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비극 쉬쉬해온 ‘곤흘동’
70년 지나 오늘에서야 말문 꺼내
누구나 슬픔을 애써 지우고 외면
넘어진 이들이 딛고 일어서도록
귀 기울여 들어주고 손 내밀어야
제주도의 베리오름(별도봉)에 왕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오늘 비바람에 후드득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벚꽃은 향기가 없는 줄 알았는데 왕벚꽃은 향기가 진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땅끝마을 해남에서 30년을 살다가 바다 건너 제주섬에 들어온 지 두 달 가까이 되었습니다. 새롭게 정착한 곳이 공교롭게도 해남에서 농사지은 쌀을 실은 배가 닻을 내리던 화북(禾北)입니다. 화북천을 사이하고 절과 베리오름이 서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벚꽃 필 무렵부터 매일 향기를 따라 화북천의 개울을 건너갑니다. 개울가에 노란 유채꽃들과 보랏빛 무꽃들도 피어 있습니다. 봄꽃길 따라 이끌리듯 베리오름을 휘돌아 가면 잃어버린 마을 곤흘동이 나옵니다. 집도 사람도 없는 돌담장과 아이들 웃음소리도 없는 올레길들 사이에 제비꽃, 광대나물, 방가지똥 꽃들만이 반깁니다. 돌담길 사이를 도량석 하듯 반야심경을 읊조리며 한 발 한 발 걷습니다.
곤흘동은 1949년 1월5일과 6일, 이틀 동안 불에 타 사라진 마을입니다. 안곤흘 22채, 샛곤흘 17채, 밧곤흘 28채가 군경에 의해 불태워지고, 30여명의 청년들은 영문도 모른 채 바닷가에 끌려가 총살당했습니다.
“전혀 죄 없는 사람들을 다 죽여놨지, 자기 이름도 못 쓰는 사람들을 다 죽였어. 군인들이 와서 집에 있는 사람들을 잡아놓고 물가에 세워놓고 죽였주. 죽인 날부터 불붙이기 시작헌 거라. 석유병을 집 안 기둥에 항상 걸어놨었어. 보릿대에 불을 붙여 집을 태웠어. 돼지도 다 불타서 죽고, 소도 불타서 죽고, 초가집이니까 쉽게 불이 붙었주. 시뻘겋게 집 하나도 없이. 하늘이 시뻘겋게 됐었지. 그러니까 그곳에 사람이 없어져버린 거라.”(안명호, ‘토벌대 학살 증언’, 43archives.or.kr)
1947년부터 7년7개월 동안 제주도에서 곤흘동처럼 잃어버린 마을만 100여곳, 전소된 가옥도 3만여채나 된다고 합니다. 희생자는 1만4000여명, 희생자 10명 중 2명은 방어 능력이 없는 아이들이었다는 사실을 70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만납니다. 사람 사는 곳에는 행복한 이야기와 슬픈 이야기들이 삶과 죽음처럼 존재합니다. 그중에 슬픈 이야기들을 들어주고 따뜻하게 감싸 안아준다면 또 다른 아름다운 이야기로 채워질 것입니다.
세월호가 침몰한 다음날부터 진도 팽목항에서 미수습자 가족들을 위한 구호활동을 할 때의 일입니다. 1주년이 다가올 즈음에 가족들이 절까지 찾아왔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배 안에 있어요, 그런데 특별법에는 세월호 인양이 없대요.” 슬픔을 건져내는 일은 인양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며 다시 팽목항으로 향했습니다. 그 바다에는 명량해전으로 죽은 백성들, 소안도 항일운동 희생자들, 청산도에서 침몰한 미황사진법군고단들, 갈매기섬에서 학살된 보도연맹사건 희생자들의 이야기까지 담겨 있었습니다.
정유재란이 끝난 직후 미황사에서는 높이 12m의 괘불(대형불화)을 제작하였습니다. 한날한시 육지에서 죽은 수많은 원혼들을 달래고, 남아 있는 이들의 슬픔을 위로하는 수륙천도재를 매년 지냈습니다. 옛사람들은 슬픔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방법을 종교적이고 문화적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슬픔은 DNA처럼 그 사회에 유전됩니다. 그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치유하는 정신적 성숙으로 이끌어내야 행복한 사회가 됩니다.
누구나 슬픔을 애써 지우고 외면하려 합니다. 다시 그런 부정된 아픔이 찾아오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바닷가 마을 사람들은 배 타는 것만으로도 위험요소가 많기에 모든 일에 조심스러워합니다. 더군다나 제주4·3의 슬픔은 쉬쉬하고 말문과 마음의 문을 오랫동안 닫아온 일입니다. 제주에서의 4·3은 이제 시작입니다. 70년 간 속울음으로 삼키던 이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귀 기울여 들어주고 따뜻한 손 내밀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