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부조

2020.03.05 20:56 입력 2020.03.05 20:57 수정

대구에 사는 외가 쪽 친척 한 분이 돌아가셨다. 잔잔한 미소와 사투리가 섞인 다정한 음성이 지금도 느껴지는 것만 같은데 엄마가 돌아가신 후로는 왕래도 소식도 잘 나누질 못했다. 코로나19 사태가 일어난 후 안부 전화를 드렸다가 뜻밖의 부고를 접하게 된 것이다. 코로나19 때문은 아니셨다. 상주는 코로나19로 더 정신이 없어 장례를 치른 후에라도 연락한다는 것이 하지 못했다며 미안해했다. 그러면서 그는 마스크를 구하러 나가던 참이라고 했다. 바빠하는 그에게 계좌번호를 문자로 보내주면 좋겠다고 하고선 나 역시 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곳의 경황없음과 고통이 그대로 전해졌다.

[편집국에서]고통의 부조

코로나19로 상황이 심각해지지 않았다면 안부 인사는 더 늦어졌을지 모른다. 부고도 더 한참 후에나 알게 됐을 것이다. 다정했던 친척분의 부재의 슬픔을 느끼면서 고통의 시간에, 그동안 가려져 있던 고통들이 마치 부조물처럼 더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19 사태가 벌어진 후 안타까운 사연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중 마음 한구석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은 20여년간 청도대남병원 폐쇄병동에서 생활하다 상태 악화로 외부 전문의료기관으로 이송되면서 했다는 한 환자의 말이다. “오랜만에 나오니 좋네요. 나아서 돌아올게요.” 그는 나들이 나선 사람처럼 신선한 바깥 공기를 들이마셨을 것이고 비록 감염병에 걸린 몸이었지만 잠시나마 강렬한 삶의 생명력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대남병원의 비정상적인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가 커지면서 그들이 생활해온 열악한 환경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영양과 면역상태가 좋지 않았던 그들은 환자 인식표도 없이, 침상이 없는 다인실 온돌방에서 지냈으며 비좁은 탓에 보행이 적어 근육량도 많지 않았다. 밀폐된 창으로 환기도 쉽지 않아 호흡기 질환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지난 3일 국가인권위원회는 대남병원 폐쇄병동과 밀알사랑의집에서 발생한 코로나19 집단감염과 관련한 실태조사를 마치고 성명을 내놓았다. 인권위는 “인권 취약계층인 장애인 등의 피해가 큰 것에 대해 깊은 슬픔과 우려를 표한다”고 했다.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는 대로 정신병원 및 장애인 거주시설을 대상으로 방문조사와 실태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코로나19는 희미했던 취약층의 존재와 그들의 고통을 다양한 시간과 공간에서 드러나게 하고 있다. 움직임이 불편한 노약자는 정부에서 싸게 공급하는 마스크를 사기 위해 4~5시간 길게 줄을 설 수 없다. 생계에 쫓겨 시간을 낼 수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쇼핑을 할 줄 모르거나 장당 3000~5000원에 이르는 고기능 마스크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마스크 대란’에서 처음부터 열외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권장되고 있지만 당장 생존에 위협을 받는 약자들에겐 ‘사회적 고립’일 수밖에 없다.

어린이집과 유치원 휴원이 장기화하고 초·중·고등학교 개학이 연기되면서 돌봄공백도 비상이 걸렸다. 공기관이나 대기업 종사자들은 돌봄휴가제 등 시스템 보호 아래 놓이지만 영세기업 종사자나 자영업자, 일용직 등은 제도 밖에 있다. 개학이 연기되면서 각 학교에서 배포하는 과제들에서 소외되는 학생은 혹시 없을까. 영화 보기, 음악 듣기를 끝낸 후 감상평을 제출해야 하지만 여건이 안되는 학생이 있을 수도 있다. 집집마다 컴퓨터가 있고 스마트폰 보급률이 높다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그 대열에서마저도 빠지는 소수자가 된다면 그 어려움과 고통은 더욱 깊을 것이다.

지금은 끝이 보이지 않지만 코로나19 사태는 언젠가는 종식되고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 백신 개발만큼이나 해결해야 할 숙제도 남겨 놓을 것이다. 폐쇄병동의 환자나 복지시설에 격리돼 있는 장애인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다 같이 지켜봐야 하고 사회적 목소리를 내야 한다. 안타까운 희생들을 불러온 코로나19가 돋을새김한 우리 사회 ‘고통의 부조(浮彫)’들을 일상의 회복 아래 다시 매끈하게 잠재울 수는 없는 일이다.

작가 정세랑이 어느 소설집 후기에 써놓은 말이 떠오른다. “세계는 더디게 더 많은 존재들을 존엄과 존중의 테두리 안에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고 믿는다. 너무 늦지만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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