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인문학의 행복한 만남

2022.02.17 03:00 입력 2022.02.17 03:02 수정

요 며칠 제게 작은 일거리가 하나 더해졌습니다. 지난 1월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한 예술가의 전시를 인문학으로 풀어내는 학술대회를 준비하는 겁니다. 옛 문양과 문자의 기원에 대한 화가 김혜련의 예술적 탐사 작업에서 서구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넘어 새롭고 독자적인 인문학 담론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학술대회입니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대회를 제안한 선생님은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시각예술을 강의해온 미술사학자이자 전시기획자입니다. 그는 당초 인문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금융업계에서 일하며 금융자문회사를 운영하기도 한 금융인이었습니다. 이후 미술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며 미술품 컬렉팅 겸 전시기획 회사를 설립했다가 급기야 미술사학 박사과정까지 마쳤지요. 그가 대학원 재학 당시 공동체를 찾은 것도 뒤늦게 인문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학위를 받은 뒤 대학원에서 강의하면서도 공동체의 인문학 세미나에 꾸준히 참여했습니다.

‘그림을 쓰다: 훈민정음’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김혜련의 전시도 그가 기획한 것이었습니다. 김혜련은 이른바 성공한 화가입니다. 독일과 프랑스의 주요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루이뷔통 재단을 비롯한 국내외 주요 기관에도 작품이 소장된 작가입니다. 독특한 화풍의 유화로 주목받던 그가 대략 10여년 전부터 캔버스를 자르거나 꿰매고 해체하는 등 기존 회화의 틀을 탈피하는 시도를 하더니 몇 년 전부터는 여기에서 더 나아갔습니다.

잘 팔리던 그림 대신 고대 문양과 문자를 조사 연구하며 낯설고 기괴한 먹 작업을 이어간 겁니다. 옛 문양과 훈민정음의 문자에 영감을 받아 제작한 이번 전시작품도 생경하고 불편한 그림들이었습니다. 전시를 시작한 당일에는 한국거래소 노조가 나서 작품의 철거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내걸 정도였습니다.

그가 이 낯설고 인기 없는 작품의 전시를 기획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에 따르면 전시는 그가 공동체에서 몇 년간 진행해온 세미나의 연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김혜련 작업의 함의가 세미나를 통해 근대 이후 서구의 인간중심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적 반성, 그리고 21세기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 등을 만나며 갑자기 확 다가들었다는 겁니다. 이 전시를 계기로 그는 철학자가 쓴 고고인류학 논문, 주술적 문양에 대한 종교학자의 연구, 한자의 상형적 사유에 대한 동양 철학자의 글, 주역 연구자의 주역에 입각한 한글 해석 등등을 참고하며 작품의 의미를 다양하게 추적합니다.

여기서 나아가 학술대회까지 제안한 것은 여러 분야에서 진행되던 기존의 연구를 심화하고 융합해 새로운 사유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김혜련의 작품에서 읽어내는 것의 핵심은 역근대화(逆近代化)입니다. 역근대화는 서구 근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강박이 느슨해지면서, 그동안 억압되었던 지역 고유의 사유를 재발견하고 서구 근대와 비서구 지역의 전통 사유가 동등해지는 과정입니다. 탈근대가 지역성을 강조하면서도 서구에 지역성을 끼워 맞추는 것으로 서구 우위가 여전했다면, 역근대는 서구와 비서구가 동등하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한국 인문학계가 이 시대 위기의 해소에 나름의 발언권을 가지면서 독자적인 담론을 내놓아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된 것도 이런 상황 때문입니다. 이 대회에 이어 해외의 유명학자와 함께하는 국제학술대회까지 계획하는 것도 우리의 사유를 대외에 알리려는 시도지요.

인문학과 예술은 진리를 위한 동반자입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횔덜린의 시를 만나며 정교해졌고 푸코의 사유는 르네 마그리트와 벨라스케스의 예술을 만나며 풍성해졌습니다. 금융인에서 뒤늦게 인문학으로 길을 바꾼 학자는 김혜련이라는 걸출한 예술가를 만나며 새로운 사유의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여기에서 비롯된 학자들의 대화에서는 근대화가 초래한 각종 위기 혹은 이슈에 대해 지금, 여기, 우리의 독자적인 담론과 해법을 마련할 수 있을까요? 공동체가 모처럼 시도하는 예술과 인문학의 만남이 부디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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