 진통제 약만 타왔다고 했다. 김씨는 “물리치료 한 번 받으려면 나흘 동안 번 돈을 다 써야 한다. 아프면 그냥 전기장판 틀어놓고 쉬거나 보건소에 가서 침을 맞는다”고 했다.
서울 중랑구청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중랑구 내에서 김씨와 같은 폐지 수집 일을 하는 노인은 100여명으로 파악된다. 전국적으로는 약 6만6000명이 폐지 수집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사용하는 운반구는 일반 리어카부터 음료배달에 주로 쓰이는 카트, 유아차까지 다양하다.
여러 운반구들은 이들의 생계보조 도구인 동시에 나름의 단점들을 가지고 있다. 리어카는 무게만 50~70㎏에 달해 근골격에 무리를 주는 데다 경사로 등에서 사고 위험성이 높다. 유아차나 음료용 카트의 경우 무게는 비교적 가볍지만 수집한 폐지가 쏟아지기 쉽고, 한 번에 나를 수 있는 폐지 양이 적어 여러 번 왕복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은 지난 8월부터 폐지 수집 노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운반구 제작·보급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무게나 안정성 등 기존 운반구의 단점을 보완하고 노인의 신체조건에 알맞은 운반구를 보급하자는 취지다. 지금까지 70~80대 폐지 수집 노인 8명이 건강진단·면담·현장실태조사 등 사전 조사에 참여했다.
조사에 참여한 노인들은 모두 회전근개 파열·척추협착 등 근골격계 질환을 앓고 있었다. 응답자 5명은 허리 통증을, 3명은 어깨 통증을 호소했다. 김씨도 2006년쯤 폐지를 옮기다가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 적이 있다.
녹색병원 측은 개별 면담을 통해 신형 운반구 초안에 반영할 요소를 찾고 있다. 김씨는 “보관이 쉬운 접이식 운반구가 필요하다”며 “이동 중 폐지가 떨어지는 문제가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허승무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면담과 현장 조사 내용을 종합해 신장에 따라 높이를 조절할 수 있고, 바퀴가 4개 달린 캠핑카 타입의 운반구 설계 작업을 진행 중”이라며 “안전사고 위험을 줄이기 위한 경광등이나 브레이크 기능 설치 등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