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카리아트, 불안한 인간

2022.04.12 03:00 입력 2022.04.12 03:04 수정

가장 흔하면서도 심각한 정신장애는 무엇일까? 1. 망상과 환청에 시달리는 조현병 2. 슬픔과 절망, 무기력에 괴로워하는 우울장애 3. 끊임없이 술을 찾는 알코올 사용 장애 4. 근심과 걱정에 전전긍긍하는 불안장애.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정답은 4번이다. 지난 수십 년간 우울장애가 많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불안장애의 아성에 미치지 못한다. 조현병은 시대에 따른 변화가 크지 않고, 알코올 사용 장애는 십여년 전부터 상당히 감소하고 있다. 불안장애야말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정신장애의 왕이다.

불안은 필수적 원시 감정이다. 단세포 생물도 불안을 느끼며, 그 고통을 기억한다. 아메바가 담긴 작은 접시에 전기 자극과 화학 자극을 주었다. 아메바는 강력한 회피 반응을 보였을 뿐 아니라, 상당 기간 불안을 ‘기억’했다. 생존과 번식에 불리한 상황에 대한 적극적 행동이다. 2019년 네이처에 실린 연구다. 불안은 즉각적 행동을 일으키는 신속성, 기억과 연합해 오래도록 유지되는 지속성을 가진다.

그러나 불안은 근시안적이다. 지금의 상황을 숙고하고, 미래를 사려 깊게 예측하는 반응이 아니다. 불안은 이성과 동행하지 못한다.

5년 넘게 비정규직 생활을 하는 중이다. 장점이 확실하다. 출퇴근 러시아워에서 해방되었고, 평일 대낮 마트가 얼마나 여유로운지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자유를 만끽하진 못했다. 연신 고개를 쳐드는 불안 때문이다. 끼니를 거르는 것도, 빈민굴에서 신음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불안은 우격다짐이다.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적극적 회피 본능을 일으킨다. 아니, 다시 분주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니? 비이성적인 소망이지만, 자유의 복리를 모조리 무효화할 정도로 강력하다.

2008년 폴 돌란 등의 연구에 의하면, 근무시간이 줄어들수록 우리는 더 큰 불안을 느낀다. 소득 감소 때문만이 아니다. 소속이 있을수록, 중요한 책임이 있을수록, 심지어 업무량이 많을수록 더 행복해한다. 사실 일벌레의 자발적 과로는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회사 사장이라면, 워커홀릭 직원의 불안을 ‘여러 가지 이유로’ 줄여주고 싶을 것이다.

프레카리아트. 프랑스 빵 이름처럼 들리지만, 불안정한 직업적 지위로 인해 고통받는 계층을 뜻하는 신조어다. 과거에는 노동 착취가 문제였다면, 지금은 노동 착취의 희소성이 문제다. ‘제발 내 노동을 착취해달라’는 바람이다.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을 강요당하지 않는다면, 아마 ‘나는 불필요하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기아와 질병에서 해방된 인류 최초의 시대. 프레카리아트에게도 생활복지와 의료보험이 적용되므로 행복하게 살아가야 마땅하다. 한번뿐인 인생을 맘껏 쓰면 될 것 아닌가? 그런데 주 20시간 근무하는 프레카리아트는 남은 60시간 동안 고시원에서 정규직이 되려고 바둥거린다. 운이 좋으면 주 80시간 착취를 강요당하는 엘리트가 될 수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모순의 원인이 바로 불안이다.

지난 대선, 모 정당이 주 4일 근로를 공약으로 올렸다. 그러나 그리 인상적인 반응은 없었다. 근로시간 단축은 다들 좋아한다지만, 정말 하릴없이 놀고 싶은 이는 없다. ‘마음속으로’ 누군가 과로를 강요해주기 원한다. 책임 있는 자리에서, 권한을 행사하며,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주 4일 근로를 주장하는 지지자들이 주 7일 내내 ‘과로하며’ 유세한 이유다.

비록 일부 국가, 일부 계층에 한정된 말이지만, 우리는 가혹한 노동에서 자유로워진 최초의 세대다. 그러나 종종 자유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앞으로 ‘고귀한 착취를 강요당하는 멋진 일자리’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넘치는 자유 속에 허우적거릴 것이고, 노동 시간의 빈자리는 근심과 걱정, 불안이 차지할 것이다. 인류가 한 번도 겪은 적이 없는 일이다. 해답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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