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나무가 아니라 지금 나무

2022.02.26 03:00 입력 2022.02.26 03:02 수정

스코틀랜드의 어딩스턴중학교에 다니는 로지 머레이는 5월5일에 열리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투표 참여 캠페인을 벌이느라 바쁘다. 투표일 기준으로 16세 생일이 지나 유권자가 되기 때문이다. 최근 로지는 첨단기술의 발전 속에서도 시각장애인에게 여전히 점자가 필요한 이유를 발표해 주목받은 적이 있다. 컴퓨터가 자동으로 스크린을 읽어주는 환경이 마련된다 해도 무언가를 직접 읽고 소통하는 경험은 좀 다르다는 것이 로지의 주장이었다. 점자를 만지면서 텍스트와 상호작용하는 그 순간을 사랑한다는 로지는 두 살 때부터 점자로 책읽기를 배운 시각장애인이다. 로지는 선거가 장애인이자 청소년인 자신의 목소리를 정치 현장에 전달할 중요하고 평등한 기회라고 생각한다. 로지와 친구들의 정치 활동은 지역 언론이 구체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정책에 대한 논의가 실종된 이번 대선이라지만 그중에서도 유난히 찾기 어려운 것이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공약과 발언이다. 우리나라에서 청소년 정책을 주관하는 부서는 여성가족부이다. 그런데 이 부서의 폐지를 공약으로 내건 후보가 있음에도 그 타당성은 정교하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 여성가족부 예산의 61.9%는 아동 보호와 양육, 가족 관련 정책에 쓰이며 18.5%는 위기 청소년을 비롯한 청소년 지원 예산으로 배정되어 있다. 이 부서가 폐지되면 직접 영향을 받는 당사자들은 대부분 투표권이 없다. 후보들은 득표에 유리하면 언급하고 밀린다고 판단하면 존재 자체를 언급하지 않는다. 어린이도, 청소년도, 여성도, 장애인도 스티커처럼 떼었다 붙였다 한다. 20대 대선처럼 소수자의 목소리가 철저하게 외면받은 선거를 본 적이 없다.

청소년은 정치와 정책의 변화를 원하는 오늘의 시민이다. 청소년기후행동의 오연재는 <우리는 청소년-시민입니다>에 실린 인터뷰에서 “여러분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미래를 책임질 분들입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청소년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 않은 존재”로 대한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스쿨미투를 알리기 위해 제네바의 유엔아동권리위원회를 방문했던 백경하는 불평등한 학교를 바꾸고 싶어서 정치에 관심을 가진 경우다. 그는 청소년이 정치를 말하면 “중간고사 기간인데도 투표하겠냐?” “똑똑한 청소년이면 투표권을 줘도 된다”는 말이 오간다고 토로한다. 청소년이 아닌 사람이 정치를 말할 때 이렇게 몰아붙이는 경우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어린이와 청소년 시민의 참정권은 이중적 차별 속에 놓여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겪는 현실 문제를 미래의 희망으로 감추고 유예하는 시간의 차별이 첫째다. 여기에 참여 영역을 제한하려는 차별이 있다. 청소년은 교칙 개정 운동을 하듯이 노동법의 개정을 요구할 수 있다. 아동과 청소년을 가장 먼저 위협하는 전쟁에 반대하는 것도 그들의 권리다. 온실 같은 발언대에 세워져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논의하고 강력한 정치적 선언을 작성할 수 있다. 청소년은 꿈나무가 아니며 지금 이곳의 나무다.

얼마 전 서울시 강동구가 발간한 ‘강동구민을 위한 친절한 노동법 안내서’의 명일동편에는 미성년 근로자가 알아야 할 노동법과 계약 요령이 상세히 담겨 있어 신선했다. 명일동은 강동구 내에서도 청소년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동화 <어스름 나라에서>를 보면 굴착 기계를 처음 다루게 된, 몸이 불편한 어린이가 백합줄기 아저씨에게 “내가 기계를 제대로 다룰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아저씨는 “괜찮아. 어스름 나라에서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라고 말하면서 아이의 도전을 독려한다. 우리는 어스름 나라의 국민이 아니지만 아픈 사람, 약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그들을 짓밟지 않는 정치를 원한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이 소중한 나라 안에 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