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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포자를 무시하지 마라

2022.07.11 03:00 입력 2022.07.11 03:03 수정

수학을 잘하는 이들을 존경한다. 허준이 교수가 대수기하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인류가 명왕성에 착륙하는 느낌이다. 판타지 같다는 말인데, 추상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수학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는 것의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의미를 알 턱이 없다. 그래서 짜증도 나고, 나보단 수백 배 정교하게 수학의 효능을 이해하는 이들이 부럽다.

오찬호 <민낯들: 잊고 또 잃는 사회의 뒷모습> 저자

오찬호 <민낯들: 잊고 또 잃는 사회의 뒷모습> 저자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 사이에 수학을 포기한 것 같다. 여기서 포기란, 성적이 좋지 않다 수준이 아니라 누가 어떻게 말하든 수학이라면 귀를 닫아버리는 완전한 무지의 상태를 뜻한다. 반복을 통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수학적 사고를 중단하니, 그전에 배웠던 것도 휘발된다. 중학교 때까지는 수학이 어렵지 않았던 내게, 중학생인 아이가 수학 문제집을 풀고 있는 모습이 나사 직원들처럼 보이는 이유일 거다.

내 탓이겠다만, 변명거리는 충분하다. 체벌 논쟁이 낯설었던 시절을 거쳐 오면서 학교에서 참으로 많이 맞았지만, 수학 시간만큼은 정말 깔끔하게 맞았다. 수학은 약간의 상상력을 허용하는 국어와 달랐고, 틀린 줄도 모르고 단어를 중얼대는 영어와는 달랐다. 모르니 틀리는 거고, 틀렸으니 맞는 거였다. 호명되면 자동적으로 엎드려뻗쳐 자세를 취했고 교사는 묻지도 않고 때렸다.

일반적으로 학생지도 명목으로 체벌이 이루어진 것을 볼 때, ‘몰라서’ 맞는 수학은 특별했다. 지각해서, 흡연을 해서 맞는 것과 문제를 못 풀어 맞는 건 좀 다른 건데 수학은 그래도 괜찮다는 암묵적 합의가 견고했다. 수학 시간마다 맞아도 되는 인간이 가려졌다. 그 폭력이 개인을 전혀 성장시키지 않음을 교사들도 알면서 때렸다. 여기서 약간 뜸 들이며 방황하면, 수학은 속성상 따라가기가 힘들다. 아마 그 언저리에서 나는 수학을 포기했을 거다. 내게 손을 내미는 공교육은 없었다. 포기하니, 포기했다면서 더 때렸고 나는 맞을수록 내 인생은 수학과는 무관할 거라고 다짐했다. 이런 내가 어찌 수학과 일상의 교차점을 알겠는가. 미지의 세계를 정교하게 분석하는 희열을 느껴보겠는가. 수학 몰라도 사는 데 지장 없다는 말이 부유하지만, 나는 훨씬 풍요로워질 수 있는 사고의 문을 열지 못하는 내가 답답하다.

허준이 교수가 필즈상을 수상하자, 수포자의 기적 어쩌고의 기사가 차고 넘쳤다. 당연하지만, 그는 수포자가 아니었다.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극복기로 덮어버리는 극적 서사에 집착하는 언론의 관성은 한심했다. 그런 반전이 가능하면 그게 어디 수포자이겠는가. 수포자 무시하지 마라. 수포자는 결코 수학으로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 수포자가 작가가 될 수도 있고, 부자가 될 수는 있겠지만 수학을 좋아할 리는 없다. 한국 교육의 부작용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지금은 좀 달라졌을까? 체벌은 약해졌지만, 수학 ‘점수’가 학력주의에 찌든 사람들의 의식구조에 파고드는 힘은 별반 다르지 않다. 여전히 수학의 결과물은 인간에게 우월감과 열등감을 신속히 제공하면서 명료한 사회적 구분을 야기한다. ‘수’의 위대함이 무엇인들, 그걸로 사람들을 수직적으로 구분하는 이 지독한 습관을 짚어내지 않고선 수포자는 사라지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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