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서열은 돈의 서열이다

2021.09.02 03:00 입력 2021.09.02 03:02 수정

[이범의 불편한 진실] 대학 서열은 돈의 서열이다

‘사교육 걱정없는 세상’에서 개최한 대입 토론회에 초청된 적이 있다. 내 앞의 발제자는 수능 폐지를 주장했다. 수능 점수 1, 2점 차이로 학생을 변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뭔가 정곡을 벗어난 이야기였다. 경쟁은 수능시험 때문이 아니라 대학서열 때문에 생기기 때문이다. 나는 발제를 시작하면서 도발적으로 물었다. “서울대와 연·고대 중 어디가 더 좋은 대학인가요?” 좌중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대학 서열을 노골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금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서울대가 더 좋은 대학입니다.”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왜일까? 서울대가 1년에 학생 1인당 투입하는 교육비는 무려 4800만원대다. 연세대·고려대는 평균 2700만원대다. 서성한(서강대·성균관대·한양대) 평균 2300만원대, 중경외시(중앙대·경희대·한국외대·서울시립대) 평균 1500만원대, 4년제 대학 최저는 800만원대다. 대학서열은 곧 ‘돈의 격차’인 것이다.

‘학벌 때문에 대학 서열이 생긴다’는 말은 틀렸다. 1980년대 생긴 포항공대와 1990년대 생긴 한국예술종합학교가 결정적인 반례다. 신생 대학이어서 학벌이 없는데도 바로 최상위권에 올랐다. 왜? 넉넉한 재정을 기반으로 우수한 교육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성균관대가 1990년대 후반 이후 삼성그룹의 지원으로 위상이 높아져 ‘서성한’이라는 표현을 낳은 것도, 최근의 GIST·DGIST·UNIST(광주·대구경북·울산과기원), 곧 개교할 한전공대도 비슷한 사례다. 대학서열이란 재정 격차로 인한 ‘교육의 질’의 서열인 것이다.

학벌은 대학서열을 강화하는 피드백 효과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결코 대학서열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결과’다. 재정→교육의 질→서열→학벌이라는 인과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니 이상한 해법이 난무한다. 대입경쟁의 원인을 ‘그릇된 학벌의식’이나 ‘학부모의 욕망’으로 여기고 계몽주의에 빠지거나, 심지어 ‘능력주의’에 원죄를 묻기도 한다. 지역 거점 국립대의 1인당 교육비가 서울대의 3분의 1에 불과한데도 이들을 서울대와 통합하면 위상이 서울대급으로 올라간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학생 1인당 교육비 통계에도 약점이 있다. 이공계·의약계 비중이 큰 대학일수록 이 수치가 큰 경향이 있다. 또한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합쳐 계산한 수치이고, 대학원 교육비에는 실질적으로 연구비가 중복 계산된다. 즉 학생 1인당 교육비가 ‘학부 교육’ 여건을 정확히 반영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OECD 통계도 동일한 방식이고, 이 순위가 ‘설연고 서성한 중경외시…’라고 읊는 서열과 거의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이 교수 대 학생 비율, 실험·실습비 등 핵심적인 교육 여건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한국 대학에는 또 하나 놀라운 특징이 있다. OECD 평균 고등학생 1인당 교육비의 1.5배를 대학생에 쓰는데, 한국은 겨우 0.8배만 쓰는 것이다. 서울대의 교수 대 학생 비율이 OECD 전체 평균치에 불과하다(1 대 15). 즉 한국은 대학 간 격차가 극심함과 동시에 평균적인 대학 교육의 질은 낮은 것이다. 대학에 대한 국고 지원이 선진국 대비 매우 적기 때문이다.

대구에 강연하러 가면 ‘옛날에는 경북대가 연·고대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왜 이러냐’며 분개하는 분들을 보게 된다. 그러면 나는 카이스트나 포항공대처럼 투자하면 지방에 있어도 명문대가 된다고, 그런데 현재 경북대 학생 1인당 투자되는 돈은 중경외시 수준이라고 답한다. 얼마 전 한 대선 후보가 ‘지역 거점 국립대의 학생 1인당 교육비를 연·고대 수준으로 높이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계산해 보면 소요 예산이 1조원을 훌쩍 넘어간다. 여태까지 거점 국립대를 육성하겠다면서 겨우 수십억~수백억원을 나눠준 것은 체면치레에 불과했던 셈이다.

‘재정을 늘려달라’는 대학 측의 요구와 ‘대입 경쟁을 줄여달라’는 일반 시민의 요구를 결합하면 ‘학부 교육 여건의 상향 평준화’라는 방향이 도출된다. 최근 각 대선 캠프를 살펴보니 주류 담론은 ‘균형발전을 위해 비수도권 대학을 키우자’는 것이다. 대체로 동의하지만, ‘수도권 아이들은 입시지옥에 시달려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편향이 엿보인다. 좀 더 포괄적인 관점에서 ‘균형발전’과 ‘경쟁완화’의 교집합을 넓혀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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