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2013.10.02 22:08 입력 2013.10.03 00:29 수정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천안역이었다
연착된 막차를 홀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톡톡 이 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플랫폼 위에서 한 노숙자가 발톱을 깎고 있었다
해진 군용 점퍼 그 아래로는 팬티 바람이었다
가랑이 새로 굽슬 삐져나온 털이 더럽게도 까맸다
아가씨, 나 삼백 원만 너무 추워서 그래
육백 원짜리 네스카페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이거 말고 자판기 커피 말이야 거 달달한 거
삼백 원짜리 밀크 커피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서울행 열차가 10분 더 연착될 예정이라는 문구가
전광판 속에서 빠르게 흘러갔다 천안두리인력파출소
안내시스템 여성부 대표전화 041-566-1989
순간 다급하게 펜을 찾는 손이 있어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게서 따뜻한 커피 캔이 만져졌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던 그 시였던가
여성부를 이성부로 읽던 밤이었다

- 김민정(1976∼ )

[경향시선 - 돈 詩]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 잘못 든 길이 새로운 길을 인도하기도, 잘못 읽은 글자가 새로운 의미를 개진하기도 한다. 무언가를 새롭게, 그것의 내면을 듣는 순간이다. 그때 우리는 처음의 발굴자가 된다. 막차는 연착되고 플랫폼 위에서 노숙자는 발톱을 깎고 있다. 군용 점퍼 아래 달랑 걸친 팬티가 무방비로 헐렁하다. 그런 그가 딱 ‘삼백 원’만을 구걸하며 자신의 커피 취향을 고수한다. “더러운 팬티를 수치스러워하기보다/ 낡은 팬티를 구차해하기보다/ 고무줄의 약해진 탄성을 걱정하는 데서부터/ 시라는 것을// 나는 처음, 느끼기 시작했던 걸까?”(시집 뒤표지 글) 엽기발랄시치미가 주특기인 시인은 노숙자의 추위를, 그에 대한 연민과 연대를 이렇게 엉뚱생뚱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도 이 시를 마음이 가닿는 대로, 읽고 싶은 대로 읽어도 좋겠다. 그러니까 나는 ‘굽슬’을 ‘굽실’로, ‘안내시스템’을 ‘아내시스템’으로 읽었다. ‘이 죽이는’을 ‘이죽이는’으로, ‘점퍼’를 ‘범퍼’로, ‘연착’을 ‘연락’으로 읽을 뻔했다. 나도 처음, 느끼기 시작한 것일까? 시인이, 삼백 원을 더해 네스카페를 뽑아다 준 것처럼,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는 이성부의 시 구절을 떠올린 것처럼, 하여 여성부를 이성부로 읽는 것처럼, ‘처음, 느끼기 시작하는’ 바로 그때 우린 시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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