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낀 점’이 없는 나라

2019.05.31 20:52 입력 2019.05.31 20:55 수정
권수영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교수·상담학

시대를 관통하는 단골 방학숙제가 있다. 독후감(讀後感). 한자어로 ‘책을 읽은 후 느낌’이란 뜻이다. 요즘 초등학생 독서기록카드를 봐도 책 제목, 지은이 옆에 어김없이 ‘느낀 점’을 기입하도록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느낀 점’ 숙제는 우리의 진짜 감성을 영 무디게 만들었다.

[사유와 성찰]‘느낀 점’이 없는 나라

어린 시절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읽고 난 후 느낀 점은 무엇이었나? 꾸준히 노력하는 이가 승리한다. 교만하여 나태하지 말자. 이 정도 쓰면 제대로 쓴 ‘느낀 점’으로 평가받는다. 혹시 당신의 아이가 다음과 같이 독후감을 썼다면 어떨까. “거북이가 느림보라고 놀림받은 건 속상했겠다. 하지만 패배한 토끼는 억울하고 창피해 거북이를 더 미워했을 것 같다.” 이 아이는 분명 독후감 숙제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장난처럼 썼다고 핀잔을 들을 가능성이 높다. 무슨 그런 ‘느낀 점’이 있냐고 하겠지만, 실은 이게 진짜 ‘느낀 점’이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는 ‘느낀 점’을 생각할 점이나 교훈과 혼용해서 써왔다. 결국 한국 사회에서 진정 ‘느낀 점’은 영 실종되고 말았다.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진짜 ‘느낀 점’을 묻는 이들은 없다. 외롭다거나 부끄럽다고 가슴속 ‘느낀 점’을 얘기하면 하찮은 사람으로 취급받을까봐 꽁꽁 숨겨야 한다. ‘느낀 점’을 말하면 바보처럼 보일까봐 센 척도 한다. 내 생각만 강조하다보니 상대방 마음속 느낀 점은 당연히 느낄 수 없다. 주위 사람을 둘러보면 때로는 무기력한 환자처럼, 때로는 강경한 투사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마음속 ‘느낀 점’은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내가 느끼기엔 낯 뜨겁게 부끄러운 희한한 법이 하나 있다. 2015년 7월에 시행된, 인성교육을 의무로 규정한 세계 최초의 법이라고 알려진 ‘인성교육진흥법’이 그것이다. 전국의 초·중·고교는 매년 초 인성교육 계획을 교육감에게 보고하고, 인성에 바탕을 둔 교육과정을 운영하도록 법으로 정했다. 법안에서는 인성교육을 ‘인간다운 성품과 역량을 기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인간다운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 아닌가. 굳이 세계 최초로 인성교육을 법적으로 부과한 배경을 알면 마음이 씁쓸하다. 인간다운 성품과 역량을 기르는 것이 일반 학교교육만으로는 안되겠다는 것 아닌가.

대체 인성교육은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서양철학에서의 윤리학 강의? 아니면 동양고전에서 선비의 고귀한 성품에 대한 가르침? 바르게 살라는 지침이 부족해서 아이들의 인성이 바닥으로 떨어진 걸까? 감성은 무시한 채, 생각만 앞세우고 이성만 강조하는 반쪽짜리 교육이 결국 법적으로 인성교육을 부과해야만 하는 나라로 만들지 않았을까? 무시무시한 댓글을 써놓고도 그 글을 읽는 상대방의 가슴이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다. 친구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 앞으로 40대를 더 맞아야 한다고 겁박하면 친구가 얼마나 두려워 떨지 도무지 느낄 수가 없다. 나중에 물으면, 그저 장난이었다고 할 뿐, ‘느낀 점’이 없다.

이게 어디 아이들만의 문제이겠는가?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은 도무지 ‘느낀 점’이 없다. 막말 잔치를 벌이면서, 상대방의 허를 찌를 구실을 찾느라 골몰한다. 상대방의 가슴의 상처는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다. 국회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을 보는 국민들의 허탈한 마음과 상처를 느끼고 사과하는 의원은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다. 그나마 국회의장이 남긴 국민 앞에 부끄럽다는 소회가 그나마 빵점은 면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최근 대통령이 5·18 망언에 대해 부끄럽다며 ‘느낀 점’을 피력하고 광주시민들에게 사과했다. ‘독재자의 후예’ 발언으로 방점이 옮겨간 것이 못내 아쉽다. 2005년 서울시는 광주민주화운동 25주년 관련 홍보탑에 ‘경축’이라는 문구를 넣어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당시 행사위원회는 추모와 기념의 수준을 넘어서 한국 민주주의를 앞당긴 역사여서 ‘경축’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논란이 증폭되자 행사위원회는 “신군부의 총칼에 산화하신 수많은 영령들을 생각할 때” 결코 경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입장을 바꿨다. 영령들을 머리로 생각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광주시민들의 한(恨)과 ‘느낀 점’을 가슴으로 느껴야 했다. 진정한 추모는 ‘느낀 점’을 회복하는 일이다.

정치인의 민생행보도 구태의연한 지지층 결집 행사로 변질되지 않으려면 국민들의 진짜 ‘느낀 점’을 구체적으로 느끼는 일부터 배워야 한다. 카메라 기자 앞에서 시장 음식 먹는 장면은 이제 지겹다 못해 무감각하다. 어쩌면 국민 모두에게 ‘감성교육진흥법’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이참에 국민발의 제도라도 발동해 세계 최초로 ‘국회의원 감성교육진흥법’이라도 만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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