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특종女’는 없는가

2016.06.21 16:09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지난 1일, 언론중재위원회가 입주해 있는 한국프레스센터 앞에서 일군의 여성들이 시위를 벌였다. 성평등 관련 심의기준 마련을 촉구하는 이들이 준비한 펼침막의 문구는 “우리는 기자회견女인가”였다. 한두 번 지적되던 일이 아니었다. 남성이 뿌린 염산을 맞은 피해 여성도 남성에게 염산을 뿌렸다는(지어낸 이야기로 밝혀졌다) 여성도 똑같이 ‘염산녀’로 불리는 현실. 살해당해 트렁크에 담긴 여성은 죽어서까지 ‘트렁크녀’라는 오명을 얻고, 성추행의 가해자는 그냥 ‘의사’지만 피해자는 졸지에 ‘대장내시경녀’로 표현되는 현실.

피해자를 ‘대장내시경女’로 표현한 한 언론사의 트위터 계정

피해자를 ‘대장내시경女’로 표현한 한 언론사의 트위터 계정

강남 번화가의 무참한 살인사건에조차 ‘노래방 살인녀’라 이름을 붙인 언론도 있었다. 비난이 들끓었고, ‘가방녀’나 ‘만취녀’를 아무렇지 않게 헤드라인으로 뽑았던 주요 언론사들의 행태도 다시 거론되었다.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 언론사들도 있었다. 잠깐이었다. 지난 일주일, 다시 ‘고소녀’가 신문과 방송, 포털과 커뮤니티 게시판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가수 겸 연기자 박유천을 성폭행으로 고소한 여성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4차 고소녀’가 등장했다든지 ‘1차 고소녀’를 맞고소했다든지 하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女’라는 표현이 단순히 성별을 나타내는 표식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든지 안다. 성별이 강조되면서 가해-피해 관계가 희석되고, 사건의 본질도 맥락도 사라지면서 개인만 남고, 그나마 그(여성) 개인은 철저하게 대상화된다. ‘된장녀’를 중립적인 단어로 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젠더 호명의 역사를 연구한 주창윤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1920년대의 ‘모던걸’ 이후 지속되어온 우리나라의 여성 호명은 (‘변형된 남성성의 확장’이었던 남성 호명과는 달리) 여성성을 도덕적 타락과 관음의 대상이라는 특정 경계 안으로 위치지어 왔다.

언론이 부득부득 ‘○○女’에 목을 매는 이유는 뭘까? 언론계 사람들의 설명은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검색의 용이성이다.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단어 하나로 사건을 단순화함으로써 인기 검색어에도 오르고 검색도 용이해진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트래픽이다. 범죄사건도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만들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때문에 교과서적인 보도보다는 추리소설 같은 스토리텔링을 더 선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변명은 하나의 명제로 수렴된다.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대중영합적 기사를 쓰게 되고, 그 과정에서 젠더 감수성이 희생된다는 명제다. 결국 ‘4차 고소녀’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벌거벗은 여성 사진이나 “코피 터지는…”류의 제목 기사를 내거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고백이 된다.

그렇다고 선정적 제목과 사진을 탐닉하는 ‘대중’들이 문제라는 식으로 호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구매(클릭)하는 상품(기사)을 내다 파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은 무책임하다. 담배는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기호품이지만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에 큼지막한 경고문을 붙여둔다. ‘가방녀’와 ‘고소녀’는 ‘19금’ 표시도 없이 포르노를 홈페이지 대문에 전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도 클릭수만 많으면 되는가?

단순한 명명 방식으로 치부할 일도, 기발한 표현이라 자랑할 일도 아니다. ‘이름짓기’는 이데올로기의 출발선이다. 뉴스 보도의 비판적 담화분석으로 잘 알려진 반다이크 교수는 뉴스가 특정 집단에 특정 이름을 붙임으로써 경계와 관계를 규정짓고, 이 반복적 사용은 차별의 담론적 기반이 된다고 지적한다. ‘배우(actor·보통 남자 배우를 지칭한다)’는 보통의 정상적인 사람이지만 거기에 철자를 몇 개 보탠 ‘여배우(actress)’는 예외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최근 기자 세계에서도 여성의 비율이 급격하게 늘었다. 아직 부장급 이상의 직급에서는 여성의 비율이 간지러운 수준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우리나라 기자 네 명 중 한 명꼴로 여성이라고 한다. 그 수가 늘어남에 따라 ‘여기자’라는 단어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언론은 연달아 특종을 하는 능력있는 기자를 ‘특종녀’라 부르지는 않는다. 정상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혹은 여성 후배기자가 ‘특종녀’나 ‘어뷰징녀’로 불리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면, ‘고소녀’도 좀 빼야 하지 않겠는가?

사족 하나. 엊그제 이탈리아의 젊은 정치인 비르지니아 라지가 새 로마 시장으로 당선됐다. 이 소식을 전하는 우리나라 국가 기간통신사는 기사 제목에 ‘신데렐라’라는 표현을 달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명이었던 여성이라는 이유로 라지 당선자를 “백마 탄 왕자님의 선택과 호의로 단숨에 부와 신분을 차지하는” 신데렐라에 비유하는 것이 과연 온당할까? 당연한 관습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개선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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