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 김덕영

2013.11.29 21:23
박구용 | 전남대 교수·철학

이 나라에는 두 개의 눈만 있다. 하나가 개인의 눈이라면 다른 하나는 조직의 눈이다. 개인은 생명을 늘리고 권력을 키우기 위한 욕심으로 세상을 본다. 이 눈빛은 때로 홀로 세상의 주인이 되고자 불빛이 된다. 이런 눈빛만 판치면 세상이 불타는 법이다. 하지만 개인의 사심은 자연스러우니 선과 악의 저편에 있다고 치자.

[사유와 성찰]사회학자 김덕영

흔히 공동체로 불리는 조직에는 피의 동질성에 바탕을 둔 가족과 민족이 있는가 하면 거주 장소의 근접성에 따른 각종 행정구역과 국가도 있다. 이들 조직은 개인들처럼 더 오래 살아남고 더 큰 힘을 갖기 위해 갖가지 이데올로기와 폭력수단으로 무장한다. 더구나 이들 조직의 눈빛은 개인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해서 세상을 통째로 불태울 만큼 파괴적인 화염과 같다. 세계를 불바다로 만들지 않으려면 개인과 조직이 아닌 사회의 눈이 빛나야 하는 까닭이다.

나의 자유의사와 무관하게 자연적으로 혹은 행정적으로 소속된 조직을 가리켜 공동체라고 한다면, 사회는 각자가 자율적 의사에 따라 구성한 단체를 가리킨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현대의 가족은 사회이자 공동체다. 부부 관계가 사회라면 부모와 형제는 공동체적 관계다. 부부를 사회적 관계로 보아야 그들 사이의 강간을 처벌할 수 있다. 더구나 부모형제도 사회적 관계인 경우가 많아지고 있으니 바뀌어야 할 법률도 많다.

공동체는 그 구성원의 차이가 아니라 동일성과 동질성에 기초한다. 그 때문에 공동체 구성원을 가리키는 말도 집단적이다. 일가와 동포는 물론이고 군민, 도민, 국민은 모두 공동체 조직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강제를 함축하고 있다. 반면 구성원의 차이를 토대로 공공성을 지향하는 사회의 구성원을 가리켜 시민이라고 한다. 이때 시민은 도시민의 줄임말이 아니라 서로의 의지를 모아서 자율적으로 조직을 구성하고 해체할 수 있는 자유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개념 구성을 토대로 볼 때 개인과 조직 공동체의 시선만 있고 사회의 관점이 없는 한국에서 공공성의 영역은 커지기 어렵다. 그런데도 한국의 사회학은 사회적 관점에 대한 충분한 시민적 이해도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잡다한 설문과 통계만을 쏟아내고 있다. 최근 사회학계에서 나온 논문을 보면 사회의 눈빛은 거의 고려되지 않고 개인과 조직 공동체의 의식조사와 평가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사회 없는 사회학은 국가를 비롯한 각종 행정권력의 정책수립과 시장의 팽창을 꿈꾸는 자본권력의 선전기획에 저가로 팔리는 신세를 면키 어렵다.

사회는 자연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이론을 요구한다. 사회의 눈빛으로 새 세상을 만들려면 그만큼 탄탄한 사회이론이 있어야 하는 까닭이다. 이론 없이는 수량화된 연구에 의미 있는 질적 해석을 덧붙일 수도 없다. 하지만 이 나라 사회학계는 사회이론 연구자들을 교묘하게 유폐하고 무시한다. 대표적 피해자가 김덕영이다. 사회학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사회학에서 두 개의 큰 산맥을 이루고 있는 베버(M. Weber)와 짐멜(G. Simmel) 연구자라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논문으로 독일에서 박사 학위만이 아니라 교수 자격까지 취득한 학자를 이 나라 대학들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김덕영은 베버의 대표작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2010)을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을 만큼 처절하게 학문하는 사람이다. 최근 번역 출간한 짐멜의 <돈의 철학>(2013)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가 성취한 학문의 깊이가 어디에 이르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짐멜과 베버에 관한 그의 연구서들에는 한국 사회에 대한 중대한 진단서들이 빼곡하게 차 있다. 그는 그저 서양의 이론이나 서둘러 소개하는 배달(配達)의 달인이 아니라 세계 시민적 관점으로 이 땅에서 자라난 사회적 고통을 붙들고 씨름하는 동네 골방 학자다.

배달 사회학은 남이 출제한 문제 풀이에 빠져 정신까지 거세당한 환관마냥 뜻도 흥도 없이 동네방네 떠돌지만 정작 거리에서 들려오는 탄식의 소리는 듣지 못한다. 시민들의 한탄과 비탄이 그들에겐 통계 숫자로 환산할 수 있는 두뇌의 분비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통을 생산하는 사회적 문제의 뿌리를 찾아가는 큰 학자조차 무시하는 뻔뻔함으로 점잔을 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사회학이 아니라 철학이 배달의 기수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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