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 호주제가 폐지되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성적으로 문란해질 것이라 걱정하던 이들이 있었다. 지금도 그 ‘우려’는 주어만 바꿔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2005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난 호주제 헌법소원 대리인단 일원이었던 김수정 국가인권위원회 전 비상임위원(55)은 안창호 신임 인권위원장의 저서·기고문·청문회 발언 등에서 기시감을 느꼈다고 했다. 안 위원장이 차별금지법과 동성애를 반대하며 내세운 ‘도덕과 윤리가 파괴될 수 있다’는 논리가 20여년 전 호주제를 옹호하던 이들이 내세운 것과 닮았기 때문이다. 지난 13일 임기가 공식 종료돼 인권위를 떠나는 김 전 위원의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은 이유이다.
📌[플랫]“차별금지법 도입되면 에이즈·항문암 확산돼” 혐오발언 쏟아내는 인권위원장 내정자
경향신문은 지난달 22일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지향에서 김 전 위원을 만난 데 이어 18일 전화로 인터뷰를 했다. 김 전 위원은 인권위를 떠나는 심정을 묻자 “쉽지 않은 시기이지만, 인권 현안이 나아갈 방향은 뚜렷하다고 믿는다”며 “인권위에서만큼은 가장 작은 소수자의 목소리가 천둥보다 크게 들릴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안 위원장에 대해서는 “인권위의 역할과 위상을 고민하고 직을 수락한 것이라 생각한다”며 “업무에 사견을 넣지 않으실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이 말은 믿음이라기보다는 ‘당부’나 ‘호소’처럼 들렸다.
아쉽고도 치열했던 3년···“쉽지 않을수록 묵묵하게”
2001년 변호사 활동을 시작한 김 전 위원은 여성·아동·이주민 등 소수자 변론에 앞장섰다. 호주제 폐지 뿐 아니라 양심적 병역거부 관련 병역법 위헌 소송(2018년)과 낙태죄 위헌 소송(2019년)을 이끌었고, 무료 법률상담 활동을 해왔다.
이처럼 인권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만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권고를 제안할 수 있는 ‘인권위원 3년’을 잘 해내고 싶었다고 했다. 김 전 위원은 “차별금지법에서 진전을 이루고, 노동과 아동 인권 분야 등에서 좋은 의견 표명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어 인권위 차원에서 정부에 ‘기후위기는 인권의 문제’라는 의견을 표명했던 것과, 윤석열 대통령 풍자만화 ‘윤석열차’에 대해 문화체육관광부에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던 것 등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2022년 화물연대 총파업과 관련해 운전기사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고 단체행동을 보장하는 입법 및 법률개정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정책 권고를 추진하지 못했던 것은 아쉬웠던 기억으로 꼽았다. 당시 김 전 위원과 서미화·석원정·윤석희 위원이 상임위원회에서 부결됐던 관련 안건을 전원위원회에 재상정하자고 제안했으나, 이충상·김용원 상임위원의 반발로 무산됐다. 그는 “국제노동기구(ILO) 기준에 입각해 초안을 준비했는데, ‘화물 지입차주는 노동자가 아닌데 허위공문서를 썼다’느니 하는 폭언을 듣기도 했다”고 했다.
📌[플랫]“일본 성노예 타령 자꾸 할 거냐”는 김용원 인권위원의 “반인권적 망언”
김 전 위원의 임기 마지막 1년은 이·김 상임위원과의 의견 충돌과 회의 파행, 보이콧으로 얼룩졌다. 그는 정의기억연대가 제기한 수요집회 보호 진정 건을 소위원회 위원 간 만장일치가 없었는데도 기각한 김 상임위원의 회의 운영 방식에 문제를 제기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이렇게 임기를 마무리하게 될 줄 몰랐다”면서도 “저 또한 회의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많이 보여드렸다고 생각해 죄송한 마음”이라고 했다.
그는 법조인 일색인 인권위원 구성에 다양성이 필요하다고도 제언했다. 지난 1년의 공방이 지엽적인 법률 조항 해석 문제로 비화한 데 대한 반성이다. 현재 인권위 상임·비상임위원 11명 중 남규선·이한별·김종민 위원을 제외한 8명이 모두 법조인 출신이다. 그는 “저도 변호사이긴 하지만, 실정법의 한계를 뛰어넘는 의견이 교환될 수 있으려면 현장성 있는 인적 구성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인권위가 정부 부처 중 유일하게 “인권에 가장 편향적이어야 하는 곳”이자, “인권적 상상력을 현실로 만드는 곳”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가 “현업에 돌아가서도 지지자이자 감시자로서 인권위를 챙겨볼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그는 종교적 편향성 우려가 불거진 안 위원장이 꾸려갈 인권위를 속단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는 “위원장께서 제가 대리한 양심적 병역거부 관련 헌법소원에서 합헌 취지의 소수의견을 냈었고 차별금지법에도 반대하는 등 저와 생각이 일치하는 분은 아니더라”면서도 “종교적 세계관과 공적 업무는 엄연히 다른 일 아니겠나. 인권위원장으로서의 책임을 느끼실 것이라 믿고 싶다”고 했다.
김 전 위원은 “인권을 되돌리려는 시도가 있을 수도, 속도가 느려질 수도 있지만 인권의 문제가 나아갈 방향성은 뚜렷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권적 흐름을 의심하지 않고 묵묵히 일을 해내는 게 중요한 시기가 될지도 모르겠다”며 “저 또한 바깥의 사람이 됐을지라도 묵묵하게, 때론 큰 소리도 내면서 인권위를 지켜보겠다”고 했다.
▼ 전지현 기자 jhyun@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