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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2022.05.13 03:00 입력 2022.05.13 03:01 수정

[김학균의 쓰고 달콤한 경제] 아름다운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 전쟁의 위협은 사라졌고, 절대 군주가 지배했던 세상이 가고 공화주의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국가 간 경제적 분업이 고도화됐고, 기술의 진보가 인류를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는 기대가 세상을 지배했다. 20세기 초의 유럽인들은 그렇게 믿었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보불 전쟁이 끝난 1871년부터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던 1914년까지의 시기는 ‘벨 에포크’라고 불렸다. 아름다운 시대라는 뜻이다. 낙관론이 흘러넘쳤다. 무엇보다도 전쟁의 공포가 사라졌다고 믿었다. ‘100년 전쟁’, ‘40년 전쟁’ 등 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유럽 땅에서 40여년 동안 전쟁이 없었다. 유럽인의 후예들이 개척했던 신대륙 아메리카에서도 1865년 남북전쟁을 끝으로 대규모 전쟁은 사라졌다. 그들에게는 사상 초유의 평화시대였다.

경제적으론 세계화가 빠르게 진전됐다. 19세기는 1차 세계화의 시기였는데, 유럽 제국주의 국가 주도의 세계화였다. 개별 국가의 자율성하에 진행된 수평적 세계화가 아니라 무력이 수반된 수직적 세계화였지만, 아무튼 경제적으로 단단한 분업구조가 만들어졌다. 기술적으로는 대발명의 시대였다. 벨 에포크 시대에 전기와 전화, 자동차, 비행기 등이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요즘 회자되는 ‘4차 산업혁명’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위대한 기술혁신이었다.

등이 따시면 정신적으로도 풍요로운 법. 르누아르와 마네, 모네, 세잔 등의 화가들이 대거 등장했고, 에밀 졸라와 모파상 등이 필명을 떨쳤다. 조각가 로뎅도 동시대인이다. 당시의 낙관론은 파리 에펠탑 건립으로 형상화됐고,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은 연대의 표시로 자유의 여신상을 제작해 미국에 선물했다.

30년 걸친 세계화 대장정은 미몽

물론 철저히 유럽인들의 시각에서만 벨 에포크였다. 유럽에서는 전쟁이 없었지만 멀리 극동의 한반도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무대가 됐다. 또한 그들의 풍요 역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적 착취라는 경제적 지원이 없었다면 현실화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서구인들의 꿈은 1차 세계대전으로 깨졌다. 결과적으로 40여년의 벨 에포크는 한때의 특수한 경험이었지만, 당대의 사람들은 이를 항구적 질서로 생각했다. 서구인들이 무지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사고의 범위는 경험칙에서 크게 벗어나기 어렵다.

40년이면 한 세대이다. 한 세대에 걸쳐 지속된 질서는 영속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벨 에포크가 짧은 ‘한때의 꿈’에 그쳤다는 평가는 사후적인 결과론일 따름이다.

사회주의 블록의 붕괴 이후 본격화된 지난 30여년의 2차 세계화를 생각해 본다. 크게 보면 우리 세대는 세계화의 세상을 살아왔다. 시장원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교리였고, 가장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곳에서 공장을 지었다. 세계화의 진전은 물가 상승을 구조적으로 억제하는 디스인플레이션을 낳았다. 싸게 만들 수 있었기에 물가가 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세계화가 진행됐던 30여년은 꽤 긴 기간이지만, 벨 에크포가 한때의 꿈에 그쳤던 것처럼 세상은 본질적으로 유동적이다. 요즘 우리는 세계화의 명백한 후퇴를 보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을 역임했던 앨런 그린스펀은 세계화의 지속 가능성을 오래전부터 의심했다. 그린스펀은 2006년 경기확장 국면에서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 현상과 연방준비제도가 정책금리를 인상시켰음에도 시장금리가 오르지 않는 현상을 수수께끼라고 이름 붙였다. 그린스펀은 이에 대한 답도 함께 내놓았는데, 중국이 중심이 된 세계화를 원인으로 들었다.

중국은 싸게 물건을 만들어 세계 시장에 공급했고, 경쟁력을 잃은 선진국 제조업 노동자들의 임금 교섭력은 현저히 약화됐다. 이래저래 인플레이션이 생기기 힘든 구조가 만들어졌다. 그린스펀은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에도 시장금리가 따라 올라가지 않는 이유도 중국의 과잉저축에서 찾았다. 일반적으로 개발도상국은 저축을 많이 한다. 사회보장이 미흡하기 때문에 저축의 필요성이 높고, 성장률이 높은 경제에서는 소비를 통해 경제적 자원을 써버리는 것보다는 투자의 재원이 되는 저축을 늘리는 것이 경제적으로 합리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린스펀은 중국의 과잉저축이 미국 국채시장에 유입되면서 시장금리 상승이 억제됐다고 봤다.

한국 같은 세계화 범생 난관 우려

그린스펀은 물가와 금리 상승을 막았던 두 가지 힘이 시간을 두고 약화될 것으로 보았다. 중국 노동자들이 언제까지나 낮은 임금으로 일하지는 않을 것이고, 중국의 사회 인프라가 성숙되고, 성장률이 둔화되면 과잉저축 또한 지속되기 어려울 것으로 봤다. 중국의 인건비 상승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타났고, 중국의 저축률 또한 하락하고 있다. 세계화의 동력은 이미 약해지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미·중 갈등이 세계화의 균열을 보여줬는데, 우크라이나 전쟁이 결정적인 파열구를 내버렸다. 세계화가 경제 의존도를 높여 국가 간 무력충돌을 억제할 것이라는 기대는 현실에서 힘을 잃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는 국제결제망에서 퇴출됐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보다 규모가 큰 러시아의 외환보유액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대부분이 달러일 외환보유액은 러시아 중앙은행의 금고가 아닌 미국 국채시장에 투자돼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중국도 편치 않을 것이다. 개방 이후 뼈빠지게 일해 축적해 온 3조달러 규모의 외환보유액이 자신들의 통제 밖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 러시아산 가스의 루블화 결제 요구, 중국으로 향하는 사우디아라비아산 원유의 위안화 결제 추진 등은 이런 위기감의 산물이다. 미국 하원은 러시아의 과두 재벌인 올리가르히의 재산을 압류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기 위한 재원으로 활용하는 법안을 논의하고 있다. 기본적인 소유권에 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세계화가 평등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극단의 효율을 경험하게 해주기는 했다. 세계화의 퇴조와 경제적 비효율은 동전의 양면이다. 일단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질 것이다. 경제 논리가 아닌 지정학의 논리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글로벌 밸류체인 재편은 한국과 같은 세계화 시대의 모범국가엔 어려운 선택을 강요할 것이다. 지난 30여년에 걸쳐 나타났던 세계화라는 대장정은 어쩌면 미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시절이 끝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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