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불평등 줄이는 비장의 도구

2022.06.06 03:00 입력 2022.06.06 03:05 수정

“임금체불 일본의 16배, 최저임금 폭주 탓”, “최저임금 과속 인상 뒤 체불 임금 日 14배”.

주말에 발행된 유력 일간지들의 사설 제목이다. 최저임금 결정 시즌에 본격 돌입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최저임금 부담 때문에 괴로워하는 자영업자, 일자리가 사라진 노동자들의 하소연이 잇따를 예정이다. ‘알바 자리 잘리면 어쩌나’라는 기사를 쉽게 만날 것이다. 이런 기사와 마주치면 일단 날짜부터 확인해보자. 작년, 재작년, 아니면 10년 전 이맘때 기사일 수도 있다. 평소에도 영세자영업자, 저임금 노동자의 사정에 이렇듯 관심을 보여주면 좋으련만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라 했는데, 한계 상황에 처한 이들끼리 서로 싸우게 만드는 것이 전 국민 스포츠경기가 되어버렸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사실 법적으로 임금 최저선을 정하는 것만이 저임금 노동자의 유일한 보호수단은 아니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높고 단체협약의 효력 범위가 넓다면, 굳이 법제화 없이도 단체협약을 통해 임금 최저선을 높이고 불평등을 줄일 수 있다. 국제적으로 노조 가입률이 1% 높아질 때마다 최저임금 노동자 발생률이 1.5% 줄어든다는 통계도 있다.

하지만 한국은 노조 조직률이 낮을 뿐 아니라, 기업별 노조 체계라 효력 범위도 제한적이라 자율적 규율은 기대하기 어렵다. 기본급 이외에 부가급여를 통해 임금을 보전할 수도 있지만, 이는 오히려 불평등을 더 강화하기 십상이다. 구내식당에서 저렴하게 질 좋은 점심 먹기, 복지포인트로 가전제품 구매하기, 단체보험으로 의료비 지원받기, 가족 경조사의 특별 상여금, 팀 회식비로 근사한 곳에서 식사하기 등등. 이 모든 것은 저임금과 불안정한 일자리 종사자들에게 그림의 떡이다. 이런 상황에서 법적 강제력을 가진 최저임금 제도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최저선을 보장하는 유력한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

최저임금제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는 임금을 늘린다는 것 이상의 사회적 의미가 있다. 20세기 초 여러 나라의 최저임금제 도입은 성별 임금격차를 줄이려는 노력의 일부였고,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지나간 후 세계 각국에서 최저임금제가 확대된 것은 근로빈곤층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1980년대 보수당 집권기에 최저임금제를 철폐했던 영국이 1999년 이를 재도입했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무엇보다 아동빈곤을 줄이는 것이었다.

최저 소득을 보장하고 빈곤 위험을 줄이는 것의 효과는 경제 부문을 넘어선다. 무엇보다 소득계층에 따른 건강불평등 완화에 도움이 된다. 그 효과 역시 노동자 당사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미국 50개 주의 최저임금 수준을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연방 기준보다 주의 최저임금이 1달러 높아질 때마다 저체중아 출생이 1~2% 감소하며 후기 신생아 사망률은 4%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건강불평등을 주제로 강의나 토론을 하면 단골 질문이 있다. 건강불평등을 줄이는 비결이 뭐냐는 것이다. “이것만 하면 건강불평등 싹 다 해결됩니다!” 나도 비법을 내놓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런 건 없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줄이고 안정된 생계를 보장하기 위한 정책들, ‘건강’이라는 이름은 붙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건강불평등 완화 정책이다. 최저임금제도는 일을 하고 있는 동안은 물론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 즉 실업급여나 (도입 예정인) 상병수당을 받아야 할 때에도 소득의 기준점이 된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그럼 영세자영업자의 부담은 어떻게 하냐고? 정권이 바뀌자마자 비어있다던 나라 곳간이 갑자기 풍족해지는 기적도 본 마당에 무슨 걱정인가. 임대료, 프랜차이즈·배달·신용카드 수수료, 원청기업의 부담 떠넘기기 같은 진정한 빌런들이 있지 않나. ‘을’과 ‘을’의 초라한 싸움판은 이제 접고, 진짜 ‘선수’들을 경기장에 데리고 나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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