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랑이 나타났다

2021.01.29 03:00 입력 2021.01.29 03:03 수정

이른 아침 가난한 여인이
굶어 죽은 자식의 시체를 안고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를 울며 지나간다
마녀가 나타났다

부자들이 좋은 빵을 전부 사버린 걸
알게 된 사람들이 막대기와
갈퀴를 들고 성문을 두드린다
폭도가 나타났다

배고픈 사람들은 들판의 콩을
주워 다 먹어 치우고
부자들의 곡물 창고를 습격했다
늑대가 나타났다

일하고 걱정하고 노동하고 슬피 울며
마음 깊이 웃지 못하는
예의 바른 사람들이 뛰기 시작했다
이단이 나타났다

요즘 한창 녹음 중인 3집 앨범의 타이틀 곡 ‘늑대가 나타났다’의 가사 일부이다. 2016년, 2집 앨범 <신의 놀이>를 발매하고 나서 나는 종종 이런 연락을 받았다. “이랑님, 이번 토요일 ○○집회에서 행진할 때 ‘신의 놀이’ 곡을 틀어도 될까요?”

이랑 뮤지션·작가

이랑 뮤지션·작가

강남역 살인사건이 있던 해였고, 기억나는 여성 집회가 유난히 많은 2016년이었다. 몇몇 집회에는 직접 가서 공연을 했고 행진 때 노래를 틀기도 하면서 내 노래의 아쉬운 점을 발견했다. ‘따라 부르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2집은 반복되는 가사가 없도록 특히 신경 써서 만들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나도 가사집을 보고 불러야 틀리지 않는다. 원작자도 이러니 듣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행진곡으로 사용 요청을 받을 때마다 죄송한 기분이 들었다.

행진하면서 힘차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가능하면 후렴이라도 힘차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그런 곡. 그렇게 2019년 초 ‘늑대가 나타났다’ 곡의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 실비아 페데리치의 <캘리번과 마녀> 책을 읽던 중이라 중세 유럽 사회 운동 이야기에 등장하는 ‘빵, 포도주, 마녀, 성문’ 같은 단어들을 가사로 쓰고 싶었다. 평소 밥보다 빵을 더 자주 먹기도 하거니와 굳이 이 단어들에 K패치를 적용해 국밥이나 막걸리로 바꿔보고 싶은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곡을 쓰고 보니 여전히 반복되지 않는 가사가 많았다. 매 단락 끝에 ‘○○가 나타났다’하는 부분만 그나마 따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네 문장이나 따라 부를 수 있다니…. 예전 곡들에 비하면 엄청난 성장이었다. ‘마녀, 폭도, 늑대, 이단이 나타났다!’하고 외치며 행진하는 사람들을 상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땅한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사회가 마녀, 폭도, 늑대, 이단 취급할 때, “그래, 너희가 그렇게 무서워하는 우리가 나타났다!”고 외치면 되레 가슴이 시원할 것 같았다. 이제 제목이 고민이었다. 마녀, 폭도, 늑대, 이단 중 무엇이 나타나도 좋지만 이 중에 가장 제목 같은 게 뭘까. 혼자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 SNS 투표 기능을 이용해 봤다. 짧은 합주 영상을 올린 뒤 “이 신곡의 제목은 무엇일까요?”하고 네 가지 보기를 만들어 올렸다.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마녀가 나타났다 48%, 이단이 나타났다 23%, 늑대가 나타났다 20%, 폭도가 나타났다 9%.’

투표 결과를 연 2019년에 ‘마녀가 나타났다’라는 곡을 바로 발표하면 좋았겠지만, 곡을 녹음하고 믹싱하고 앨범으로 만들어 발표하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2019년, 2020년이 성과 없이 빠르게 지나갔다. 전염병 시대에 좁은 합주실에 함께 모이기 어려워, 밴드 멤버들과는 가끔 온라인으로 얼굴을 보며 안부를 나누었다. 이러다 몇 년이 더 지나면 ‘마녀’라는 단어의 의미가 다르게 변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가지 이미지를 모두 포함하면서도 우화적인 ‘늑대’가 이 모든 시기를 지나고도 곡 제목으로서 생명력이 길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투표 결과의 1위인 마녀와 3위인 늑대 사이에서 꽤 오랜 시간 고민을 하다 결국 우화의 힘을 빌려 늑대를 선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나저나 폭도는 왜 4위를 한 걸까.

대면 공연이 가능했던 2019년에 이 곡을 한두 번 무대에서 부른 적이 있다. 그중 재미있었던 반응은 곡의 정확한 가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이단이 나타났다’를 ‘이랑이 나타났다’라고 듣는 거였다. 사람들이 ‘이랑이 나타났다’라고 가사를 바꿔 따라 부르는 걸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마녀, 폭도, 늑대와 함께 이단이 아니라 이랑이 나타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 착오는 마음속으로만 품기로 했다.

우리는 언제 다시 행진할 수 있을까. 곡은 이제서야 완성을 향해가고 있지만 전염병 시대에 행진곡을 발표하다니 왠지 쓸모없는 일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의 발 구르는 소리, 손바닥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기억에서 멀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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