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선언에 외교력을 낭비할 때가 아니다

2021.12.17 03:00 입력 2021.12.17 03:03 수정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있다는 설은 있으나 봤다는 사람이 없는 게 도깨비불이라더니 지금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종전선언이 그 상황이다. 정부는 종전선언이 마치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이며 시대적 소명인 듯 당위성을 내세우면서 이 문제에 대해 미국과도 거의 합의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거의 다 됐다는 그 합의가 당초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던 종전선언인지, 달라진 형태인지, 조건이 붙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정부는 남·북·미·중이 모두 종전선언을 지지한다면서도 ‘북한이 호응할지는 또 다른 문제’라는 이상한 말을 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종전선언이 한반도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는 주장과 역사에 대한 몰이해와 정치적 계산으로 종전선언에 반대한다는 비난이 오간다. 국민들은 뭐가 뭔지 모를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길은 북핵 문제를 풀고 상호신뢰를 통해 전쟁 방지 메커니즘에 합의하고 북·미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다. 평화체제 수립이다. 종전선언은 평화체제의 일부다. 그것도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라 부속 요소이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종전선언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세리머니’에 불과하다. 종전선언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본질도 아니고 목표가 될 수도 없으며 반드시 필요한 절차도 아니다.

평화협정이 너무 어려우니 종전선언부터 먼저 시작해 일을 풀어보자는 게 종전선언 제안의 발단이다. 하지만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종전선언을 평화협정보다 먼저 해버리면 문제가 발생한다. 이 때문에 종전선언을 먼저 하려면 그런 문제들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를 해놔야 한다. 그것이 ‘구속력이 없는 상징적 종전선언’이다. 그런데 이 같은 문제 차단 장치를 해놓은 종전선언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그런 종전선언을 왜 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종전선언은 평화협정과 같이 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 결국 한 바퀴 돌아서 제자리로 오고 나면 당장 평화협정은 어려우니 종전선언을 마중물로 삼자는 주장이 다시 나온다. 한국 사회는 이처럼 말장난 같은 순환오류에 갇혀 15년째 소모적 논란을 되풀이하고 있다.

분리가 불가능한 평화협정과 종전선언을 따로 떼어낸 것이 문제의 시작이다. 정부는 북한·미국·중국이 모두 종전선언을 지지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들이 지지하는 것은 종전선언이 아니라 ‘종전선언이 포함된 평화협정’이다.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원칙적 입장일 뿐이다. 미국은 2006년 노무현 정부가 종전선언을 처음 제안했을 때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동일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 입장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 14일 종전선언 관련 논평 요청에 “한반도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것은 한반도 문제 해결에 중요한 요소이며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기대”라고 했다. ‘평화협정은 모두가 원하는 것’이라는 원론적 언급이다.

북한은 처음부터 종전선언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북한이 지금 종전선언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적대시정책 철회는 미국의 위협과 제재 철회를 말한다. 사실상 평화협정 체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이 북한 문제 해결의 진전을 원한다면 종전선언이 아니라 북한이 관심을 갖는 문제들을 다루는 대담한 협상을 하도록 미국을 설득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만약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한·미가 종전선언에 합의한다면 그것은 문재인 정부의 당초 구상인 ‘종전선언 입구론’이 아닐 것이다. 종전선언을 먼저 하고 대화 분위기를 조성한 뒤 평화협정을 논의하는 방식을 채택한다는 것이 아니라, ‘평화협정의 한 요소로서 종전선언’에 의견 일치를 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미국이 “한국과의 종전선언 논의에 만족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은 한·미 합의가 원칙적 수준에 머물 것임을 시사한다. 정부가 ‘북한이 호응할지는 알 수 없다’고 이미 자락을 깔아놓은 것도 결국 호랑이가 아니라 고양이 그림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가 종전선언에 매달리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한국은 지금 종전선언에 외교자원을 쏟아부을 여력이 없다. 미·중 패권경쟁으로 한국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외교의 영역이 경제안보와 과학기술, 기후변화, 보건 등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면서 국제질서와 외교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는 중대한 전환기다. 국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종전선언에서 손을 떼고 밀려오는 파도에 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